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개혁 (2)
마초가 토지개혁의 구상을 말하자 제갈량이 답했다.
“중요한 것은 속도입니다.”
“속도라. 빠르게 해치워야 한다는 뜻인가?”
“반대입니다. 아주 천천히, 명분을 쌓아 가며 해야 합니다.”
“으흠, 그건 내 방식과 맞지 않는데.”
“그래도 그리하셔야 합니다. 지나치게 속도를 내면 천하의 모든 호족들이 반발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대장군의 정권이 위태롭습니다.”
제갈량은 속도 조절의 중요성을 말했다. 온건파 진군과 신중론자 서서도 동의했다. 이상주의자 사마랑이 몇 마디 반박했지만, 제갈량이 정교한 논리로 반박하자 더는 말하지 못했다.
“토지 제도는 군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침 대장군이 하시려는 북방 개척과 연결해서, 첫 단계로 서량과 병주, 기주에 균전제를 시행합니다. 서량은 마가군의 영지이고, 병주와 기주는 옛날 여포와 원소의 땅으로서 이 지역의 호족들은 조정에 반기를 들었던 자들입니다. 이 지역들에는 균전제를 시행해도 뒷감당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지역은?”
“형주는 남방 이민족들과 맞닿아 있으니 기회를 봐서 균전제를 도입할 수 있습니다. 서주는 조조가 벌인 대학살 이후 땅은 남고 인구가 부족하니 또한 가능하겠지요. 다만 예주, 연주, 청주, 사례, 관중은 다른 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어떤 식 말인가?”
제갈량은 자신의 구상에 대해 설명했다.
이 지역들은 균전제를 할 만큼 빈 땅이 충분하지 않고, 호족들의 세력도 강하다. 그리고 자영농을 육성해서 징병해야 할 만큼의 안보 위협도 없다.
“일단 이 지역에도 균전제를 할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하고, 호족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을 때 다른 제도를 도입합니다.”
“다른 제도라면?”
“세를 곡식이 아닌 돈으로 통일하고, 자산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는 겁니다. 호족들은 어쨌든 땅을 빼앗기지 않으니 받아들일 것이고, 자산이 적은 자에게는 세를 적게 걷으니 백성들의 삶도 안정되겠지요. 이 지역들은 이민족의 위협이 적으니 군사들은 각 주에서 걷은 세금으로 모병하고, 세를 걷기 전에 이러한 지출을 미리 헤아려 전체 세액을 책정하면 됩니다.”
제갈량의 구상은 당나라 때의 양세법(兩稅法)과 크게 닮아 있었다. 균전제가 인구 증가로 한계에 부딪혔을 때 등장해서, 나관중이 살던 시대까지 중국사 세금 제도의 근간이 된 제도였다.
마초는 제갈량의 구상을 듣고 가후를 슬쩍 돌아보며 의견을 물었다.
“내가 보기에는 중서령의 말이 옳은데, 가 선생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탁견입니다. 토지 개혁 건은 중서령에게 맡기시지요.”
가후는 짧게 대답했다.
긴 시간 모사로 살아온 가후지만, 정책에도 자신이 있었다. 젊은 선비들에게 한 수 가르쳐 줄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갈량이라는 젊은 관료는 항상 가후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는 뭐든지 다 뛰어났지만, 정책을 만들고 집행할 때 가장 눈이 빛났다. 그가 가져오는 결과물들은 가후조차도 따라가기 벅찰 정도였다.
‘천하의 기재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이 젊은이는 천 년 동안 이름을 남기는 명재상이 될 것이다.’
마초는 가후를 보며 빙그레 웃은 뒤 제갈량과 사마랑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좋아. 중서령의 방안을 채택하지. 다만 예상되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 제도를 처음 제안한 문하시중이 세심하게 점검하도록 하라.”
“그리하겠습니다.”
제갈량과 사마랑이 대답했다. 진군, 서서, 장완, 유파를 비롯한 관리들도 뒤이어 대답했다.
마초는 열정적인 젊은 관리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권신이라고 해서 거들먹거리면서 편안하게만 살 생각은 없다. 유 황숙도, 조맹덕도 뛰어넘는, 그런 업적을 남길 것이다.’
앞으로 10년.
