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화하진동 (1)
유주 탁군.
연왕부의 대전에는 북방의 유명한 학자들이 모여 있었다.
“이에 노나라 은공이 묻자, 대부 중중이 답하기를, ‘덕으로 백성을 화합하게 한다는 말은 들었어도(聞以德和民) 난을 일으켜 그리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不聞以亂)’라고 하였습니다.”
대전의 중앙에서 춘추좌씨전을 강론하는 노인은 유주의 명사 병원이었다.
얼핏 보면 왜소한 백발의 노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병원이다. 그러나 좌전을 논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대저 무력이란 불과 같아서(夫兵猶火也), 잘 거두지 못하면 도리어 자신을 불사르게 됩니다(弗戢 將自焚也). 대부 중중은 위나라의 주우가 변란을 일으켜 야망을 달성하려 했으나, 그것은 끝내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논한 것이지요.”
“그렇습니까.”
병원의 강론을 듣기 위해 모인 연왕부의 관원들은 도합 삼십여 명.
그러나 그들 중 병원과 문답을 주고받는 인물은 단 한 명, 상장군 관우뿐이었다.
관우의 나이도 어느덧 육십이 가깝다. 이미 머리와 수염은 절반이나 흰색으로 변해 있었다.
주변 사람들을 짓누르던 위압감도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체격은 크지만, 하는 행동은 영락없이 교양 있는 선비나 다름없었다.
유비가 죽은 후.
관우는 조문하러 온 유주의 유명한 학자들을 붙들고 연일 좌전에 대한 강론을 듣고 있었다. 강론을 듣는 관우의 얼굴에는 슬픔도, 분노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관우의 행동을 두고 수군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충격이 커서 실성했다거나, 겉만 멀쩡한 폐인이 되었다거나, 원래 사람됨이 조금 이상한데 무력이 하도 뛰어나서 티 나지 않았을 뿐이라거나 하는 말들이었다.
관우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상복을 입은 채 매일 좌전 강의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관공.”
“말씀하십시오, 병 선생.”
“관공께서 이미 좌전에 대한 이해가 깊으시니, 이 늙은이가 한두 마디를 더하고 뺄 게 없습니다.”
“과찬이십니다.”
“다만 한 가지를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진 문공의 충신 개자추가 말하기를, ‘남의 허물을 책망하면서 같은 허물을 저지르는 것은,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라 하였습니다(尤而效之 罪又甚焉).’”
“그렇지요. 문공편은 일찍이 많은 분들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관공. 무력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관우에게 직언을 하는 병원.
대전의 공기가 일순간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돌아가신 연왕께서 관공께 좌전을 권하셨다 들었습니다. 좌전을 보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다고 하셨다지요.”
“맞습니다.”
“좌전의 가르침은 명확합니다. 사사로운 원한을 위해 군사를 일으켜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병원은 원래 힘 있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태도가 그를 명사로 만들었다.
그러나 대전에 모인 삼십여 명의 관리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저 숨을 죽인 채 관우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정작 직언을 들은 관우는 태연했다.
“그렇지요. 좌전에 이르기를, 사사로운 원한을 위해 군사를 일으켜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마땅하겠지요.”
관우는 반백의 수염을 조용히 쓸어내리며 눈앞의 차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흠잡을 데 없이 우아한 동작이었다.
* * *
연왕 유비의 빈소.
상주를 맡은 왕세자 유례는 유비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그는 본래 손씨 성을 쓰는 탁군 출신의 청년이다. 원래의 역사에서 위나라에 출사하여 삼공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연왕이 되어 유주로 돌아온 유비는, 일찍이 고향 청년 중 지성과 과단성을 겸비한 손례를 눈여겨보고 양자로 삼았다. 친아들 유선이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만약 유선이 장성하기 전에 자신이 죽으면, 유례로 하여 후사를 잇게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밤이 되어 조문객이 끊기자, 유례는 빈소 한켠에 위치한 쪽방에 몸을 기댔다. 연일 계속되는 상례는 20대 청년의 몸으로도 견디기 힘들었다.
“크흑흑흑! 전하! 주공!”
조문객들이 나가자, 오늘도 어김없이 유비의 관을 끌어안고 통곡하는 자가 있었다. 장수 위연이었다.
“이놈이 어떻게든 주공을 찾아내서 구했어야 했습니다. 아니, 못 찾겠으면 그 자리에서 같이 죽었어야 했습니다! 크흑… 크아악!”
