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젊은 사자 (2)
병주 오원군.
만리장성을 지나서 한참 북쪽으로 가야 나오는 곳이다.
이곳은 한인들이 개척도시 몇 개를 건설해 놓았을 뿐, 본래 북방 유목민들의 삶의 터전이다.
현재 이곳에서는 한과 흉노의 군사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퍽!
“컥…….”
흉노의 화살이 가슴에 박힌 한인 병사 하나가 폐에서 공기가 빠지는 소리와 함께 절명했다. 화살을 쏜 흉노 병사는 화살을 뽑기 위해 말을 타고 다가왔다.
퍽!
그런 그를 기다리는 것은 한인 병사의 대도였다. 큼지막한 칼날에 옆구리가 반이나 잘려 나간 흉노 병사는 피를 쏟으며 말에서 떨어졌다.
평소라면 싸늘했을 가을 초원이다. 오늘은 양측 도합 일만여 명의 군사들이 만들어 내는 열기로 자못 뜨거웠다.
한인 말을 잘하는 흉노 병사 하나가 소리쳤다.
“빌어먹을 한인 놈들, 감히 맹약을 깨고 우리를 공격해? 하늘이 두렵지 않느냐!”
제법 기골이 장대한 병사였다. 작달막한 말 위에서 큼지막한 편곤을 휘두르는데 그 기세가 강맹하여 아무도 근처에 가지 못했다.
결국 보다 못한 한인 지휘관이 앞으로 나섰다.
“사실과 다른 말을 하는 놈이군. 먼저 맹약을 깬 것은 좌현왕이다.”
“닥쳐라! 너희들이 좌현왕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이제 우리 선우까지 해하려 하는 걸 모를 줄 아느냐!”
“대장군께서 한인 고을에 대한 약탈을 금지한 것을 잊었느냐.”
“우리는 대장군의 영역을 약탈하지 않는다! 네놈이 우리에게 누명을 씌운 것 아니더냐?”
“누명이라.”
한인 지휘관, 마명은 흉노 병사를 보며 씩 웃었다.
요기(妖氣)까지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선이 가늘고 잘생긴 얼굴과 푸른 눈동자가 아버지 마초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그런 헛소리를 늘어놓고 살기를 바라지는 않겠지.”
마명은 말을 몰아 흉노 병사에게 달려 들어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는 동안 마명의 몸은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 뜀박질보다 승마를 먼저 배운다는 흉노 기병들도 놀랄 만한 기마술이었다.
“제기랄, 이놈!”
흉노 병사가 편곤을 치켜들었다.
마명의 동작은 우아했다. 왼손에 들고 있는 긴 마상창, 금마삭을 천천히 들어 흉노 병사를 겨눴다. 그리고 거리가 좁혀지자 번개같이 찔러 넣었다. 목표는 흉노 병사가 들고 있는 편곤이었다.
쩡!
금마삭과 편곤이 충돌했다.
흉노 병사는 이를 악물고 자세를 수습하려 했다. 그러는 동안 마명은 물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허리춤의 5척 장도를 뽑아 들어 오른손에 들었다.
쉬익!
마명의 장도가 번뜩이자 흉노 병사의 팔이 잘려 허공으로 날았다.
왼손의 창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봉하고, 오른손의 장도로 치명상을 입히는 기술.
마명의 뒤에 있는 금철기 중 몇몇이 탄성을 질렀다. 오랫동안 마초를 따른 고참병들이었다.
“대장군의 절초다!”
“꼭 젊은 시절의 대장군 같지 않은가?”
흉노 병사는 어지간한 강골인지 팔이 잘리고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마명을 노려보는 그의 시야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5척 장도의 칼날이었다.
텅!
경쾌한 소리와 함께 흉노 병사의 머리가 잘렸다. 마명의 칼날은 투구로 가려지지 않는 입과 코 사이를 정확히 베고 지나갔다.
“금철기!”