마초는 내심 219년을 목표로 삼았다. 그때가 되면 개혁이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더 이상 낙양에서 골치 아픈 정치를 해야 할 이유도 없어질 것이다.
* * *
마초의 토지 개혁은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처음 이 사실을 상주했을 때, 천자 유협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대부분이 호족 출신인 조정의 고관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초는 토지 개혁을 밀어붙였다. 먼저 북방의 서량, 병주, 기주에 균전제를 시행했다.
균전제를 하려면 대호족이 소유한 토지들을 재분배해야 한다. 다른 지역의 호족들도 언제 자신의 영지에 균전제가 시행될지 몰라서 불안한 눈으로 낙양 조정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내군의 대호족, 온후 사마의도 마찬가지였다.
“반발이 엄청나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기주 호족 몇몇이 작당해서 대장군에게 자객을 보냈다고 하더군요.”
사마가의 가주가 된 사마의. 그의 앞에는 전임 가주이자 아버지인 사마방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더냐?”
“대장군 마초는 무공으로도 천하제일인 아닙니까. 십여 명의 자객들이 전부 일 합도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작년에는 서량에서 반란이 일어나더니, 올해는 자객이라.”
작년, 211년에는 서량의 국연이라는 호족이 따르는 무리를 3만이나 모아 반란을 일으켰었다. 균전제에 대한 반발이 원인이었다.
마초는 직접 서량으로 가서 국연의 반란을 진압했다. 국연은 거병 후 두 달 만에 참수되었고, 국연의 편에 선 호족들은 세력이 거의 해체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마초에 대한 반감으로 서량의 여론이 들끓었지요. 마초가 은퇴한 한수를 다시 불러들여 달래게 하니 겨우 잠잠해졌다고 합니다.”
“그자도 이해할 수 없는 자로군. 가만히 있으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것을, 어째서 그런 가시밭길을 간다는 말이냐? 마치 자기가 천자라도 되는 것처럼…….”
“그게 핵심 아니겠습니까. 천자의 자리를 노리는 게지요.”
사마의는 사마방을 향해 붙어 앉았다.
“아버지. 이제 때가 됐습니다. 우리도 가문을 지키려면 온현에서 돈벌이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관직에 나가겠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슬슬 조정에 입조할까 합니다. 기왕이면 무관직이 좋겠지요.”
“관직에 나가는 건 좋다만, 어째서 고달픈 무관직을 하려는 거냐? 이제 큰 전쟁도 다 끝났으니 무관직을 해도 출세가 힘들 거다.”
“아버지. 이 토지 개혁이 끝나면 천하의 대세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민심은 전부 마초에게 쏠리고, 호족들은 힘을 잃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마초도 천자가 되려는 마음을 품지 않겠습니까?”
마초는 어째서 그렇게 위험 속으로 몸을 던지는가?
사마의는 마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마초가 회귀한 것도 모르거니와, 개인적인 기질 역시 대의나 명분에 크게 공감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만약 마초가 강한 권력욕을 갖고 있어서, 천자가 되려는 명분을 쌓는 것이라면… 그때는 모든 게 앞뒤가 맞는다.’
그것이 사마의의 해석이었다. 사마방도 그런 해석에 공감했다.
“마초의 황위 등극을 저지하고 토지 개혁을 막으면 우리가 대신 권세를 누릴 겁니다. 어쩌면 마초를 돕는 대신 토지 개혁이 우리 집안을 비껴가게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지요. 둘 중 어느 쪽이든 무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냐. 알았다.”
사마의는 내친김에 한마디를 더 했다.
“토지 개혁의 핵심 인물이 두 사람 있습니다. 앞으로 상황에 따라… 필요할 경우, 이 두 사람을 제거하겠습니다.”
사마의가 말하는 핵심 인물 중 하나는 중서령 제갈량.
또 다른 하나는 문하시중 사마랑, 즉 사마의의 형이다.
잠시 날카로운 눈으로 사마의를 바라보던 사마방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을… 망하게 하는 것보다는 자식 하나를 잃는 게 낫겠지. 중달, 이제 가주는 너다. 결단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네 뜻대로 결단해라.”
“알겠습니다.”
사마의는 사마방에게 인사를 올리고 물러났다.
