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화하진동 (2)
218년 9월.
마초의 포고문이 천하 모든 고을에 뿌려졌다.
처음 포고문을 쓴 것은 원소군 출신의 유명한 문사 진림이었다. 그러나 마초는 진림의 문장을 지나치게 미사여구가 많다며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나선 게 매제 왕찬이었다. 마초는 왕찬의 문장도 거절했다.
마지막으로 나관중이 나섰다. 제위에 오를 수밖에 없는 당위성이 절절하게 표현된 명문이었다. 그러나 마초는 그마저도 채택하지 않았다.
결국 마초는 직접 포고문을 썼다. 그답게 직설적인 문장이었다.
[양왕 마초가 논한다. 무릇 천하는 덕 있는 자가 다스리는 것이다. 400년을 이어 온 한의 천명이 다했으니, 고(孤)는 이제 천명을 받들어 제위로 나아갈 것이다. 고가 천하를 어떻게 통치해 왔는지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수긍할 수 없는 자는 창검을 들고 도전하라. 군사를 휘몰아 깨뜨린 후, 당금 천자에게 선양받을 것이다.]
기주 업성.
법정은 포고문을 읽으며 킥킥거리며 웃었다.
“황제가 될 테니까 불만이 있으면 한꺼번에 덤벼라? 으하하하!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군! 역시 우리 주공이야.”
그런데 법정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볼은 쑥 들어가고, 원래도 마른 체격이 더 야위어 있었다. 눈 밑은 시꺼멓게 변해서 곧 쓰러질 사람처럼 보였다. 오직 눈빛만 더욱 날카롭게 빛날 뿐이었다.
법정을 바라보던 서황이 한숨을 내쉬었다.
“법 군사,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낙양으로 돌아가시오. 내년에 주공께서 제위에 오르시는 걸 봐야 할 것 아니오.”
“하하, 서 장군.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소. 이미 오장육부가 다 썩었으니 버티기 어렵소이다.”
“법 군사는 아직 젊지 않은가. 정양하다 보면 병은 나을 수도 있지 않겠소?”
“장중경 선생이 어렵다고 하더이다.”
“으음…….”
장중경의 진단이라는 말을 듣자 서황도 더 이상 권하지 못했다.
법정은 원래의 역사에서 220년에 원인불명의 병으로 죽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마초는 수년 전부터 이름난 명의들을 수시로 법정에게 보내 진찰하게 했다.
그러나 인명은 하늘에 달린 것이라 했던가.
법정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하루하루 야위어 가고 있었다. 역시 40대의 나이로 죽었던 법정의 아버지 법연과 똑같은 증세였다. 암이라 고대의 의사가 진찰할 수 없었던 것인지, 혹은 다른 병인지는 이제 와서 알 수 없는 일이다.
법정은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러자 해야 할 일이 명확히 보였다.
“곧 관우가 연나라 군사들을 이끌고 남하할 터. 나의 마지막 싸움이 될 것이니, 최전선에서 그들의 예봉을 꺾고 죽을 것이오.”
그리하여 법정은 기주 업성으로 부임한 상태였다. 연군이 낙양을 향해 남하하다 보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서황이 자원해서 법정의 곁을 지켰다. 서황과 법정, 그리고 거대한 업성이라면 연의 대군을 맞이해서도 시간을 끌 수 있을 것이다. 서황과 법정이 적의 대군을 저지하고 있으면, 마초가 본대를 끌고 올라와 업성 일대의 적을 포위하고 섬멸전을 벌이는 작전이었다.
서황은 법정을 보며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가 법 군사의 충의를 기억할 것이오. 서모 또한 법 군사를 잊지 않겠소.”
“말씀만이라도 고맙소. 주공의 곁에는 내가 아니어도 뛰어난 인물들이 많으니, 그들이 새로운 천하를 잘 다스릴 것이오.”
도량이 작고 성질이 사납던 법정이다.
하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자 그런 성격도 변했다. 이제까지 집요하게 헐뜯던 마가군의 젊은 인재들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갈량, 육손, 그리고 방통 같은 이들이었다. 특히 방통은 법정이 직접적인 경쟁상대로 여겨 가장 많이 폄하하던 인물이었다.
“서 장군은 적이 언제쯤 업성에 도착할 것 같소?”
법정이 묻자 서황은 턱을 쓸며 대답했다.
“관공이 탁군에서 거병한 지 벌써 보름이 지났소. 앞으로 늦으면 한 달, 빠르면 보름쯤 걸릴 것이오.”
관우가 거병했다.
대외적인 명분은 천자의 눈과 귀를 흐리는 대장군 마초를 처단하여 바로 세운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왕 유비의 복수전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때맞춰 마초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으니, 하북의 정세는 뜨겁게 요동치고 있었다. 마초의 황제 등극을 원치 않는 대호족들은 전부 관우의 편에 섰다. 균전제와 양세법을 폐지하고, 다시 호족의 땅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은 마초가 죽는 것밖에 없었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하북의 정세에, 마초는 다시 한번 기름을 끼얹었다.
