296화. 전신(戰神)
“장익덕도 사람이다!”
“다 같이 덤비면 이길 수 있다!”
용감한 군관과 병사들 몇몇이 앞으로 나섰다.
장비는 말없이 쌍신모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눈앞의 마가군 병사들을 향해 한 번 크게 휘둘렀다.
콰드득!
장비가 힘껏 휘두른 쌍신모는 병사들의 갑옷을 쪼개고 뼈를 부쉈다. 중간중간 갑옷이 창날에 걸릴 때마다 쇠가 쇠를 끊어내는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으아아악!”
“아으윽!”
쌍신모에 정통으로 맞은 병사들은 입도 열지 못하고 절명했다. 빗맞아서 불구가 된 병사들이 절규하고, 뒤에서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이 공포에 차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콰드득.
콰드드득!
장비는 한 번 쌍신모를 휘두를 때마다 쇠와 뼈가 잘리는 소리를 울리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고리눈을 부릅뜨고, 수염이 올올이 뻗친 채 다가오는 장비를 보자 대열이 혼란에 빠졌다.
절에 다니는 군관 하나가 넋을 잃은 채 중얼거렸다.
“아수라… 저자는 아수라다…….”
머리가 셋에 팔이 여섯 개 달렸다고 하는 타국의 괴물.
살아생전 죄를 지은 사람은 전쟁이 끊이지 않는 아수라들의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한다. 군관이 보는 장비의 모습이 딱 그랬다.
순식간에 마가군의 대열을 망가뜨린 장비.
그를 보자 서황의 마음도 급해졌다.
‘빨리 이 자를 처리하고 장익덕을 상대해야 한다.’
서황의 눈앞에 있는 상대는 위연이었다.
위연은 거구의 서황보다 훨씬 작았다. 평범한 체격에 눈빛만 날카로웠다.
“어딜 보느냐, 서황!”
서황은 대부를 들어 위연을 내리치려 했다. 그러나 위연은 그보다 더 먼저 대도를 들어 서황을 향해 휘둘렀다.
깡!
대부와 대도가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한 수를 교환하자 서로의 실력을 알 수 있었다. 서황의 눈썹이 꿈틀했다.
‘낭패로군.’
위연의 칼날은 무겁고 강했다.
단시간 내에 처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다.
깡! 깡!
위연과 서황은 그대로 어울려 무예를 겨루기 시작했다. 주변의 군사들이 끼어들 수 없는, 수준 높은 공방이었다. 위연이 이끄는 부대도 전진을 멈추고 수장끼리 승부가 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위연은 목숨이 오가는 와중에도 서황을 보며 이죽거렸다.
“솔직히 말해 보라고. 이렇게 단병으로 겨루는 건 오랜만 아닌가. 예전 같지 않지?”
“시끄러운 자로군.”
“흥, 명장이라고 주변에서 추켜 주니까 기고만장했겠지. 인수(印綬)를 떼고 붙으면 얼마나 대단한가 한번 보자고.”
부웅!
위연이 대도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 쳤다. 한 방으로 승부를 내려는 듯 강맹한 일격이었다.
서황은 대부의 날을 뒤로 뺐다. 그리고 기다렸다.
위연의 대도는 아주 미세한 차이로 서황의 몸을 비껴갔다. 칼을 크게 헛친 위연의 자세가 무너지자, 서황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대부를 내리쳤다.
그대로 승부가 날 것처럼 보였다.
콰직!
그러나 나지 않았다. 서황의 대부에는 옆에서 날아든 쌍신모의 창날이 꽂혀 있었다.
어느새 서황의 옆으로 다가온 장비가 서황을 저지한 것이다.
장비가 혀를 차며 말했다.
“위문장이, 너 그러다 죽어.”
“장 장군이 다가오는 걸 보고 일부러 크게 휘둘러 본 겁니다. 혹시 압니까? 주아부의 현신이라는 서황을 내가 잡을지.”
위연은 씩 웃으며 칼을 거뒀다.
장비는 서황을 보며 말했다.
“자, 어쩔 텐가? 이대로 죽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항복하면 훗날을 도모할 수 있지 않겠어?”
“훗날이라.”
서황은 창날에 관통당한 대부와 장비를 번갈아 쳐다봤다.
장비의 무용은 격이 달랐다. 움직이는 도끼날을 창으로 뚫어 버리는 자는 본 적도 없었다.
더 무서운 것은 지략이었다. 자기 자신을 미끼로 삼아, 강물 속에 고립되어 적의 공격을 받아내면서 별동대가 이동할 시간을 번 것이다.
“이제 방법이 없군. 좋다. 여기서 투항하지. 단, 나는 연군을 조금도 돕지 않겠다. 그저 포로의 몸으로 양왕 전하의 승리를 기다릴 뿐이다.”
툭.
서황은 대부를 놓았다. 장비는 창에 꽂힌 대부를 바닥에 내던졌다.
“잘 생각했네. 나에겐 훗날이 없지만, 자네는 또 모르는 일 아닌가.”
장비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업성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위연이 휘파람을 불며 뒤를 따랐다.