조정에 출사하면, 과연 마초의 편에 서게 될 것인가? 아니면 마초의 반대편에 서게 될 것인가?
“기왕이면 반대편이 좋겠는데. 그래야 그 녀석과 다시 겨룰 수 있으니.”
지금 토지개혁의 핵심으로 승승장구하고 중서령, 제갈량.
사마의는 제갈량을 떠올리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 * *
병주 상군.
만리장성이 통과하는 곳에 위치한 도시다.
지금은 서량의 북지군, 병주의 안문군과 함께 북방 개척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지금 선비족과 마가군 기병대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빌어먹을 한인 놈들! 우리가 너희에게 소홀히 대한 적이 없건만, 오환족 놈들에게 붙어서 우리 뒤통수를 쳐?”
선비족 기병대를 이끄는 대인 가비능은 노기를 감추지 않았다.
한인 기병대를 이끄는 대장, 방덕은 짧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태연하게 그 말을 듣고 있었다.
“전쟁이 다 그런 거 아니겠나.”
“내가 네놈들 속을 모를 줄 아느냐! 우리 세력이 강해질 것 같으니 미리 세력을 흩어 놓고, 통일되지 않은 오환족과 강족들을 회유해서 네놈들 말을 잘 듣는 개로 키우겠다는 것 아니더냐! 네놈들 꿍꿍이는 천 년 동안 변함이 없었다. 더러운 한인 놈들!”
“어허, 거 사람 참. 전쟁을 하러 왔으면 전쟁을 해야지.”
방덕은 혀를 차며 활을 들었다.
그때, 방덕의 옆에 있던 군사 법정이 앞으로 나섰다.
“초원의 지배자는 오직 대장군뿐이시다! 대장군께서 매년 하사품을 내리시는 것은 초원에 사는 너희들 전부를 위한 것인데, 가비능 너는 감히 하사품을 독점하여 대장군의 뜻을 어겼다. 어찌 벌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네 이놈, 그건 예전부터 이어져 온 관례…….”
“닥쳐라! 네놈이 칸이 될 것이라고 떠들고 다닌 것을 모를 줄 아느냐! 대역무도한 놈, 오늘 네놈의 가죽을 벗겨 초원의 질서를 바로잡을 것이다!”
한인과 유목민의 공존을 위해, 한인 권력자는 유목민 권력자 하나를 지원해 주며 동맹을 맺게 된다.
최근 병주의 실력자로 떠오른 선비족 대인 가비능도 그런 인물이었다.
그런데 최근 마초가 북방 개척을 선언했다. 훗날 있을 유목민들의 대규모 침공을 대비해서, 북방을 거대한 요새로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가비능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다.
“대의나 명분 따위를 입에 담지 마라! 네놈들은 강대한 유목민 지도자를 원하지 않는 것뿐이다. 오냐, 내 서서 죽을지언정 한인의 발아래를 기면서 삶을 구걸하지는 않으리라!”
가비능의 입장에서는 마가군이 생트집을 잡아 싸움을 건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싸움은 싱거웠다. 가비능이 모은 선비족 기병들은 금철기의 돌격 앞에 낙엽처럼 쓸려나갔다.
선비족은 군사는 많아도 느슨하게 모인 각 부족의 연합체일 뿐이다. 선두에 선 가비능의 부족이 대패하는 것을 보자 저마다 흩어져서 초원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원통하고, 또 원통하구나!”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는 가비능.
“그러니까 이각, 여포 시절에 그만큼 분탕을 쳤으면 이런 시절이 올 줄도 알았어야지. 더러우면 다음 생에는 막북의 칸으로 태어나라고.”
그런 가비능을 향해 별 감흥 없이 활을 겨누는 방덕.
방덕이 20장 거리에서 쏜 화살은 꼬리를 크게 흔들며 가비능을 향해 날았다. 가비능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퍼억!
화살은 가비능의 투구 쓴 머리를 그대로 관통했다. 깃이 달린 화살 꼬리가 파르르 떨면서 선혈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투구째 머리가 뚫린 가비능은 비명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움직임이 멎었다. 방덕이 그 옆으로 다가가자, 그제야 말 위에서 아래로 미끄러지며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