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결심하는 영웅
217년 겨울, 사례 하동군.
남흉노의 선우, 표가 군사를 일으켜 하동을 공격했다.
오원 전투에서 대패하고 막북으로 쫓겨난 표는 어디선가 1만이나 되는 무리를 다시 모아서 쳐들어 왔다. 오랫동안 평화를 누린 하동에서 흉노에 의한 약탈과 살육이 일어났다.
중랑장 사마의가 막으러 나섰다. 사마의는 낙양을 나선 지 스무 날도 되지 않아, 흉노의 선봉대를 대파하고 대장을 포로로 잡았다.
“네가 우녹려왕이냐?”
사마의가 묻자 흉노의 우녹려왕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바싹 깎은 머리에 핏줄이 솟는 게 보일 정도였다.
“빌어먹을 한인 놈들. 우리 흉노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 나를 죽인다고 해서 우리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귀부한 흉노 하나가 옆에서 부산하게 말을 통역했다. 그러나 사마의는 몇 가지 단어로 대강의 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너희들 중 재미있는 녀석들이 있더군. 편두를 한 놈들, 코가 높고 수염이 많은 놈들, 그리고 노란 머리에 푸른 눈을 한 놈들. 서역에서 데려온 놈들이냐?”
“알아챘구나. 그래도 소용없다. 이미 선우께서 초원의 옛 형제들과 맹약을 맺으셨다. 내년이면 먼 서쪽에 있던 형제들이 와서 이 땅을 짓밟을 것이다.”
초원의 옛 형제.
그것은 북흉노를 말한다. 중국으로 남하한 남흉노 대신 몽골 고원에 남았던 이들이다.
지금으로부터 130년 전, 한은 남흉노와 함께 북흉노를 쳐서 무너뜨렸다. 이후로 몽골 고원은 선비족들이 차지했고, 살아남은 북흉노들은 먼 서역으로 도망쳤다.
사마의는 우녹려왕을 보며 씩 웃었다.
“북흉노를 다시 불러왔다고? 이거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사마의가 손짓을 하자, 그를 수행하는 두 장수가 우녹려왕의 몸을 묶은 밧줄을 풀었다.
자유의 몸이 된 우녹려왕은 경계하는 눈빛을 풀지 않은 채 사마의에게 물었다.
“무슨 짓이냐?”
“너희 선우에게 전해라. 이제 곧 복수를 할 수 있을 테니, 하동에서 물러나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라고.”
“뭐라?”
“아무래도 너희 선우와 나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 같군.”
사마의는 빙글빙글 웃으며 우녹려왕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듣는 우녹려왕의 눈이 커지고 입이 벌어졌다. 놀란 그를 향해 사마의가 농담을 던졌다.
“뭘 이 정도로 놀라나? 묵돌선우의 후예라는 자가 담력이 영 부족하군.”
“아니, 하지만…….”
“왜, 복수하고 싶은 것 아니었나?”
잠시 고민하던 우녹려왕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선우께 틀림없이 그렇게 전하겠다.”
“좋아. 일이 잘되면 다시 보자고.”
우녹려왕이 물러난 뒤.
사마의를 수행하던 두 장수 중 하나가 말을 걸었다. 마른 체격에 눈빛이 날카로운 청년이었다.
“어르신. 금성은 황하의 치수 문제로 완공이 늦춰지고 있지 않습니까? 앞으로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관구검, 자는 중공.
쓸 만한 인재들을 마초가 싹쓸이한 조정에서, 사마의가 힘들게 찾아낸 인재였다. 사마의는 관구검의 잔혹한 성격과 목표에 대한 집착이 썩 마음에 들었다.
“중공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금성은 내년이면 완공될 것이다.”
“그 말씀은…….”
“얼마 전 중서령 제갈량이 금성에 갔다. 그가 간 이상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제갈량은 모두가 인정하는 당대 최고의 능신이다.
그런데 사마의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의 재능은 고작 당대 최고 정도가 아니다. 이대로라면 곧 재상이 될 것이고, 천하를 번영하게 한 인물로 역사에 남겠지.’
그렇다면, 사마의 자신은?
“나는 그에게 미치지 못하지. 그러니까… 신하로서는 말이야.”
관구검은 그런 사마의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르신께서는, 내년에 반드시 금성이 완공될 것이라 보시는군요.”
“그래. 대장군이 금성에 엄청나게 공을 들였지. 그러니 완공되면 꼭 한 번 금성에 찾아가지 않겠는가?”
사마의는 그렇게 말하며 밝게 웃었다. 수염만 없었다면 여장을 해도 티가 나지 않을 만큼 선이 고운 외모였다.
* * *
218년.
예정된 은퇴를 1년 앞두고 있는 마초에게, 서량에서 두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었다.
“좋은 소식은, 북지군에 새로 짓고 있는 금성이 완공되었다고 하오.”
“잘 됐군요. 역시 제갈 선생을 보낸 게 효과가 있었나 보죠?”
