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293화 (280/306)

293화. 제왕의 길 (2)

마초는 말없이 한참 동안 제갈량을 쏘아봤다.

제갈량은 마초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또한 적잖은 압박감을 느끼고 있겠지만, 사나운 눈매에서 조금도 힘이 빠지지 않았다.

“공명, 내가 자네를 깊이 아낀 건 자네도 알고 있을 걸세.”

“물론입니다.”

“그걸 알면서 그딴 소리를 하는가!”

마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주 큰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옆에서 듣고 있던 나관중의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노기가 서려 있었다.

정작 호통을 들은 제갈량은 담담했다.

“결국 제가 해야만 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대장군이 나아가야 할 길이니까요.”

“나는 천하를 위해 몇 번이고 목숨을 걸었네. 그런 내가 이제 와서 찬탈의 길로 갈 것 같은가?”

“그렇습니다.”

“뭐야?”

“대장군은 방금 ‘천하를’ 위해 몇 번이나 목숨을 걸었다고 하셨습니다. 한을 위해서도, 당금 천자를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래, 천하를 위해 그렇게 했지. 그게 찬탈과 무슨 관련이 있나?”

마초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 제갈량은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울림이 풍부한 목소리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대장군께서 이제까지 한 일을 돌이켜 보십시오. 전란이 끝나니 창고마다 곡식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역참제는 천하의 거리를 좁혀서 효율적인 행정이 가능하도록 만들었고, 국법을 제정하며 나라의 기강과 풍속이 바로 섰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인쇄술, 화폐, 면포, 차와 설탕, 의술… 수많은 기예와 문물이 도입되었지요.”

“그래. 나보다 나관중이 한 게 더 많은 것 같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균전제와 양세법입니다. 이로써 땅을 가진 백성들이 늘어나며 나라의 체질이 건강해졌습니다. 하지만 이는 대장군께서 수많은 호족들의 반발을 누르고 밀어붙인 일입니다.”

“그래서?”

“대장군이 안 계시면 균전제와 양세법을 이어나갈 수 없습니다. 대장군이 없는 조정에서, 저와 뜻을 같이하는 관리들 몇몇의 힘으로는 호족들의 압력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렇겠지.”

“당금 천자께서 친정을 하시려면 호족들의 손을 빌려야 할 터. 결국 균전제와 양세법은 유명무실해지고, 나라는 다시 예전의 그 혼란한 시기로 돌아갈 겁니다. 그 상태로 50년쯤은, 예, 우리가 죽을 때까지는 평화가 유지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다음에는? 50년 후의 젊은이들이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하게 될 겁니다.”

제갈량의 말은 오늘 갑자기 나온 말이 아니었다.

벌써 여러 번 논의되었던 말들이다. 나관중을 통해서 마초에게도 몇 번이나 전해졌었다.

제갈량은 쉬지 않고 말했다.

“50년 후의 젊은이들에게, 우리와 똑같은 세상을 물려주시겠습니까.”

마초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공명.”

“예, 대장군.”

“믿기 힘들겠지만 말이야. 내 삶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네.”

마초는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비극으로 점철된 첫 번째 삶. 죽음 직전의 회귀.

그리고 마휴의 죽음, 미오성의 맹세, 여포와의 대결. 조조와, 또 유비와 연합과 대립을 거듭하며 패권을 잡아 온 이야기.

“그것이 진짜 두 번째 삶인지, 아니면 그저 긴 꿈을 꾼 것인지 이제 나도 확실치 않아. 한 가지 확실한 건 내 삶은 나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천하를 위해 여러 번 몸을 던졌네. 내가 몸을 던져서 될 일이면 얼마든지 던지겠네. 하지만 제위에 오르는 건… 몸을 던진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두 번째 삶.

믿기 힘든 이야기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청하는 겁니다. 한 번 더 자신을 던져 주십시오.”

“나는 무부일세. 내가 더 이상 뭘 던질 수 있는가?”

“명예를 던져 주십시오.”

털썩.

제갈량이 마초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영웅이란 난세에 나타나는 것이니, 치세에는 영웅이 없습니다. 하지만 왕은 있지요.”

“공명.”

“대의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것. 그것은 영웅의 자질이며, 또한 왕의 자질이기도 합니다. 몸을 던져서 대의를 이루는 자에게는 영웅이라는 명예가 따릅니다. 하지만 더 큰 것을 이루려면, 그 명예조차 던져 버려야 합니다.”

