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개혁 (1)
낙양, 대장군부.
마초는 갑작스럽게 자신을 찾아온 나관중을 만나고 있었다.
“날씨가 추워질 거라고?”
“그렇습니다. 서량 일대의 대나무 분포를 확인했습니다. 미래에는 대나무가 자라지 못하던 곳에 지금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이걸 보면, 앞으로 날씨가 추워지는 게 분명합니다.”
겨울이 추운 곳에서는 대나무가 자라지 못한다.
이 정도는 생물학 지식이 없는 고대인이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대나무의 북한계선을 넘나들며 전쟁을 해 온 마초와 나관중은 당연히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마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지금부터 300년간 전란의 시대가 지속된다고 했지? 만약 날씨가 추워져서 북방의 유목민들이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 보면… 이제 앞뒤가 맞는군.”
기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상나라 때는 황하 유역에 코끼리와 코뿔소가 흔했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의 소빙기를 거치며 더 이상 중원에서는 코끼리와 코뿔소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날이 추워져서 유목민의 남하가 시작되면, 중원은 다시 한번 전란의 화염에 휩싸일 것이다.
나관중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주공. 막아야 합니다.”
“뭘 말인가?”
“전란의 시대 말입니다. 5호 16국 시대가 되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왕이 자신의 기분을 위해 백성을 학살하며, 민생이 끔찍한 도탄에 빠지게 됩니다. 300년간 걸주(桀紂)와 같은 폭군이 다스리는 세상을 상상해 보십시오.”
“막는다라. 무슨 수로? 사람의 힘으로 날씨를 바꿀 수 있나?”
“그야…….”
나관중은 거기서 말문이 막혔다.
물끄러미 나관중을 바라보던 마초는 피식 웃고 차를 따랐다.
“이거나 한 잔 들게. 맹획이 보낸 차인데, 이걸 진하게 우려서 자네가 만든 가루를 타 먹으니까 맛있군.”
마초는 설탕을 듬뿍 넣은 홍차를 나관중에게 권했다.
가만히 차를 홀짝이던 나관중은 다시 한번 마초를 보며 말했다.
“이대로 그만두실 겁니까?”
“그러니까 뭐를?”
“난세를 끝내는 일 말입니다.”
“난세는 끝냈잖아?”
“당장은 그래 보이겠지요. 예, 앞으로 이삼십 년은 평화가 계속될 겁니다. 하지만 그다음에는요?”
“그다음이라.”
“우리가 더 살아 봤자 수십 년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다시 전란이 시작되겠지요. 주공, 주공은 역사상 그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신 분입니다. 이때 미리 전란을 대비해 두셔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도탄에 빠질 백성들을 구하고…….”
“그걸 하면 누가 알아주나?”
무슨 생각인지, 마초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반면 마초의 말은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나관중은 말문이 막혔다.
‘누가 알아주냐니, 그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과는 상황이 다르다. 지금은 기왕 시작된 전란을 마초가 도중에 수습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초의 업적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서량의 한미한 무장 출신이면서 대장군까지 출세할 수 있었고, 천자를 능가하는 권력자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일어날 전쟁을 미리 예상해서 막았다 한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지.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마냥 충신이었던 건 아니야. 이제까지는 난세였고, 상황이 부득이하다는 점이 나에 대한 비난을 막아 준 거지. 그런데,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전쟁을 내가 아무리 열심히 막았다 한들, 누가 내 진의를 알아주겠나?”
나관중은 묵묵히 홍차를 내려다보며 할 말을 찾았다.
하지만 할 말이 없었다.
마초는 이미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그런 그에게 더 이상 뭔가를 요구할 자신이 없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지요.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겠지만, 성과는 뚜렷하지 않을 겁니다. 사람들은 주공을 비난하겠지요. 무장이니까 군부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일을 벌인다고 말입니다.”
“그렇겠지?”
나관중은 대답 대신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마초의 태도가 뭔가 이상했다.
“왜 웃으십니까?”
싱글거리며 웃고 있던 마초는, 나관중이 묻자 반쯤 식은 홍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재미있잖아.”
“예?”
