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282화 (269/306)

282화. 적토마의 주인

215년, 유주 탁군.

연왕 유비는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만나고 있었다.

“왕야께서 이 늙은이를 기억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무슨 서운한 말씀을! 이 비가 어찌 저 선생을 잊겠습니까? 이제 와서 말입니다만, 돌아가신 원 기주께서 저 선생의 말씀을 잘 들어 주셨으면 일이 이렇게 되지 않았겠지요.”

기주 호족, 저수.

본래 원소의 휘하에서 활약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오만해진 원소에게 바른말을 하다 눈 밖에 났고, 개봉대전에서 패배한 뒤 낙향했었다.

정치로부터 거리를 둔 채, 조용히 집안 식구들만을 건사하며 살던 그였지만 시대의 변화는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마 대장군이 북방에서 균전제를 시행하니, 땅이 반으로 줄었습니다. 이대로는 가독들을 건사하기도 어려워진 상황이라 부득이하게 왕야께 귀부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잘 오셨습니다. 저 선생께서 계실만한 땅은 곧 마련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유비는 저수를 크게 환대했다.

잠시 과거 얘기를 하던 두 사람의 대화는 결국 현재의 일로 향했다.

“마 대장군이 과감하게 일을 추진하는 것 같더군요.”

“그렇습니다. 기주, 서량, 병주에서 균전제를 통해 호족의 토지를 몰수하고 있는데, 호족들도 마땅히 저항하지 못하고 있지요. 서량 호족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처참하게 진압됐고, 병주와 기주 호족들은 여포와 원소의 편에 섰던 사람들이니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당장 저도 이렇게 쫓겨 왔고 말입니다.”

“그렇게 얻은 세곡으로 요새를 짓고 병영을 늘린다지요?”

“뿐만이 아닙니다. 중원에서 양세법을 시행해서 늘어난 세금까지 북방 개척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무장이 집권했으니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면이 있겠지만, 이건 해도 너무합니다.”

마초는 북방 개척을 위해 매년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백성의 삶은 더 나아졌다. 균전제로 인해 농사지을 땅이 생기거나, 자산에 따라 세를 부과하는 양세법으로 인해 세 부담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마초가 집권하면서 호족들의 땅이 줄어들고 백성들의 땅이 늘어났다. 후한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향후 백 년, 이백 년을 보자면 이 토지 개혁은 분명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 뻔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땅을 나눠 줘야 하는 호족들은 어떤 생각을 하겠나?’

유비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분명히 반발이 있겠군요.”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만약 이 상황에서 북방의 실력자가 마 대장군에 맞서 거병한다면… 기주에서만 5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을 겁니다. 청주까지 포함한다면 7만쯤 되겠지요.”

“하하하, 그것참.”

유비는 크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마 대장군도 참 곤란하겠군요. 하여튼 저 선생, 오셨으니 술이나 드십시다.”

저수는 은근히 유비의 의중을 떠보려 했지만, 유비는 확실히 답변하지 않았다.

연회는 조촐했다. 무희도 없고 가기도 없었다. 음식도 시원치 않았다.

하지만 술만은 잔뜩 있었다.

연회장을 둘러보던 저수는 유비에게 넌지시 물었다.

“왕야께서 오신 후 유주가 많이 풍요로워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핫, 그렇게 소문이 났습니까?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이제 흉년이 들어도 굶어 죽는 사람은 없지요.”

유비는 통치를 잘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따랐다.

‘그런 것치고는 왕부가 대단히 검소하다.’

저수는 그 말이 하고 싶었다.

그런 저수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유비는 씩 웃으며 말을 건넸다.

“저 선생 같은 귀한 손님을 맞기에는 너무 누추한 곳이지요. 요즘 돈을 쓸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돈을 쓸 일이라 하심은…….”

“군사들이 쓰는 돈이 한두 푼이 아닙니다. 마침 멀리 원정을 갈 일도 생겼고요. 요즘은 말값이나 철값도 많이 올라서 말이지요. 잠깐, 그것도 마 대장군이 다 사들인 탓인가?”

유비는 반농담처럼 말했지만, 원소군의 책사였던 저수는 대번에 숨은 뜻을 간파할 수 있었다.

‘군비를 계속 증강하고 있군. 그저 이대로 늙어가려는 사내는 아니다.’

유비는 말과 철을 사들여서 뭘 하려는 걸까?

저수가 그런 의문을 품었을 때, 갑자기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막아라, 이놈들아!”

“아이고, 전하께서 손님을 맞고 계시는데…….”

쾅!

연회장의 벽을 박차고 뭔가가 뛰어 들어왔다.