흉노 병사를 벤 마명이 외치자, 마명의 뒤에 따라붙은 금철기들이 일제히 창을 내려 정면을 겨눴다.
“돌격!”
“우와아아!”
신호가 떨어지자 금철기는 그대로 달려 흉노 기병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이미 승패가 갈린 전투다. 마명이 이끄는 금철기는 전투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퍽! 퍽! 퍽! 퍽!
“으아아악!”
흉노 기병들은 저항하지도 못하고 금마삭이 꽂힌 채 말에서 떨어졌다. 작은 말을 탄 흉노 기병들은 금철기가 마갑까지 입은 거대한 군마로 밀어붙이자 당할 재간이 없었다.
멀리서 전투를 지켜보던 흉노 선우, 표는 이를 갈았다.
“우리는 선대부터 이어진 마가군과의 맹약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이 필요로 하면 자오곡을 넘어가 한중에서도 싸웠다. 여포와 맞서느라 수많은 형제들이 피를 흘리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 우리에게 이럴 수 있는가!”
마명과 금철기를 지켜보던 표는 이내 말머리를 돌렸다.
“받은 것은 반드시 돌려주는 것이 초원의 법이다. 언젠가 오늘의 빚을 갚을 날이 있으리라.”
오원 전투.
공식적으로는 흉노 좌현왕이 맹약을 깨고 한인 고을을 약탈하며 벌어졌다고 알려진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흉노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편장군 마명은 3천 군사로 1만 흉노군을 깨뜨리며 천하에 이름을 떨쳤다.
* * *
황궁.
마초는 천자 유협을 알현하고 있었다.
“북방에서 큰 싸움이 있었다고 들었소. 대장군의 자제가 흉노를 크게 물리쳤다 하더군.”
유협이 말하자 마초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는 공이 아니며, 신의 아들이 아직 미숙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유목민과 분쟁이 있으면 작은 싸움에서 대승을 거둬 기를 꺾으면 됩니다. 이렇게 전면전을 벌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여 신이 크게 꾸짖었습니다.”
마명은 흉노와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말에 조리가 있었다.
하지만 마초는 뭔가 석연치 않았다.
‘표 선우는 오랜 우군이다. 그런 자가 나를 적대했다고?’
최근 십 년간 마초와 표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았던 건 사실이다. 북방의 모든 지역이 마초의 관할이었으니, 초원에 한파가 닥쳐도 흉노는 약탈할 곳이 없었다. 마초는 그런 흉노에게 나름대로 넉넉하게 식량을 지원해 줬지만, 흉노 입장에서는 모자란다고 느낄 만했다.
하지만 흉노는 그러면서도 마초에게 적대하지 않았다. 마초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유협의 생각은 달랐다.
“흉노는 고조 이래 사백 년의 적이오. 표 선우는 근황병에 참여한 인물이니 짐에게도 인간적인 안타까움은 있지만, 이 기회에 흉노를 꺾어 북방의 위협을 해소하는 건 어떻겠소?”
“폐하. 초원이 있는 한 유목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흉노를 멸망시킨다면, 흉노를 이루던 부족들은 선비족이나 강족으로 이름을 바꿔 계속 초원에서 살아가겠지요.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의 북쪽 변경을 노릴 것입니다.”
“그런가. 알았소. 대장군의 뜻대로 하시오.”
유협은 마초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길게 내세우지 않았다.
실권을 가진 것은 마초다. 군무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얼마 전, 마초가 곧 권좌에서 내려올 것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강동의 손익이 조정에 복속했습니다. 이제 천하에 조정의 권위가 닿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신이 추진하던 북방 개척과 토지개혁도 이제 결과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신은 곧 관직에서 물러나, 서북쪽 변방을 지키는 삶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의대조 사건 이후, 수년간 냉랭하던 유협과 마초의 관계는, 그날 이후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이제는 가끔씩 사석에서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였다. 유협은 마초를 후원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후원을 거닐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정담을 나눴다.
그러다 유협이 슬쩍 용건을 꺼냈다.