[현령들은 군량고를 태우지 마라. 연군이 군량을 요구하면 전부 내어 주어라. 고가 한 번 싸움으로 적을 크게 깨뜨리고 군량을 되찾을 것이다. 명을 따르지 않은 자에게는 이후 책임을 묻겠다.]
군량을 태워서 적의 진격을 늦추는 청야전술도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늦가을에 시작된 전쟁이다. 내년 봄까지 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하북은 일 년 농사를 망친다. 마초의 지시는 그럴 경우에 대비해 비축한 식량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물론, 적의 보급 상황과 관계없이 한 번 싸움으로 승패를 가를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건 주공께서 잘하고 계신 거요. 지금 천하 모든 곳의 곡창이 넉넉하니, 적이 식량을 확보하는 건 어차피 시간문제요. 주공께서는 기존의 왕조를 폐하고 새 왕조를 여시려는 분이오. 건국 후의 혼란을 방지하려면 이 기회에 민심을 얻는 게 낫소.”
서황도 고개를 끄덕였다.
관우가 이끄는 연군이 곧 쳐들어올 것이다. 빠르면 보름 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일이 두 사람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닥쳤다.
“급보! 북쪽에 적군입니다!”
전령이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며 고했다.
서황과 법정은 즉시 자리를 박차고 성문 위로 올라갔다.
업성의 북쪽으로 장하라는 강이 흐른다. 장하의 건너편으로 어림잡아 1만에 달하는 적군이 개미떼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아직 역참을 통해서도 연락이 들어오지 않았다. 어찌 이렇게 빨리 당도할 수 있는가?”
장안성을 떨어뜨린 명장 서황.
그런 그도 놀랄 정도의 빠른 진격이었다. 적군이 예상보다 보름이나 빨리 도착한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하북이다. 끝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으니,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아주 빠르게 진격할 수 있다.
마침 서황은 그런 빠른 진격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상산에서 흑산적과 싸울 때였다. 주공을 따라 이 정도의 속도로 달렸던 적이 있다. 그때의 경험에 비춰 보자면…….’
이 정도의 속도를 내려면 조건이 있다.
군사들이 전원 기병이어야 하고, 예비 말을 갈아타며 달려와야 한다는 것이다.
법정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법정은 장하 건너편의 적군을 유심히 살피더니 말했다.
“오환족이 붙어 있군. 저들이 도움을 준 것이 틀림없소.”
연군의 3분의 1 정도는 오환족 기병들이었다. 연군이 쓸 만한 예비마를 댄 것도 오환족이 틀림없었다.
가만히 적을 관찰하던 법정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서 장군. 저들이 전원 기병이라면 공성 병기는 갖추지 못했을 거요.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도하 장비도 없을 것이오.”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면, 병장기 외에는 무거운 짐을 가지고 올 수 없다.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할 서황이 아니었다.
“배도, 다리도 없이 강을 건너야겠군. 좋소. 저들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들이치겠소.”
서황은 그 자리에서 출진을 결의했다.
적이 무사히 강을 건너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은 병법의 기본이다.
적장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관우가 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장비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서황은 적장의 명성 따위를 겁내는 인물이 아니었다.
* * *
“어허, 물이 아주 시원하구만. 정신이 번쩍 드는데.”
장비는 장하의 강물을 한 바가지 퍼서 머리부터 뒤집어쓰며 껄껄 웃었다.
늦가을의 하북이다. 이 상태로 강에 들어가면 뼛속까지 시린 추위가 엄습할 것이다.
그런데 장비를 따라온 군사들은 저마다 낄낄거리며 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선봉에 선 위연은 아예 옷을 다 벗어 던진 채 상체에 치렁치렁 밧줄을 묶었다. 그리고 장비를 보며 투덜거렸다.
“내 참. 장익덕 장군은 지모가 뛰어난 명장이라더니, 설마 이런 정신 나간 작전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정신 나간 부장이 있는데 써먹지 않으면 그건 주장이 아니지. 위문장이, 네가 딱 좋아하는 작전 아니냐?”
“그건 그렇지요.”
위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장하 건너편을 노려봤다.
장비와 백이병들이 도하하며 미끼가 되는 동안, 자맥질에 능한 위연이 하류로 이동해 강 건너편에 밧줄을 묶는다.
성공하면 도하 방법을 확보할 수 있는 훌륭한 작전이었다.
그리고 실패하면 위연이 죽는다.
“그러니까 성공해야지. 으랏차!”
위연은 기합을 한 번 넣고 하류로 이동했다.
장비는 백이병들과 함께 양의 창자로 만든 부대를 끌어안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행군하느라 나무 뗏목을 가져올 틈도 없었다. 북방 유목민들이 하는 것처럼, 양의 창자에 공기를 채워 만든 부대를 몇 개씩 안고 헤엄쳐서 강을 건널 생각이었다.
