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제왕의 길 (1)
홍농사변.
서량 방문 후 돌아오는 마초를, 연왕 유비와 금군중랑장 사마의가 습격한 사건이다.
마초 대신 홍농사변의 뒤처리를 한 인물은 은퇴한 가후였다. 태위가 되어 조정에 복귀한 가후는 마가군의 인사들을 철저히 함구시켰다. 그리고 조정의 모든 일들을 자신이 진두지휘했다. 조정은 물론 저잣거리에서도 가후가 천자냐는 불만이 터져 나올 정도였다.
“설마 대장군까지 함구시킬 줄은 몰랐습니다. 가 태위께서 하도 서슬 퍼렇게 나오시니 대장군도 저택에서 나오지 못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황궁의 한 별실.
가후를 향해 뼈 있는 말을 던지는 인물은 사공 순유였다.
“연왕의 시신을 탁군으로 보내며 막대한 금은보화를 함께 보낸 것도 모자라서, 연왕의 사당을 낙양 일대에만 서른 곳이나 짓는다니요. 덕분에 사공부는 아주 죽을 맛입니다.”
순유의 말은 엄살이 아니었다.
사공부의 예산과 인력은 전부 유비의 장례와 추모사업에 투입되어 있었다. 가후는 홍농사변이 철저히 사마의의 독단적 행동이라고 조작하고, 유비의 죽음도 사마의의 소행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가후는 순유를 향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하며 연왕의 죽음을 추모하는 이유를, 순 사공께서는 알고 계실 것이오.”
“가 태위. 그런다고 전쟁을 막기는 어렵습니다. 연왕부에서는 연왕이 대장군과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연왕이 유주에 십만대군을 키워 놓았고, 북방의 선비와 백성들은 연왕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합니다. 유주가… 어쩌면 하북 전체가 움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이렇게 해야지요. 하북의 고을 몇 개라도 우리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어찌 의미가 없겠소?”
순유의 표정이 굳었다.
“뻔히 드러날 거짓말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가 태위는 혼자 오명을 뒤집어쓸 것입니다. 천하 사람들을 속였다고 말입니다.”
“누군가 오명을 뒤집어써야 한다면, 나 이상 적합한 사람이 없지 않겠소.”
가후와 순유.
두 사람의 관계는 실로 미묘하다.
본래 서량의 한미한 집안 출신으로, 동탁의 부하였던 가후.
명문가 출신의 사대부로, 동탁을 암살하려 했던 순유.
순유는 오랜 악연인 가후를 바라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순모는 예전부터 가 태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군요.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후세의 역사가는 가 태위의 열전에…….”
“영웅의 시대에 자기 자신의 살길만을 좇았던 간신이라고 적겠지요. 그 또한 사실 아니겠소.”
가후는 웃으며 순유의 말을 받은 후 되물었다.
“순 사공. 만약 대장군께서 결단을 내리신다면… 순가는 어느 편에 설 생각이시오?”
“결단이라 하시면?”
“권신,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갈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마초가 더 이상 나아갈 자리라면 무엇이 있을까.
가후와 순유조차 섣불리 입에 올리지 못하는 그 자리가 있을 뿐이다.
순유는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영천 순가는 한의 은혜를 입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특히 숙부님은 한의 충신으로 죽을 인물입니다.”
순유의 숙부란 순욱을 말한다. 가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요. 이해하오. 순 사공께서도 순령군과 같은 생각이시겠군요.”
“저는 찬탈에 가담했다는 오명을 쓰지 않겠습니다.”
오명을 쓰지 않겠다.
순유의 말을 곱씹던 가후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다면, 누군가 오명을 대신 써 준다면?”
“대장군이 집권한 후, 천하에 전란이 끊어지고 백성의 삶이 윤택해졌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순모 대신 오명을 뒤집어써 준다면…마땅히 천하를 위해 사대부가 할 일을 해야지요.”
순유와 가후 사이에 한참 동안 정적이 흐른 뒤.
마침내 가후가 입을 열었다.
“내 나이 어느덧 칠십이 넘었소. 이 전쟁이 끝나면 조용히 죽음을 기다릴 것이오. 그때가 되면…순 사공께서 대장군을 잘 도와주시오.”
순유는 긴 한숨을 쉰 후, 가후에게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했다. 긍정의 표시였다.
* * *
낙양으로 돌아온 마초는 한동안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천자 유협이 다시 한번 자신을 제거하려고 했다. 그 와중에 지난 생의 은인이었던 유비가 죽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마초에게도 감당하기 힘든 충격이었다.
유비가 죽었으니 곧 연왕부와의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조정은 어떻게든 유비의 죽음에 얽힌 정치적 파장을 최대한 덜어 보고자 분주했고, 대장군부는 닥쳐올 전쟁을 준비하느라 부산했다.