마초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제갈량은 내쳐 말을 이었다.

“대장군. 천하 백성들을 위해 찬탈자라는 오명을 써 주십시오. 영웅이라는 명예 대신 역적이라는 불명예를 감수해 주십시오. 그렇게 진흙탕으로 떨어져서, 난세의 영웅이며, 치세의 군주가 되어 주십시오.”

“그걸 굳이 나에게…….”

“아시지 않습니까. 대장군이 아니면 왕이 될 인물이 없습니다. 또한 왕의 자리가 아니면, 대장군이 나아갈 곳도 없습니다.”

무거운 침묵.

마초는 창가로 걸어가서 창밖을 바라봤다.

‘언제부터일까.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사마의와 유비가 홍농에 있는 마초를 습격한 순간부터.

어쩌면 천자 유협이 의대조를 내린 순간부터.

어쩌면 조조를 꺾고 집권했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난세를 끝내겠다는 뜻을 세웠을 때부터일지도 모른다.

난세만 끝내고 사라진다는 마휴의 꿈은, 지나치게 순수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

마초는 자신도 모르게 마휴에게 물었다.

열아홉 살에 죽은 아우가 지금의 자신보다 더 높은 식견을 갖고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마초는 마휴에게 묻고 싶었다.

마초는 기억을 되살려 아우의 생전 모습을 떠올렸다.

부간, 이회와의 저녁 식사 자리.

마휴는 열띤 어조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할 수 있고 없고를 따지기 전에,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개혁을 이어 가려면.

가족을 지키려면.

한의 충신, 개국공신의 후예, 난세의 영웅.

그 모든 명예를 던져 버리고, 권력자의 길로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가. 알았다.”

펄럭.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던 마초는, 그대로 옷깃을 떨치고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는 제갈량에게 말했다.

“공명. 나는 아직도 정치를 잘 모르네.”

“대장군.”

“하지만 옥좌를 빼앗고, 그 자리에서 버티는 거라면 할 수 있지. 내가 옥좌에 앉아 있으면, 개혁을 이어가서 더 좋은 나라를 만들어 줄 사람이 필요하네.”

“제가 하겠습니다. 반드시 성공시킬 것입니다. 천 년간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그런 제국을 만들 것입니다.”

마초는 제갈량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것이 해야 하는 일이라면 피하지 않겠다. 찬탈자라는 오명을 쓰고… 천하를 더 좋은 곳으로 만들 것이다.”

척.

제갈량은 마초를 향해 두 손을 모았다.

“제갈량이 주공을 뵙습니다. 주공께서 성군이 되실 수 있도록… 몸을 굽혀 온 힘을 다하여, 죽은 후에야 그칠 것입니다.”

이제까지 주종의 맹세만은 하지 않았던 제갈량.

마초가 제위에 오를 뜻을 밝히자, 비로소 마초를 주군으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한 발짝 떨어져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관중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마초는 그런 나관중에게 다가가 웃으며 어깨를 툭 쳤다.

“뭐야. 왜 또 그렇게 울고 있어.”

“주공… 반드시 성군이 되실 겁니다. 제갈공명이, 그리고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모르는 척하지 말라고. 자네는 이렇게 될 줄 알았잖아.”

“그건 그렇지요.”

“뻔히 눈에 보이는군. 오호대장이나 가 선생, 순공달 같은 사람들하고는 이미 얘기가 끝났겠지.”

“그것도 그렇지요.”

“장안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장안.

관서대도독부의 마등을 말하는 것이다.

나관중은 심호흡을 한 후 말했다.

“태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모와 형제의 안위를 돌보지 말고, 뜻한 바대로 행하라’.”

마등은 항상 변함이 없었다.

지난 생에서 거병하려는 마초에게 했던 말 그대로였다.

“그런가. 알았네.”

마초는 시큰해지는 콧날을 누르고 제갈량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나관중을 보며 물었다.

“또 모아 놨지?”

“예? 예… 그야 뭐…….”

“하여튼, 쯧쯧.”

마초는 그렇게 혀를 차고 밖으로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마초의 저택에는 이미 나관중이 소집한 마가군의 중신들이 모여 있었다.

방덕, 서황, 장료, 감녕, 황충.