서황은 성문을 열고 나왔다. 군사들이 서황의 지휘하에 일사불란하게 강 근처에 섰다.
“쏴라!”
장비가 강을 중간쯤 건넜을 때,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선두의 백이병 몇몇이 화살에 맞아 물속으로 사라져 갔다. 더 이상 전진하면 화살비 속을 통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어, 시원하다. 다들 멱이나 감아라!”
장비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방향을 옆으로 틀었다.
강을 건너던 백이병들이 강줄기를 따라 측면으로 우회하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화살에 막혀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된 것처럼 보였다. 부장이 다급하게 서황에게 물었다.
“장군, 뗏목을 띄워서 섬멸할까요?”
“기다려라. 장익덕은 지모가 많은 자다. 이대로 적을 묶어 두고 도하하지 못하도록 지켜본다.”
늦가을이다. 물속의 적이 오래 버틸 리 없다. 시간을 끌면 저체온증으로 막대한 손실을 낼 것이다.
그것이 서황의 계산이었다.
그때, 서쪽 방면에서 다급히 전령 한 기가 달려왔다. 등에 화살이 두 대나 꽂혀서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전령은 간신히 업성 안으로 들어가 법정에게 말을 전했다. 전령의 말을 듣는 법정의 눈이 커졌다.
“섭현이 벌써 떨어졌다고?”
“그렇습니다! 적들 중 일부가 태행산맥으로 우회, 섭현을 들이쳤습니다!”
“적장은 누구냐?”
“이름 모를 장수입니다. 관우, 장비에 버금가는 무용을 가진 자였습니다!”
전령의 말을 들은 법정의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섭현은 장하의 상류에 있는 고을. 그 섭현을 들이쳤다면, 그자는 저 장비보다 더 빠르게 기동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었다.
적장이 섭현을 점령했다면 배를 얻었을 것이다. 그 배로 장하를 따라 이동했다면, 지금쯤 업성의 남쪽 방향을 들이칠 수 있을 것이다.
“급보! 남쪽에 적병! 숫자는 약 3천, 성벽으로 접근합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법정은 이를 갈며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주력을 남쪽으로 돌려라. 적이 성벽을 오르지 못하게 하라! 서 장군에게 신호를 보내 성안으로 들어오라 일러라!”
퇴각의 징 소리가 울렸다.
서황은 잠시 고민했다.
‘백이병들이 물속에 너무 오래 있었다. 이제 곧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저들 중에 장익덕이 있지 않은가.’
여기서 장비를 잡을 수 있으면 전황이 뒤바뀐다. 그리고 그 장비는 지금 떨어진 체온 때문에 손발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결국 서황은 공격적인 선택을 했다. 눈앞에 너무 큰 기회가 보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장익덕을 잡으면 군사 1만을 섬멸하는 것보다 가치가 크다.”
그것이 패착이었다.
잠시 후, 강 속의 백이병과 대치하고 있던 서황의 측면에서 한 무리의 군사들이 나타났다. 동쪽, 장하의 하류 방향으로 우회해 도하한 위연과 그의 부곡들이었다.
“나와라, 서황! 네놈의 도끼가 센지, 내 대도가 센지 한번 겨뤄 보자!”
위연은 서황의 명성에 짓눌리지 않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대도를 뽑아 들고 돌진할 뿐이었다.
군사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군사들의 선두에 선 위연의 무용이 문제였다. 위연이 군사들을 풀 베듯 쓰러뜨리며 전진하니 서황의 부대는 금세 대열이 흐트러졌다.
위연을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오냐. 내 직접 너를 상대해 주마.”
서황은 대부를 들고 말을 달려 위연을 상대하기 위해 이동했다.
위연의 기습으로 대열이 흐트러진 서황의 부대.
의문의 장수가 기습해서 원군을 내보낼 틈이 없는 업성 수비군.
그렇게 양쪽의 발이 묶이자, 전황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늦가을의 강물 속에서 죽어가던 백이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이병의 선두에는 큼직한 방패로 몸을 가린 장비가 서 있었다.
퍽. 퍽. 퍽. 퍽. 퍽.
방패에 화살 여러 대가 박혔다. 그러나 방패의 무게 때문인지, 장비의 힘 때문인지 방패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쿵.
마침내 장비가 땅 위로 올라섰다. 장비는 왼손에 방패를, 오른손에 쌍신모를 든 채 꼿꼿이 섰다. 흠뻑 젖은 온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연인 장비가 여기 있다!”
하늘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함이었다.
장비의 기세에 눌린 군사들이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군사도 있었다.
그 기세 때문일까. 장비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물기가 사라졌다. 흠뻑 젖어서 늘어졌던 수염이 한 가닥씩 뻗쳐오르기 시작했다.
“죽고 싶은 놈은 덤벼라.”
장비가 씩 웃었다.
하지만 고리눈을 부릅뜨고 있는 그를 보고 웃는다고 여기는 군사는 한 명도 없었다. 수염은 어느새 다 말라서 밤송이처럼 뻗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