마초는 조정에도, 대장군부에도 등청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원후 나관중이 집으로 찾아왔다.
“매일 물고기들과 놀고 계신다더니, 정말이군요.”
마초는 후원의 연못가에 호상을 펴 놓고 앉았다. 그리고 하루 종일 연못 안에서 잉어들이 노는 것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물고기에는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그야 내 고향에는 이렇게 팔자 좋은 잉어들이 없었으니까. 위수는 죄다 흙탕물이라 물고기가 보이지도 않거든. 자, 들어가세.”
마초는 웃으며 나관중과 함께 별실로 들었다.
별실은 큰 탁상과 푹신한 의자가 놓인 원나라 양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서량을 통해 들어온 서역의 보물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는 방이었다.
나관중은 투구 하나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건 뭡니까?”
“대진국 투구. 정확히는 대진국 이전에 있던 나라의 투구라고 하던데, 이름이 뭐더라… 희랍? 뭐 그런 이름이었는데.”
나관중은 얼굴을 온통 가리는 그리스의 투구를 보고 신기한 듯 여기저기 돌려봤다. 마초 정도로 얼굴이 작은 사람이 아니면 쓰기도 힘들 것 같았다.
“저 갑옷은 또 뭡니까? 꼭 쇠사슬로 짠 것 같은데요.”
“저건 안식국(安息國, 파르티아)에서 쓰는 갑옷이라더군. 보면 보병은 대진국, 기병은 안식국의 무구 중에서 참고할 만한 게 많아.”
무사로서뿐만 아니라 병법가로서도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마초다. 최근에는 로마와 파르티아의 군제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나관중은 마초가 로마와 파르티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한참 동안 들은 후 말했다.
“주공께서는 군제 개혁을 준비하고 계시는군요.”
“딱히 지금에 와서 새로 준비한다기보다도, 이제까지 쭉 해 왔던 것들이지. 예를 들면 대진국 출신 갈서의 말을 듣고 부대마다 의원을 배치하지 않았나? 모두가 돈 낭비라고 했지만, 10년이 넘게 밀어붙이니까 결국 효과가 나타났잖아. 지난 양번 전투에서, 그리고 강동 정벌에서도…….”
병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마초는 즐거워 보였다.
나관중은 왠지 콧날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그저 무장일 뿐이다. 이 사내는…그저 뛰어난 무장일 뿐이다. 지난 생에는 사람의 그릇이 재주를 다 담지 못해서 비극적인 삶을 살았고, 이번 생에는 사람의 그릇이 커져서 영웅이 되었다. 그저 그것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난세를 끝낸 영웅 마초가 이런 처지가 된 걸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나관중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잡념을 털어 버렸다.
오늘은 마초에게 꼭 할 얘기가 있는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뭘 어떻게 해. 싸워야지. 연왕이 죽었으니 관우와 장비가 가만히 있겠나. 곧 쳐들어오겠지.”
마초의 대답은 태평스러웠다.
연왕부에 십만대군이 있다면, 원정에 동원할 수 있는 것은 그 절반인 5만가량. 반면 마초에게는 50만을 동원할 능력이 있다. 마초는 유주를 제외한 천하 12주를 다스리는 몸인 것이다. 사실 질 수 없는 싸움이다.
“좀 기다려 봐. 아직 오호대장도 다 모이지 않았잖아. 나도 그때까지만 좀 쉬자고.”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
천하 13주가 전부 통일된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마초는 가만히 나관중을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그건 나도 모르지. 그 왜, 자네가 자주 얘기해 주던 당나라의 권신 있지?”
“곽자의 말입니까?”
“그래, 곽자의. 나도 그 곽자의처럼 되고자 했네. 망해 가는 나라를 곽자의가 살렸다지 않았나. 그런데 이제 그것도 어려워졌군.”
곽자의는 수많은 전쟁에서 외적을 무찌르고, 당나라의 수명을 150년 연장시킨 인물이다. 그는 신하의 몸으로 최고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영웅 중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것은 당나라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천자에게 두 번이나 제거당할 뻔한 마초와는 결이 다르다.
“이것 참, 명예롭게 은퇴하는 게 이리도 어렵나. 나 정도면 곽자의보다 못할 것도 없지 않아?”
마초는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나관중은 웃을 수 없었다.
‘주공에게는 남은 길이 없다. 만약 전쟁이 끝나서 연왕부가 없어진다면, 주공이 서량에 가서 변경의 제후로 살아갈 명분도 없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서량에 군부의 최고 실력자가 있는 상황을 조정이 두고 볼 리 없다.’