위연은 항상 술에 만취해서 쓰러져 있었다. 그러다 술이 깨면 저렇게 유비의 관을 부여잡고 오열하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취해 쓰러진 상태에서 구토하다 기도가 막혀 죽다 살아났는데, 따라 죽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더욱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위 장군, 그러다 몸을 상하십니다.”
보다 못한 유례가 말렸지만 위연은 말을 듣지 않았다.
“저하! 으흐흐…….”
병졸이었던 자신을 발탁해서 장군으로 만들어 준 것에 대한 고마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비와 위연 사이에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적인 유대가 있었다. 위연은 오늘도 피눈물을 쏟아내다 흘리다 혼절할 지경이 되어서야 부하들에게 업혀서 나갔다.
밤마다 빈소에 와서 슬퍼하는 이들은 위연뿐만이 아니었다.
공허한 눈으로 유비의 위패를 바라보는 노숙.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관색.
진도, 간옹, 손건, 미축.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유비를 추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들이 기다리던 인물이 빈소에 도착했다.
“대형. 아우가 왔소.”
오환족 평정을 위해 대흥안령산맥까지 원정을 나가 있던 장비가 도착한 것이다.
장비는 관을 열어 유비의 시신을 마주하자 눈물을 뿌렸다. 정성껏 염습을 했지만, 유비의 몸에서는 죽음 직전 있었던 처절한 전투의 흔적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장비를 따라온 사내는 장비만큼 몸집이 큰 거한이었다. 모피로 만든 옷과 화려한 장신구를 보면 한인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거한의 정체를 눈치챈 것은 노숙이었다.
“오환 선우십니까.”
“그렇소. 구루돈이오.”
“상중이라 손님을 맞는 예를 다하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노숙은 황망한 와중에도 구루돈을 향해 예의를 갖췄다.
구루돈은 험악한 외모와는 달리 제법 교양을 갖춘 인물이었다. 능숙한 한어로 노숙에게 사양을 표했다.
“나는 장익덕 장군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한 몸이오. 장익덕 장군의 주군은 내게도 주군이 되시니, 노 선생은 신경 쓰실 필요 없소.”
이야기인즉 이랬다.
북방의 대흥안령에서는 선비족과 오환족이 치열한 다툼을 하고 있었다.
장비는 오환 선우 구루돈의 편을 들기로 하고 구루돈이 선비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도왔다.
장비의 도움을 받은 오환족은 크게 이겼다. 그런데 선비족 패잔병 일부가 오환족의 본거지를 약탈하려 했다.
그때 장비가 오환족의 본거지를 지켜냈다. 장비는 단신으로 선비족 백여 명을 도륙하며 약탈을 막았고, 처자식을 구원받은 구루돈은 장비와 안다의 맹세를 하고 장비를 끝까지 따르기로 한 것이다.
유비의 시신을 맞이한 장비는 한참 동안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장비는 기본적으로 냉철한 인간이었다. 곧 정신을 차리고, 유례와 노숙으로부터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듣기 시작했다.
“연일 학자들이 와서 좌전을 강론하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운장 숙부께 여러 번 사람을 보냈지만… 좀처럼 이곳으로 오지 않으십니다.”
“그러냐.”
장비는 제자리에서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유례, 노숙, 위연, 관색, 간옹, 손건, 미축, 진도, 구루돈은 가만히 장비의 입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결단할 수 있는 것은 장비밖에 없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장비가 입을 열었다.
“모두 원수를 갚고 싶겠지. 하지만 대장군 마초는 강하다. 휘하의 군사가 몇십만일지 헤아리기 어렵다.”
“그래서 이대로 뭉개자는 말입니까?”
발끈하는 위연.
장비는 여전히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운장 형이 계속 혼이 빠진 상태라면, 우리끼리 마초에게 덤비는 것은 무모하다. 전부 다 죽을 것이다.”
“만약 관공이 나선다면요?”
“그래도 대부분 죽겠지. 하지만…….”
번쩍.
장비가 고리눈을 부릅뜨자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원수를 갚고 죽을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운장 형이 같이 나선다면 가능하다.”
“장 장군. 그 말씀은…….”
“이곳에 남는 관이 있느냐.”
장비는 뭔가 생각난 듯 유례에게 물었다.