양하원이 밝은 말투로 되묻자, 마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가지 해결되지 않고 있던 과제들이 있었는데, 제갈공명이 가서 단숨에 해결했다는군. 황하의 치수도 깔끔하게 끝났고, 화정(火井, 천연가스전)의 사용법을 정립해서 소금 광산도 개발했다고 하오.”
“하여튼 제갈 선생은 참 대단해요. 글 읽는 선비가 장인들의 일에 밝으니까 천하를 위해 참 큰일을 하네요.”
“어쩌면 공명은 장인의 일에 밝은 선비가 아니라, 글을 읽은 장인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소. 하여튼 공명은 결국 나를 가장 크게 도와주는군. 입으로는 내 휘하가 아니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말이야.”
“밀고 당길 줄 아는 사내가 좋잖아요. 그리고 나쁜 소식은요?”
나쁜 소식을 말할 때가 되자 마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버지가 병이 들어 편찮으시다 하오. 장안에 다녀와야겠소.”
마등의 나이도 어느덧 60대 후반이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에는 가벼운 병치레도 위험한 나이다.
마초는 수년 만에 장안의 관서대도독부에 다녀오기로 했다. 병든 아버지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북지에 건설 중인 금성을 둘러보고 올 생각이었다.
아내와 자식들, 왕찬과 조운을 비롯한 친인척들 몇몇, 그리고 최측근 일부만이 마초를 수행하기로 했다.
* * *
의외로 장안의 일은 빨리 끝났다.
마초가 장안에 닿았을 때, 마등은 이미 쾌차한 다음이었다.
“편찮으시다면서요?”
“그랬지. 한 달쯤 누워 있었나.”
“진짜 괜찮으신 겁니까?”
“지금 죽으면 너무 억울하지 않겠냐. 부귀영화도 누려야 되고, 사냥도 다녀야 되는데.”
그렇게 너스레를 떠는 마등은 아직도 안색이 좋고 힘이 있었다.
어쩌면 발달한 의술 탓인지도 모른다. 장안에는 마초의 후원하에 장중경이 의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이번에도 장중경이 배출한 수많은 의원들, 그리고 장중경 본인이 마등을 진료했다.
“하여튼 다행입니다. 저는 또 큰일이 난 줄 알았습니다.”
“10년은 더 살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이제 금성에 갈 예정이라고?”
“예. 금성이 완공되었으니 둘러보고 오려 합니다. 이제 제가 조정에서 할 일이 마무리되어 갑니다. 앞으로는 금성에서 북방을 지키며 삶을 보낼 생각입니다.”
마등은 마초를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맹기, 권력을 내려놓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하하, 맞습니다.”
“이 아비에게도 들리는 말이 있다. 균전제와 양세법을 도입한 이후로 귀족들의 반발이 보통이 아니라고 들었다.”
“그야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는 천하에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균전제와 양세법을 도입하니 나라의 수입이 엄청나게 늘었고, 북방의 방어도 튼튼해졌습니다. 이 정책은 제가 은퇴해도 되돌릴 수 없을 겁니다.”
“정책이 문제가 아니다. 너 자신을 돌봐야 한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상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거라. 네 입장에서는 은퇴겠지만, 성상의 입장에서는 10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군웅이 서량에 새로 생기는 것이다.”
“아버지. 그 말씀은…….”
“네가 건재한 동안은 괜찮겠지. 하지만 훗날 네가 나이를 먹어 전장에 나서기 어렵게 되면 어찌하겠느냐?”
마등과 마초 사이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금성으로 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자식들의 대에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더 확실히 해둬야 한다는 말이다. 자식의 대에서는 군웅의 자리를 포기할지, 아니면… 왕작을 받아 대대로 서량을 다스리는 것을 공인받을지.”
군웅의 삶을 당대에 끝낼 것인가.
아니면 영지를 가진 왕이 될 것인가.
마초는 복잡한 심정을 뒤로 한 채 금성으로 향했다.
* * *
마초가 서량으로 떠난 사이, 낙양에 도착한 인물이 있었다.
천자 유협은 변복을 하고 시내의 기루에서 그 인물을 만나고 있었다. 옆에는 금군중랑장 사마의가 배석해 있었다.
“…하여 금군을 총괄하는 위장군(衛將軍)의 직을 연왕이 맡아서, 금군 전체의 총책임자가 되어 줬으면 하오. 연왕께서 부디 짐의 뜻을 저버리지 않으시길 바라오.”
연왕 유비.
어느덧 나이가 육십에 가까워진 장년의 사내다.
하지만 아직도 용모는 단정하고, 표정과 몸짓에도 청년처럼 힘이 넘쳤다.
유비는 유협과 사마의를 흘긋 돌아본 뒤 말했다.
“조칙이 내려졌으니 신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요. 대한의 위장군으로 소임을 다할 것입니다.”
유비가 말하자 유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사마의가 의뭉스러운 웃음을 띠며 말했다.
“왕야. 오늘 폐하께서 왕야께 밀조를 하나 내리실 예정입니다.”