가후, 순유, 법정, 방통, 마균.

육손, 왕평, 장합, 곽준, 주환.

마대, 월길, 이감, 학소, 장익, 장억.

친 마가군 성향의 조정 관료들을 빼고, 마가군 직속의 군부 인사들만 해도 이 정도였다.

마초는 그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곧 연왕부의 관우가 남하할 것이다.”

관우가 과연 싸움을 걸어 올 것인가.

조정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마초는 확신할 수 있었다.

‘관우는 반드시 온다.’

연왕부는 천하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무장 세력이다. 이 결전에서 이기면 더 이상 전쟁을 치를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관우를 막기 위해 출진한다. 내가 직접 관우를 베고, 살아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낙양으로 돌아오면… 새로운 왕조를 열 것이다.”

마가군의 중신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마초는 자신이 나아갈 길을 분명히 선언했다.

자리에 모인 모두가 일제히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눈앞에 모았다.

“주공의 명을 받듭니다!”

마초는 두 손을 모아 그들에게 답례했다.

전쟁이 끝나고 살아 돌아온다면.

마초 자신은 황제가 되고, 이들은 개국공신이 될 것이다.

* * *

관중에서, 서량에서, 익주에서.

형주에서, 강동에서.

마가군의 핵심 전력들이 전부 낙양 팔관 안으로 모여들었다.

숫자는 정병만 20만에 달했다. 50만도 소집할 수 있었지만, 지나치게 숫자가 많아지면 군령의 하달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20만으로 조절한 것이다.

장수들은 마초가 동원할 수 있는 최정예들을 전부 동원했다.

그렇게 전쟁 준비를 하는 중, 마초는 단신으로 황궁에 찾아갔다.

“짐이 대장군을 기다리고 있었소.”

유협은 황궁의 연못에 배를 띄워놓고 있었다.

남에게 들릴 걱정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남의 눈과 귀를 피해 독대할 수 있는 곳이다. 마초는 손수 배를 저어 연못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폐하.”

“말씀하시오.”

“이야기는 들으셨을 줄 압니다. 신은 왕작이 필요합니다.”

“아랫사람들끼리 이야기가 된 걸로 알고 있소. 대장군을 양왕(凉王)에 봉하고, 관중과 서량을 봉토로 하겠소.”

“그 이후의 이야기도 짐작하실 줄 압니다.”

유협은 힘없이 웃음을 지었다.

“천하는 덕 있는 자의 것이니, 대장군이 제위에 오르겠다면 그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소. 대장군이 정하는 대로 짐이 따르면 되는 일이오. 짐은 두 번이나 대장군을 배신하고 끝내 실패했소. 그저 목숨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오.”

“폐하.”

마초는 가만히 유협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신에게 큰 은혜를 입은 자. 그러면서 자신을 배신한 자. 그래서 자신의 은인인 유비를 끌어들여 죽게 만든 자.

그리고, 폐주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평생 동안 저항해 온 자.

마초는 끝내 천자 유협을 미워할 수 없었다.

“신과… 저와 약조를 하나 해 주십시오.”

“무엇을 말이오?”

“전쟁이 끝나고 나면 저는 폐하께 선양을 받고 제위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제위에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장성한 아들들이 있으니, 그들 중 하나에게 제위를 넘기고 물러날 때가 오겠지요. 그때가 되면… 그때는 흉금을 터놓고 술잔을 나누시지요.”

유협은 마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짐도… 나도 이만하면 돌아가신 형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 같소. 그러니 더 이상 대장군의 제업을 방해하지 않겠소. 다만 나 또한 청이 하나 있소이다.”

“무엇입니까?”

“저승에서 형님을 떳떳하게 뵐 수 있도록 해 주시오. 형님을 다시 뵈면, 아우는 폐주가 되는 대신 태평성대를 이루었노라고 말할 것이오. 그러니 대장군. 꼭 성군이 되어 주시오.”

마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제위로 나아가게 된 마초.

유변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폐주의 길을 걷게 된 유협.

배 위의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훗날, 세상 사람들은 이날의 독대를 두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꾸며냈다. 마초가 천자를 겁박했다느니, 천자가 마초에게 빌었다느니, 마초와 천자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다느니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중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그저, 최선을 다 했지만 형제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서로를 두고 안타까워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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