푸드득.

말이었다.

체구는 보통 말의 두 배에 달할 만큼 거대하고, 털은 피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다.

저수는 이 말을 본 적이 있었다.

“저, 적토마…….”

경악한 저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앉아 있던 유비는 일어나서 적토마를 향해 다가갔다. 마부들의 말을 듣지 않고 푸드득거리며 날뛰던 적토마는, 유비가 콧잔등에 손을 대자 신기하게도 얌전해졌다.

“그래, 이 녀석아. 손님이 오셨으니 얌전히 있어야지.”

유비는 저수를 돌아보며 웃었다.

“놀라셨습니까? 이것 참 송구합니다. 거친 말을 다루는 게 보통 일은 아니군요.”

“아니, 왕야. 이 말은… 여포의 적토마 아닙니까? 적토마는 마 대장군의 칼에 죽었을 텐데, 어떻게 이곳에…….”

“으하하, 사연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병주 쪽에서 말을 사들이다가 우연히 적토마의 핏줄을 얻었지요. 영리하지만 몸집이 작은 녀석이었는데, 그 녀석을 덩치 큰 서역 말과 교배하니 이렇게 큰 말이 나오지 뭡니까.”

말의 수명은 20년 남짓. 그중 군마로 활동할 수 있는 건 7~8년에 불과하다.

이 말은 적토마의 3세대 정도 후손일 것이다.

3세대를 넘어 피가 깨어난 건지, 놀라울 정도로 여포의 적토마를 닮은 말이었다.

유비는 적토마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이렇게 성질이 사나워서야 내가 타는 건 무리군. 나이 많은 무장들에게도 맞지 않겠어. 아무래도 그 녀석에게 주는 게 제일 낫겠는데.”

“그 녀석이라니요?”

저수의 물음에 유비가 대답했다.

“아아, 우리 군에 젊은 녀석이 하나 있는데 무예가 아주 뛰어납니다. 저 선생께도 인사드리게 하고 싶은데, 마침 지금은 멀리 원정을 나가 있군요.”

* * *

요동성.

낙양보다 한반도에 더 가까운 이곳은 중국의 동북쪽 끝이나 마찬가지였다. 더 동쪽에도 군현들이 있기는 하지만 작은 개척도시에 불과했다.

그러니 요동태수 공손강은 이곳에서 왕이나 다름없는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분명히 오늘 아침까지는 그랬다.

“위연이 여기 있다! 공손강, 순순히 목을 바치고 부하들의 목숨이 상하지 않도록 하라!”

연군의 선봉에 선 위연이라는 장수는 천 명을 족히 상대할 수 있는 맹장이었다. 위연의 칼이 가는 곳마다 군사들의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위연의 뒤를 따르는 두 청년도 공손강군이 당해낼 방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관평이다. 승부해 주마!”

“내가 바로 관흥이다!”

관우의 두 아들, 관평과 관흥이었다.

둘 다 녹색 전포를 입고 녹색 두건을 썼으며, 큼지막한 언월도를 들었다. 붉은 얼굴까지 아버지를 쏙 빼닮았으니, 공손강군의 병사들은 관평과 관흥을 보는 것만으로도 혼비백산할 정도였다.

원래 결사항전을 결의했던 공손강이다. 그런데 눈앞에서 자신의 병사들이 너무 쉽게 죽어 나가는 걸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잠깐! 고정하시오, 위 장군. 우리가 이렇게 다툴 필요가 뭐가 있겠소? 왕야께서도 뭔가 오해가 있으셨나 보오.”

공손강은 어떻게든 위연을 붙들고 사정해서 상황을 바꿔 보려 했다.

하지만 위연은 요지부동이었다.

“안 그래도 네놈을 벼르고 있었다. 이 유주 전역이 연왕 전하의 영토인데, 네까짓 게 감히 요동 구석에서 왕을 참칭해?”

유비가 탁군에 연왕부를 연 직후, 공손강은 자못 고압적인 자세로 유비를 떠봤다.

의외로 유비는 둥글둥글했다. 공손강을 마치 자신과 동격인 것처럼 대우해 주며 그의 요동 지배권을 승인해 주고, 가끔씩 공손강의 무리한 요구도 들어줬다.

그런데 유주의 민생이 좋아져서 군량이 쌓이자 유비는 돌변했다. 이민족과의 분쟁을 마무리하고, 십여 개의 도적떼를 순식간에 토벌한 후, 요동 공손씨 정권으로 칼끝을 돌렸다.

연군이 요동성에 도착한 후, 요동성이 떨어질 때까지 딱 하루가 걸렸다.