“대장군이 이삼 년 안에 조정을 떠난다 하니… 짐이 금군(禁軍)을 창설할까 하오.”
“마땅히 그러셔야지요. 동북쪽에는 연왕이, 서북쪽에는 신이 버티고 있을 것이나, 전쟁이란 어디서 어떤 식으로 일어날지 모릅니다. 전면전을 치를 수 있는 병력을 낙양 인근에 두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수도에 금군이 있는 가장 큰 이유.
그것은 사실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외적의 침략을 경계하는 변방의 사령관들이 수도로 칼끝을 돌리고 반란을 일으킬 경우에 대비한 것이다.
마초도 그것을 알기에 유협의 금군 창설 계획에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았다.
‘이것까지 내가 간섭하면 안 된다.’
이미 궁성 수비를 담당하는 위위(衛尉) 자리에도 마초의 사람으로 여겨지는 조운이 앉아 있었다. 사실 조운은 마초와의 개인적 친분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지만, 세상 사람들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만약 금군의 책임자까지 마초의 사람으로 채우면, 은퇴한 뒤에도 억지로 조정의 일에 개입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궁금하긴 했다.
‘성상께서는 과연 누구를 쓰실 셈인가?’
쓸 만한 무장은 전부 마가군에서 일하고 있다. 아니면 마초의 손에 죽었다. 금군을 맡길 만한 인물이 누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유협은 그런 마초의 마음을 눈치채고 말했다.
“금군의 책임자로는 따로 생각해 둔 사람이 있소. 짐이 평소부터 눈여겨보던 인물이오.”
“누굽니까?”
“사마의에게 맡길까 하오.”
마초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하내 사마가의 가주… 사마의 말입니까?”
“그렇소. 얼마 전 청주의 반란을 진압했는데, 그 솜씨가 가히 옛 명장 영포, 팽월과 짝할 만했소. 금군을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오.”
사실 그렇다.
마초의 사람들을 빼면, 사마의만큼 군사를 잘 부리는 이는 없다. 게다가 대대로 명문 귀족 출신이며, 비상한 두뇌와 정치 감각까지 지닌 인물이었다.
구중궁궐 안에서 실권 없는 천자로 지내면서도, 유협은 누가 진짜 인재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뛰어난 안목이었다.
하지만 마초는 참지 못하고, 기어이 한마디를 할 수밖에 없었다.
“폐하. 사마의는…….”
“무엇이오?”
“사마의는 재고해 주십시오. 그는 믿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원래의 역사에서 유협이 가진 황위는 조조와 조비가 찬탈한다.
그리고 조씨들의 황위를 다시 찬탈한 것이 사마의이다. 결국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의 대에 이르러 삼국은 사마씨의 진나라에 의해 통일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유협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마초는 갖은 이유를 대가며 사마의를 중용하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야심이 지나치게 크고, 능력은 있으나 충의가 부족하며, 관상이 안 좋다는 그런 이유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유들에 유협이 공감할 리 없었다.
“하면 대장군은 누구에게 금군을 맡기라는 말이오?”
유협의 말투가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마초는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사마의를 쓰지 말라는 것은 선의에서 비롯된 충언이다. 그러나 유협은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짐은 이미 사마의에게 금군을 맡기기로 마음을 정했소. 하지만 대장군이 그토록 반대한다면 짐도 더 생각해볼 수밖에. 사람을 쓰고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는 대장군이 짐보다 훨씬 능하지 않소?”
“폐하, 신은 그저…….”
“다른 사람을 한 명 더 써서 둘이 서로 견제하도록 하겠소. 대장군이 물러날 때까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 누구를 쓸지는 더 생각해 보겠소.”
유협은 상한 기분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황궁에서 나온 마초는 하늘을 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
아들 마명의 눈빛에서 보이는 야심.
흉노와 쌓게 된 깊은 원한.
낙양에서 금군을 이끌게 될 사마의.
상황이 조금씩 꼬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