“관중. 자네나 나나 하늘에서 수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받은 수명으로 이대로 부귀영화만 누리고 죽어서야 되겠나?”
탁.
마초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입꼬리는 한껏 올라가고 눈은 웃지 않는, 예의 그 악당 웃음을 지은 채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다. 그러니까 내가 해야겠어.”
“예?”
마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벽으로 다가갔다. 놀란 나관중의 시선이 그런 마초를 좇았다.
“이각이나 여포는 이리나 승냥이 같은 자들이었다. 그런 놈들은 그저 토벌하기만 하면 천하가 평안해지니, 고민할 필요가 없었지.”
“그, 그렇지요.”
“하지만 조맹덕과 주공근은 다르다. 나와는 악연이었지만, 그들은 한 시대의 영웅이었다. 자신의 방식으로 천하를 노렸고, 또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자들이었지. 나는 그들의 꿈을 꺾었다.”
스릉.
마초는 벽에 걸려 있는 치란을 뽑았다. 3척 7촌의 검은 칼날이 빛을 내뿜었다.
“그러니까 책임을 져야지.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만들 것이다. 그만한 영웅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면 수십 년 동안의 평화로는 부족하다. 나는 수백 년 동안 이어질 전란을 막아서, 천 년의 제국을 만들 것이다.”
찻잔을 쥔 나관중의 손이 덜덜 떨렸다.
15년 전, 그의 앞에서 영웅이 되겠다고 맹세했던 청년은 맹세를 지켰다. 이미 당대 최고의 영웅인 그는, 이제 당대를 뛰어넘어 천 년의 역사를 바꾸겠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북방을 개척한다. 서량과 병주, 하북을 이민족의 침략에 견딜 수 있는 땅으로 만들 것이다. 먼 훗날 이민족의 침공이 시작되더라도, 지금 같은 난세가 다시 오지 않도록 말이야. 그 정도면 고조나 시황제에 못지않은 업적 아니겠나?”
치란의 검은 칼날을 바라보던 마초는 나관중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나관중은 벅찬 가슴으로 마초에게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무왕이 상나라 주왕을 벌한 것에 짝할 만한 일이 될 것입니다, 주공.”
“그래. 하지만 이번 싸움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거야. 그저 병권을 계속 가지고 있으려고 무리한 일을 추진한다고 하겠지. 그러니까… 자네가 글로 잘 써 달라고. 역사에 남을 수 없다면, 패설로라도 남아서 후세에 전해지도록.”
철컥.
마초는 치란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고 벽에 걸었다. 그리고 나관중의 어깨를 두드리고 먼저 집무실을 나섰다.
그에게는 북방 개척 말고도 추진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었다.
* * *
후한에서 황명을 출납하는 기관으로 상서대가 있다.
황권을 대리하는 녹상서사 마초는 상서대를 상서성(尙書省)으로 개편하고, 그 외에도 몇 가지의 정책 기구를 더 만들었다. 나관중이 말해 준 당나라의 관제를 참고한 것이었다.
“중서성(中書省)에서 정책을 입안한다. 문하성(門下省)은 중서성의 정책을 심의한다. 상서성에서는 문하성을 통과한 정령을 시행한다.”
그리고 3성을 통괄하는 것은 당연히 녹상서사 마초였다.
“하지만 나는 전쟁터만 돌아다니느라 아는 것이 없으니, 어지간한 일에는 도장만 찍는 게 낫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가 선생?”
“핑계도 가지가지십니다. 이제 이 늙은이를 그만 부리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 이유로 실제 3성을 운영하는 실세는 대장군부 종사 가후였다. 그는 상서령 자리에서 퇴임한 뒤, 대장군부의 낮은 관직으로 돌아와 마초의 측근으로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국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라, 사람들은 그를 사공 순유, 태원후 나관중과 함께 세 명의 재상이라는 뜻으로 삼상(三相)이라고 불렀다.
“으하하하! 이각을 끌어들인 죄를 속죄하는 게 그렇게 쉽게 되겠습니까? 한 10년만 더 일하시면 그때는 내 생각해 보지요.”
“10년…….”