“저는 왕을 참칭하지 않았습니다, 장군! 그저 요동태수를…….”

“그거나 그거나!”

위연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칼을 뽑아 들고 공손강에게 다가갔다.

“아으아악!”

위연을 마주한 공손강이 새된 비명을 질렀을 때, 한쪽 구석에서 한 장수가 나타났다.

“연의 장수는 어르신을 겁박하지 말라. 이 한충이 상대해 주마.”

공손강군의 상장, 한충은 육중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8척 5촌의 키에, 장정의 허벅지만 한 팔뚝을 지닌 사내였다. 입고 있는 갑옷까지 육중하니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울렸다.

쿵. 쿵. 쿵.

한충은 땅을 울리며 위연을 향해 다가왔다.

위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한충 쪽으로 칼을 겨눴다.

“별 거지 같은 게 설치는구나. 좋다, 내가 오늘 네놈을…….”

“장군.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맑은 저음의 목소리가 울리며, 위연의 앞으로 연군의 장수 하나가 나섰다.

그도 체격이 무척 좋았다. 8척의 키에 균형 잡힌 근육질이었다. 얼굴을 온통 가리는 투구를 쓰고 있었는데, 아주 조금 드러난 눈매가 길고 아름다웠다.

장수를 보자 관평과 관흥은 어딘가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반면 위연은 씩 웃으며 장수의 어깨를 툭 쳤다.

“뭐야, 색이냐? 알았다. 맡길 테니까 빨리 끝내라.”

“존명.”

관우가 첩 두씨에게서 얻었다고 알려진 서자, 삼남 관색. 올해 19세.

무슨 영문인지 얼굴을 가리고 있는 관색이 한충의 앞으로 나섰다.

가만히 보고 있던 한충은 대도를 치켜들고 관색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이 한충의 칼에…….”

척.

관색은 느릿해 보이는 걸음으로 한충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어 대도의 날을 잡았다.

“으윽!”

당황한 한충은 대도로 관색을 찍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뜻은 이뤄지지 못했다. 관색은 청경의 수법으로 한충의 손에서 대도를 빼앗아 한 바퀴 돌렸다. 한충의 손에 들려 있던 대도는 순식간에 관색의 오른손으로 넘어갔다.

경악한 한충이 뒤로 물러나려 했을 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폭음이 일었다.

관색이 옆으로 휘두른 대도는 너무나 강하고, 빨랐다. 관색의 대도에 맞은 한충은 그대로 몸이 터져나갔다. 선혈과 육편이 요동태수부의 천장까지 어지럽게 튄 후, 다리와 허리만 남은 한충의 몸이 자리에 쓰러졌다.

쨍그랑.

관색은 자루만 남은 대도를 바닥에 던졌다. 자신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칼날이 깨져 버린 것이다.

“어… 어으… 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손강은 바닥에 주저앉아 신음을 흘렸다.

압도적인 용력이었다. 저항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렇게 요동태수부의 소란이 정리되어 갈 때, 요동 공략을 맡은 연군의 주장이 태수부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자 모든 이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상장군!”

“상장군을 뵙습니다!”

연왕부 상장군 관우는 손을 들어 답례한 뒤, 공손강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수하 장수들부터 위무했다.

“오늘의 승리는 문장(위연의 자)의 공이 크다.”

“으하하하, 열심히 하다 보니 이놈도 상장군께 인정받는 날이 오는군요.”

아직도 저잣거리 시절의 말투를 고치지 못하고 있는 위연이 크게 웃었다.

여남 시절, 유비 밑에서 말단 병졸이라도 하겠다며 찾아온 그다. 유비는 위연의 자질을 꿰뚫어 보고 파격적으로 승진시켰고, 위연은 과감한 용병술과 용맹으로 그 기대에 부응하고 있었다.

관우는 뒤이어 관평과 관흥을 치하한 뒤, 마지막으로 관색의 앞에 섰다.

“많이 늘었구나.”

“아직 부족합니다.”

관우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 같이 건조했다.

반면 관색의 목소리는 크게 떨렸다. 존경과 사랑과 미움과 두려움이 제멋대로 섞인 목소리였다.

관색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관우는 관색의 칼에 맞아 상반신이 사라진 한충의 시신을 보며 말했다.

“마지막 순간, 손목이 흐트러졌다. 더 정진해라.”

“송구합니다.”

“탁군으로 돌아가면 네게 어울리는 칼을 맞춰 주마. 그리고 네 용력을 담아낼 만한 말도 구해 봐야겠다.”

관우는 그렇게 말한 뒤 등을 돌렸다.

관색은 끝내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관우의 뒷모습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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