“훗날이 없다. 자신도 아는 건가.”
서황은 장비의 뒷모습을 보며 낮게 읊조렸다.
장비가 싸움을 건 상대는 천하의 13주 중 12주를 차지한 대장군 마초다. 장비나 관우가 개인의 무용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전쟁을 조금 길게 끌 수 있을 뿐, 승패를 뒤집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알면서 저자는 왜……?’
어째서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일으킨 것일까.
장비의 뒷모습을 아무리 바라봐도 답을 얻을 수 없었다.
* * *
“자신의 용맹을 미끼로 삼아 지략을 쓰다니. 지용겸비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나.”
법정은 업성의 북문을 타고 오르는 백이병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본래 지용겸비를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던 법정이다. 확실하게 용맹한 자와 확실하게 지모 있는 자가 함께 전쟁을 치르는 게 더 효율적인 방식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장비의 싸움을 보며 생각이 변하고 있었다.
‘장비는 용맹과 지략을 번갈아 쓰는 것이 아니다. 용맹에 기반한 지략을 쓰는 것이다. 이번에 쓴 것도 장비만큼의 용맹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지략… 어떤 무장도, 어떤 군사도 따라갈 수 없는 경지로군.’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싸운다고 가정했을 때, 천하에서 가장 강한 자가 누구인가.
법정은 그것이 장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업성의 북쪽에서는 순식간에 서황을 제압한 장비의 부대가.
남쪽에서는 이름 모를 장수의 부대가 각각 성벽을 뚫었다.
그러나 법정은 항복하지 않았다.
“우리는 대장군의, 양왕 전하의 신하들이다. 우리의 손으로 전하와 함께 난세를 끝내 왔다. 긍지를 잃지 마라.”
법정은 내성에 군사들을 모아 놓고 결사항전하고 있었다.
“쿨럭!”
문득 법정의 입에서 한 움큼 피가 쏟아졌다. 동시에 뱃속을 헤집는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병에 걸린 몸에서 생명이 꺼져 가고 있었다. 대강의 사정을 아는 군사들은 애써 모른 척하며 눈앞의 적군에게만 주의를 집중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비가 혼잣말을 했다.
“병든 몸으로 끝까지 싸우겠다는 건가. 마맹기의 곁에는 참 인물이 많군.”
무슨 생각인지, 장비는 부하들에게 흰 염료를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거대한 방패의 중앙에 흰 염료로 원을 그렸다. 멀리서도 잘 보일 만큼 큼지막한 원이었다.
장비는 방패를 등에 진 채, 내성 앞에 서 있는 정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란은 본래 성안으로 화살을 쏘기 위한 나무 탑이니, 정란의 맨 위로 올라가자 내성 안의 법정과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투항하지 않겠나.”
장비는 목소리가 컸다. 특별히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장비의 말이 또렷하게 들렸다.
법정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가. 아쉽군.”
장비는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방패를 허공에 치켜들었다.
“아니?”
“뭐, 뭐 하는 거지?”
내성 안의 군사들이 장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듯 술렁거렸다. 그러나 장비는 말없이 허공에 방패를 들고 있을 뿐이었다.
쐐애애액.
뭔가가 공기를 찢는 소리가 날 때까지, 아무도 장비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쾅!
100장 뒤에서 날아온 화살이었다. 단창만큼 거대한 화살은 정확히 장비가 들고 있던 방패의 흰 원을 뚫고, 그대로 법정에게로 날아갔다.
콰직!
법정의 여윈 몸이 화살에 딸려 날아갔다. 화살은 법정의 등 뒤에 있던 돌벽에 절반이나 박힌 뒤 멎었다.
“으아악!”
“법 군사!”
주변의 병사들과 군관들이 비명을 질렀다.
법정은 즉사했다. 표정에서 전혀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장비는 낮은 한숨을 쉰 후, 정란에서 내려왔다.
지휘관을 잃은 내성의 수비병들의 기세가 급격히 꺾였다. 한 시진이 되지 않아 연군은 내성을 열어젖히고, 업성을 완전히 빼앗을 수 있었다.
몸소 미끼가 되어 전황을 마음대로 끌어간 주장 장비.
목숨을 걸고 도하 지점을 확보하고, 서황군을 옆에서 들이치는 임무까지 성공한 부장 위연.
장하를 따라 우회해서 남쪽을 기습하고, 법정을 저격한 별동대장 관색.
세 장수가 한 자리에 모였다.
“대승입니다, 숙부님.”
관색이 장비에게 군례를 올렸다. 하지만 장비는 고개를 저었다.
“방심해서는 안 된다. 마가군의 주력이 나타나면 이 정도가 아닐 것이다.”
“하오면…….”
“우리는 계획대로 한다. 지체하지 말고 남하해서 연진을 점령한다.”
업성을 얻었으니, 황하를 경계로 마초와 장기전을 벌일 수 있다.
그러나 장비가 원하는 것은 장기전이 아니었다.
“연진을 얻으면 황하를 장악할 수 있다. 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단숨에 낙양을 들이칠 것이다.”