가후도 어느새 환갑이 넘었다. 전란을 끝내는 데 공도 많이 세웠고, 이제 신변의 위협도 사라졌으니 조만간 은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초에게 그런 의사를 전할 때마다 항상 절망적인 답변이 되돌아왔다. 이제는 가후도 편안한 노후를 반쯤 포기한 채 살고 있었다.
오늘은 상서성, 중서성, 문하성의 회합이 있는 날이다. 3성의 수장들, 그리고 마초가 새롭게 중서성에 투입할 인재들이 집무실에 모여 있었다.
“상서령 진군이 대장군을 뵙습니다.”
진군은 가후의 퇴임과 함께 상서령이 되었다. 그는 30대의 젊은 나이에도 상서령 자리에 어울릴 만큼 뛰어난 정무 능력을 보였다.
“문하시중 사마랑이 대장군을 뵙습니다.”
문하성의 수장은 사마랑이었다. 하내 사마가의 장남이자, 뛰어난 인품과 높은 학식으로 존경받는 선비였다.
그리고 마초가 추진하려는 두 번째 개혁과제의 핵심 인물이기도 했다.
“장문(진군의 자), 백달(사마랑의 자), 두 사람이 그동안 고생이 많았네. 이제 우리의 뜻대로 일을 추진할 인재들이 다 모였네.”
마초는 두 번째 개혁과제를 추진하기 위해 불러 모은 젊은 인재들을 돌아보았다. 대부분 정책을 입안하는 중서성 소속이었다.
형주 학파 출신으로 마초를 따르게 된 서서와 이적.
이각과 곽사를 토벌한 직후 마가군에 끌어들인 왕관.
태학 출신의 한기와 최림.
남형주에서 등용해서 어릴 때부터 육성해 온 장완과 유파가 그들이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이 나라의 틀을 바꾼다. 전란에서 살아남은 백성들이 대호족들이 가진 땅을 나눠서 소유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세를 걷어서 국고를 채운다. 세를 거두는 방법도 완전히 뜯어고친다.”
북방 개척에 이어, 마초가 추진하려는 두 번째 과제는 토지 개혁이었다.
나관중이 알려준 수당 시대의 토지 제도를 참고하여, 균전제(均田制)를 도입하려는 것이다.
중서성에 모인 서서, 이적, 왕관, 한기, 최림, 장완, 유파가 마초의 구상을 다듬어서 균전제로 만든다. 그러면 문하시중 사마랑이 이 제도를 심사하는데, 그는 이미 이 시대에 비슷한 제도를 주장했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균전제는 전란을 거치면서 호족들이 다 망하고 빈 땅이 늘어났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 정도는 아니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균전제를 지금의 현실에 맡게 뜯어고쳐야 한다. 일부는 포기하고, 일부는 황무지를 개척해서 보충한다. 그리고 정 모자라는 일부는…….
“빼앗아야지. 내가 땅을 내놓으라는데 호족 놈들이 별수 있나.”
마초는 주변을 돌아보며 악당 같은 웃음을 지었다. 가후를 제외한 이들은 악당 웃음이 익숙하지 않은지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때, 심부름하는 소동이 바깥에서 큰소리로 외쳤다.
“대장군. 중서령 들었습니다.”
“중서령이?”
얼마 전 임명된, 29세의 신임 중서령.
현령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서 군공을 세우고, 사공부에서 토지 정책을 만들며 크게 인정받은 인물이다. 마초의 토지 개혁에서 실질적인 수장 역할을 할 인물이기도 했다.
‘이 구상을 제안했던 건 사마백달이지만, 실제로 구체화시키는 건 이 친구가 될 것이다.’
“늦었습니다, 대장군.”
“오늘은 다른 공무 때문에 오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나?”
“사공부와 화폐 관련 논의가 있었습니다. 길어질 줄 알았는데, 순 사공과 일 각만에 의견이 일치해서 일찍 끝내고 오는 길입니다.”
마초보다 더 큰 키에 넓은 어깨, 사나운 눈매, 그리고 흰 옷과 깃털부채.
중서성의 수장, 중서령 제갈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