“밀조라.”
사마의는 유비에게 옥새가 찍힌 문서를 하나 내밀었다.
가만히 문서를 읽는 유비의 눈이 커졌다.
“대장군 마초를… 제거한다?”
“이미 흉노와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지금 서량에 가 있는 대장군이 돌아올 때, 흉노의 습격이 있을 예정입니다. 우리 금군이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방관하기만 하면 됩니다.”
마초를 제거하려는 계획.
한참 동안 밀지를 쳐다보던 유비가 입을 열었다.
“신이 보기에 좀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유협과 사마의의 시선이 유비에게 집중되었다.
“균전제와 양세법으로 이 나라는 더 좋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북방 개척은 매년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있으나, 균전제를 위한 명분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지요. 신이 보기에, 대장군의 개혁은 광무제 이래 계속 이어진 한의 병폐를 치유할 기회입니다.”
유협은 말이 없었다. 대신 사마의가 나서서 유비를 향해 말했다.
“왕야. 그것은…….”
“네놈은 닥쳐라. 내가 폐하께 묻는 게 보이지 않느냐.”
황궁에서 자란 유협, 그리고 명문가 출신의 사마의.
두 사람은 따져 묻는 유비를 보며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비에게는 귀하게 자란 이들이 불편해하는, 저잣거리 사람 특유의 기세가 있었다.
“그런데 왜 마초를 제거해야 합니까?”
유협은 한참 동안 답변을 생각했다. 그리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연왕께서는 잘 모르실 것이오. 균전제와 양세법으로 인해 한의 사족들은 둘로 갈라졌소. 조정에 대장군이 없다면 짐에게는 균전제와 양세법을 계속 유지할 힘이 없소.”
“대장군의 지지가 있으면 되지 않습니까?”
“천자가 서량에서 10만 대군을 거느린 군벌을 믿고 정치를 하면, 그를 누가 천자로 여기겠소?”
“폐하.”
“짐도 대장군의 충의를 의심하지 않소. 짐과 대장군이 살아 있는 한 괜찮을 것이오. 하지만, 그다음에는? 대장군의 아들이 그것으로 만족하겠는가?”
마초의 장남, 마명은 뛰어난 무용에 더해 비상한 두뇌까지 갖추고 있었다.
반면 유협의 장남, 황자 유경은 심약한 소년이었다.
두 사람의 사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짐도 이 옥좌에는 미련이 없소. 하지만 이대로 가면 한의 사직이 끊어지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되는 것이오.”
유비는 유협의 눈동자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자식의 대에서 찬탈을 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은 진짜다. 그리고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이걸 기회로 여기고 있군.’
천자 유협이 직접 집권하려면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필요하다.
균전제와 양세법을 폐지한다면 마초의 개혁에 불만을 가진 대호족들이 한순간에 유협을 지지하게 될 것이다.
유협의 속내를 읽자, 유비는 더욱 깊은 고민에 빠졌다.
‘여기서 내가 천자의 편을 들면… 대장군이 기껏 바꿔 놓은 나라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겠군. 내가 대장군의 편에 서면… 그때는 한의 사직이 끝나겠지.’
유비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결심이 끝나자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좋습니다. 신은 목숨을 걸고 한의 사직을 지킬 것입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이런 밀지 대신, 정식으로 조칙을 내리십시오. 신은 대장군 마초의 맹우입니다. 사사롭게는 벗을 배신하는 것이니, 그만큼의 명분을 신에게 내려 주십시오.”
“으음…….”
유협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유비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비는 유협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기루를 나왔다. 바깥에서 노숙이 기다리고 있었다.
노숙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이런 상황이 올 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왕야. 그렇다면 관공이나 장 장군을 불러들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됐네. 운장이 맡고 있는 요동의 일도 급하고, 익덕이 맡고 있는 오환의 일도 급하지 않나.”
“하오나…….”
“이는 전쟁이 아닐세. 그저 암살일 뿐이지. 섣불리 아우들이 움직이면 오히려 경계를 살 걸세. 만약의 경우에는… 색이가 있지 않은가.”
유비를 수행해서 온 인물들 중에는 관우의 서자 관색이 있었다. 이미 관우, 장비와 대등한 무위를 갖고 있는 청년이었다.
노숙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천하가 거세게 요동치겠군요.”
“그래. 만약 우리가 실패한다면, 마초에 의해 한의 사직이 바뀌겠지. 우리가 성공한다면…….”
성공한다면, 그래서 천자 유협이 마초를 제거하고, 마초의 개혁을 폐기하고, 호족들의 지지를 얻어 실권을 가진 천자가 된다면.
“그때는 우리가 한을 다시 세운다.”
유비는 한의 사직도 지키고 마초가 바꿔 놓은 개혁도 지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협의 옥좌까지 지켜 줄 생각은 없었다. 유비 자신 또한 고조의 피를 이은 황족인 것이다.
유비의 속내를 눈치챈 노숙은 천자를 대하는 예법으로 유비의 앞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