이곳에서 연진까지는 사흘이 걸린다.
내일 바로 연진으로 달려 하루 만에 연진을 점령한다면, 개전 20일만에 낙양으로 향하는 진격로를 확보하는 것이다.
위연은 장비를 보며 씩 웃었다.
“노자경 선생 말이 맞았군요.”
“뭘 말이냐?”
“장 장군은 전신(戰神)이라고 하더이다. 다만 본인이 그런 칭호에 관심이 없을 뿐이라고 하더군요.”
위연의 칭찬을 들은 장비는 인상을 찌푸렸다.
“흰소리 말고 임무에 집중해라. 우리의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예,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휘파람을 부는 위연을 뒤로 하고, 장비는 먼 동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마초의 입장이 되어 생각했다. 만약 연군이 남하한다면, 마가군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전을 펼칠 것임은 자명한 일.
그러니, 마초는 틀림없이 동쪽의 연주와 청주에 군사들을 배치해 놓았을 것이다.
“동쪽에 숨겨 놓은 군사들로 우리를 포위할 작정이었겠지. 하지만 그쪽에야말로 전신이 가 있단 말이지.”
장비의 두뇌가 맹렬하게 회전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연주와 청주 방면을 공략 중인 관우가 질 것 같지는 않았다.
* * *
연주 동무양현.
연주와 청주의 경계에 있는 이곳은 지금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궁기병대, 산개하라!”
연군 군사 노숙이 우렁차게 소리치자, 주위의 병사들이 일제히 군기와 징으로 신호를 보냈다.
두두두두.
구루돈이 이끄는 오환족 궁기병대가 넓게 펼쳐지며 적군을 둘러쌌다.
적군은 곧 연주자사부의 군사들이다. 이들을 이끄는 연주자사 서서의 미간에 주름이 짙게 팼다.
“당황하지 마라. 수레를 앞에 세우고, 연노를 준비하라!”
끼이익.
군사들이 서서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수레 뒤에 숨어 덮쳐 오는 오환족 궁기병들의 공격을 막으니, 양쪽이 쉽게 승부를 내지 못했다.
“적진에…….”
“…대단한 인물이 있군.”
노숙과 서서의 입에서 동시에 감탄이 나왔다.
상대방의 지휘가 너무나 단단했다. 쉽게 깨뜨릴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전선이 교착되면 누구에게 유리할 것인가?
“시간은 아군의 편이오. 곧 연군이 도박수를 걸어 올 것이오. 장 장군께서는 그때 연군의 도박수를 분쇄해 주시오.”
서서는 옆에 있는 중랑장 장패를 돌아보며 말했다.
장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소. 연군에는 틀림없이 관우나 장비가 있을 터. 그러나 아군도 준비를 단단히 했으니, 충분히 천하 용장을 잡을 만하오. 만에 하나 일이 어그러질 경우에는…….”
“알고 있소.”
서서와 장패는 서로 마주 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서주의 군벌이었던 장패는 백여 기의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게다가 서서에 의해 무용이 극히 뛰어난 무사들도 셋이나 추가되었다.
관우나 장비가 돌진해 오면 이들을 전부 투입해서 난전을 벌여 잡아낸다.
만약 그러고도 전황이 어려워질 경우, 서서가 연노대를 투입해서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벌집으로 만드는 전략이었다.
‘서원직. 참으로 무서운 인물이다. 저 정도의 인물이 제갈량이나 육손, 방통에 밀려 외직을 전전하다니.’
장패는 서서의 옆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사실 장료나 감녕, 황충에게 밀려 있는 장패 자신의 처지도 서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왕 유비가 사망한 직후, 마초는 서서를 연주자사로 부임시켰다.
서서는 곧바로 연주에 3만 대군을 육성했다. 관우와 장비가 유비의 복수를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면, 업성을 통해 최단 거리로 낙양으로 내려올 것이다.
업성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을 때, 옆에서 업성을 들이치는 것이 서서의 임무였다. 그것을 위해 후방인 연주에 3만이나 되는 군사를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서서의 칼 역할로 발탁된 인물이 중랑장 장패였다. 본래 서주 군벌이었다가 마초와 조조의 대결 국면에서 마초의 편에 섰던 인물이다.
장패 또한 실력은 확실하다. 그러나 마초가 천하를 평정하는 동안 큰 공을 세운 무장들이 너무 많아서, 상대적으로 중용되지 못하던 인물이다.
“옵니다. 준비하시오.”
서서가 장패를 보며 말했다.
교착 상태에 빠진 전황을 뒤집기 위해, 연군 진영에서 한 무리의 군사들이 돌격해 오고 있었다.
장패는 고개를 끄덕이고 휘하의 기병대를 소집했다. 그리고 세 명의 무사에게도 각자 지시를 내렸다.
두두두두.
적의 돌격대가 가까워져 오며 선두에 선 자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었다.
“흡.”
장패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숨을 들이마셨다.
누에처럼 짙은 눈썹과 봉의 눈. 붉은 얼굴에 배까지 드리운 수염.
관우가 연군의 선두에 서서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