유비가 없으면 서량으로 낙향한 마초를 아무도 견제하지 못한다. 유비의 죽음과 함께, 마초가 낙향해서 조용히 여생을 보낼 길도 막혀 버렸다.
그렇다면 마초에게 남은 길은 두 가지.
“제위에 오르거나, 또는 죽는 것이지요. 주공,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나관중은 아주 직설적으로 물었다.
마초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하하, 그걸 내가 어찌 알겠나. 그건 관운장에게 물어봐야지.”
“관운장과 전장에서 겨루실 셈입니까.”
“그의 목숨을 남에게 거두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내 손으로 하겠네.”
관우를 직접 벤다.
터무니없는 말이다. 하지만 마초라면 진짜 가능할 수도 있다.
나관중은 가만히 마초의 표정을 살피다 물었다.
“그러면 주공은 살아 돌아오실 수 있습니까.”
“그건 모르지. 그러니까 관운장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겠나.”
마초는 모호하게 대답했다.
사실이 그랬다. 관우를 벨 자신은 있다. 그러나 자신이 베이지 않을 자신은 없다.
신중하게 겨루면 승패를 가리기 어렵고, 목숨을 내놓고 겨루면 동귀어진하게 되는, 그런 상대였다.
“전쟁터에서 죽으시려는 겁니까.”
“살지도 모르잖아? 관운장도 이제 늙었다고.”
마초는 계속 우습지 않은 농담을 던졌다.
나관중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죽는 것 말고는 주공이 영웅으로 남아 있을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관우의 손에 죽는다면, 마초는 난세를 끝낸 한의 영웅으로 그 이름이 천 년이 넘도록 전해질 것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살아 돌아온다면, 그때는 찬탈의 길을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만약 전쟁에서 패한다면?
“그때는 모든 것이 끝이지. 그러니까 이기긴 이겨야 하지 않겠나.”
쓸쓸하게 웃는 마초.
나관중은 그런 마초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주공.”
“왜.”
“미오성에서 제가 드렸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그래. 나보고 영웅이 되라고 했었지. 그래서 이제까지 영웅으로 살아왔지 않나. 무려 25년이나.”
“이제… 이제, 다른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무슨 소린가?”
“저는 주공께서 영웅이 되라 말씀드렸고, 주공께서는 그대로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제 입으로는 주공께 다른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이 자리로 들라 해도 되겠습니까.”
마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초는 턱을 괸 채 잠시 나관중을 바라보다 말했다.
“들라 이르라. 단,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면 바로 파직할 것이다. 설령 그가 누구라 해도.”
나관중과 뜻을 같이하는 자.
그래서 오늘, 영웅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라고 간언하려는 자.
마초는 그게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었다.
잠시 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 하나가 들어왔다.
30대 후반의 선비였다. 키가 무척 크고 체격이 건장한, 흰 얼굴의 미남자였다. 검소한 차림이었지만, 손에 든 깃털부채는 상당히 귀한 물건으로 보였다.
마초가 예상하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중서령 제갈량이 대장군을 뵙습니다.”
마초의 눈빛이 변했다.
마초는 꿰뚫어 보는 듯한 눈으로 나관중과 제갈량을 번갈아 훑었다. 그리고 턱짓으로 자리를 권한 뒤 물었다.
“공명은 내게 맹자를 강론하러 왔는가?”
<맹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의 주왕을 몰아내고 천자가 된 일이 있다. 누군가 맹자에게 ‘무왕이 신하 된 몸으로 임금인 주왕을 해한 것이 도리에 맞느냐’고 묻자, 맹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仁)을 해치는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한다. 잔적한 이는 왕이 아닌 필부일 뿐이니, 무왕이 주라는 필부를 주살한 일은 있어도 임금을 해한 일은 없다.
맹자의 이 말은, 왕의 자리에 더 적합한 인물이 있으면 왕조를 교체할 수 있다는 역성혁명의 논리로 사용되어 왔다.
맹자를 강론하러 왔느냐는 말은 곧 역성혁명을 권하러 왔느냐는 말인 것이다.
“아닙니다.”
그런데 제갈량의 말이 예상과 달랐다. 마초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그럼 무슨 말을 하러 왔는가?”
“찬탈을 권하러 왔습니다.”
찬탈. 왕의 자리를 강제로 빼앗는 일.
제갈량의 입에서 찬탈이란 단어가 나오자, 마초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나와 농을 할 셈인가.”
“농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대장군. 저는 옛 성인들도 역성혁명을 하라 하였다거나, 천명이 이미 대장군에게 돌아갔다는 따위의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한 점의 망설임도 없는 얼굴로 제갈량이 마초를 향해 말했다.
“당금 천자의 제위를 빼앗고, 스스로 그 자리에 앉으십시오. 그것이 대장군이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