유례는 고개를 끄덕였다.
“향나무로 짠 관이 하나 있습니다.”
“잘 됐구나. 너희들은 관을 들고 나를 따라라. 그리고 구루돈. 너는 내 창을 가져오너라.”
움찔.
장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모두의 솜털이 곤두섰다. 유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숙부님. 어찌하실 셈입니까.”
“운장 형에게 가서 담판을 지을 것이다. 일이 잘못되면 둘 중 하나는 죽을 테니, 너희들은 죽는 자를 관에 넣어 장사지내라.”
“숙부님!”
“뭘 그리 놀라느냐. 나와 운장 형, 둘 중 하나라도 없으면 싸워도 의미가 없다.”
그렇다는 것은, 둘 다 있다면 마초를 상대로 싸울 자신이 있다는 것일까.
장비는 말없이 쌍신모를 들고 관우의 거처로 향했다.
빈소에 모여 있던 연왕부의 중신들은 수레에 관을 실은 채 장비의 뒤를 따랐다. 장비의 기세가 너무나 흉흉하여 아무도 장비에게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리고 관우의 집에 도달했을 때, 중신들은 당황스러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분명히 한밤중이다. 그러나 관우의 집은 대낮처럼 밝았다.
후원에서 큰 불길이 일어나 있는 것이다.
타닥. 타닥.
후원에는 가득 쌓인 나무 더미 위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관우는 일행에게 등을 돌린 채, 불길 앞에 우뚝 서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관우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쿵.
장비가 쌍신모를 땅에 짚으며 대답했다.
“형이 폐인이 되었다기에 찾아왔소.”
“그런가.”
관우는 여전히 무심한 말투로 대답했다.
타닥. 타닥.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무 더미가 타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런데 관공, 밤중에 뭘 그리 태우시는 겁니까.”
이 상황에도 긴장감 없이 행동하는 인물은 역시 위연이었다.
그런데 관우의 옆에 가서 나무 더미를 슬쩍 본 위연의 눈이 커졌다.
“아니!”
당황해서 관우와 불길을 번갈아 쳐다보는 위연.
노숙이 뭔가 짐작한 듯 앞으로 나섰다. 노숙은 그대로 나무 더미에서 나무토막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예상대로였다. 노숙은 나무토막을 보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좌전을… 태우고 계셨습니까.”
“뭣이!”
“좌…좌전을?”
연왕부의 중신들은 그제야 경악하며 불길 속을 헤집었다.
수북이 쌓인 장작은 춘추좌씨전의 죽간이었다. 관우가 30년간 모아 온 고본과 주석본인지라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관우가 좌전을 태운다.
믿기 힘든 광경을 보자 모두의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일찍이 형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좌전에 쓰인 대로 살아야 한다고.”
관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좌전에서 길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좌전은 지금 내가 가려는 길을 보여주지 않는구나.”
관우는 몸에 걸친 전포를 벗었다.
마초에게 투항하며 선물로 받은 물건이었다. 녹색 비단에 황금색으로 용이 수놓아진 명품이었다.
관우는 좌전이 타는 불길 속으로 전포를 던져 넣었다.
“무에 일곱 가지 덕이 있지만, 그중 사사로운 원한을 위해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없으니. 이는 무사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화르륵.
마초가 선물한 비단 전포는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타들어갔다. 관우는 대신 낡은 전포를 몸에 걸쳤다. 마궁수로 있던 시절, 유비가 지어 준 전포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장비가 말했다.
“오래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 운장 형이 무사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겠다니.”
“협(俠)은 은원이 먼저다.”
30년간 이어 온 무인의 삶을 청산하고, 협객으로 돌아갈 것을 선언한 뒤.
펄럭.
관우는 낡은 전포 자락을 휘날리며 몸을 돌렸다.
무르익은 대추처럼 붉은 얼굴.
누에가 누운 듯 진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우리는 다음 달에 출진한다. 화하를 진동시켜, 대장군 마초를 전장으로 끌어낼 것이다.”
“존명!”
자리에 모인 이들이 일제히 관우를 향해 손을 모아 군례를 올렸다.
“내년에 복숭아꽃이 피면, 마초의 목을 형님의 영전에 바칠 것이다.”
관우는 그렇게 말하며 손으로 수염을 쓸어내렸다.
며칠 사이 수염의 흰 숱이 한층 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