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강에 지는 영웅 (1)
강동군의 비장의 무기였던 수우각궁 기병대.
그러나 당양 벌판에서 대패를 당한 후 그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강동군은 순식간에 얻은 형주를 순식간에 뺏겼다. 맹획이 강릉을 함락시키자 형주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났다. 소규모 전투가 일어나는 곳마다 마가군이 지원하니 강동군은 버틸 방법이 없었다. 결국 강동군은 강하를 제외한 형주 전역을 도로 빼앗기게 되었다.
주유를 비롯한 강동군의 지휘부는 양양성에 고립되게 되었다.
쏴아아아.
마초는 군막 안에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서 부스럭거리던 맹획이 말을 걸었다.
“차가 다 됐습니다.”
“그래?”
마초는 맹획과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맹획은 군사만 이끌고 온 게 아니라 귀한 차도 잔뜩 가져왔다. 이전까지 일부 소수민족들이 즐기던 것들 중 괜찮은 것들을 새롭게 발굴한 품종들인데, 그중에는 전 중국의 유행을 바꿀 만큼 훌륭한 것들도 있었다.
“훌륭하군. 특히 이 검은 차는 더욱. 남중의 큼직한 차나무 잎을 말려서 오랫동안 숙성시켰다고?”
“그렇습니다. 남중에는 검은 곰팡이가 슨 차를 마시는 부족이 있는데, 그 맛이 썩 훌륭합니다. 앞으로는 이 차를 많이 생산해 보려 합니다. 대장군께서 중원을 평안하게 하시면서 좋은 차를 찾는 귀족들이 늘어났으니까요.”
“좋은 생각이다. 형주에서 강동군을 쫓아내면 강릉에 교역 거점을 하나 만들지. 그곳에서 차를 매매하면 될 것이다.”
그러자면 화폐 경제가 재건되는 것이 필수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다시 마초가 준비하고 있는 화폐 개혁으로 넘어갔다.
“새 화폐를 발행하신다고요?”
“그래. 이번 전쟁이 끝나면 강동과 유주를 제외한 천하 모든 곳에서 다시 화폐가 통할 것이다.”
“화폐가 다시 통하면 천하의 물산이 교통하는 것도 편해질 것입니다. 대장군께서는 참 하늘이 내린 인물이십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줘야 할 텐데.”
마초는 어딘가 쓸쓸하게 웃은 뒤 화제를 돌렸다. 맹획의 남중 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남중 처녀하고 혼인했다고?”
“그렇게 됐습니다. 남중은 이제 남만인과 한인의 경계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이번 혼례를 계기로 제 처가도 한인 성씨를 갖게 됐지요.”
“그 성은 누가 지었냐? 설마…….”
“당연히 나 선생에게 물어봤지요. 제 수하들 이름도 전부 나 선생에게 서찰을 보내서 받은 것들입니다.”
나관중이 맹획의 처가에 지어 준 성씨.
그것은 당연히 축융(祝融)씨였다. 중국 신화 속의 불의 신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그래서 축융부인과 사이는 좋고?”
“벌써 아들이 둘 있습니다. 이번 원정에서 돌아가면 셋째가 태어나 있을 겁니다.”
소년에서 청년이 된 맹획은 제법 의젓해져 있었다. 마초는 그런 맹획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위아래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꼬마였는데, 내가 결국 너를 사람 만들었구나.”
“인정합니다.”
“네 얘기를 듣다 보니 지방 호족의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서량은 이제 목화 농사가 한창일 테니 예전처럼 치고받고 싸울 일도 줄어들 테고… 이번 전쟁이 끝나면 나도 서량 가서 왕 노릇이나 할까?”
마초는 웃는 얼굴로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던졌다.
맹획은 마초의 진의를 눈치챘다. 그 또한 최근 마가군과 황실의 갈등에 대해 듣는 것이 있었다.
“안 됩니다.”
맹획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초는 물끄러미 맹획을 바라보다 물었다.
“어째서냐?”
“대장군께서는 이미 호랑이의 등에 올라타셨습니다. 서량으로 낙향하신다 한들, 조정의 태반이 대장군의 사람들인데 그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알아서들 하겠지. 다들 나 덕분에 다들 공경이니, 장군이니 하고 있는 사람들이니…….”
“하면 천하 백성들은 어찌하시렵니까.”
“이 녀석아. 백성들이야말로 내게 더 이상 뭘 바라면 안 되지 않겠느냐. 내가 전쟁도 끝내 주고, 도적도 토벌해 주고, 농사 잘되게 해 주고, 탐관오리들도 잡아서 족쳐 줬는데 뭘 더 이상…….”
“태평성대를 10년으로 끝내시겠습니까.”
맹획과 마초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장군. 한은 이제 수명을 다했습니다. 잠시 내버려 두면 또다시 환관과 외척이 전횡하고, 호족이 백성을 수탈하는 나라로 돌아갈 것입니다. 새 질서를 세우지 않으면…….”
“나는 가족과 벗들을 무겁게 여긴다.”
마초는 맹획의 말을 끊었다.
“대의를 위한 희생이라면 나도 이제껏 할 만큼 했다. 난세를 끝내겠다는 우리의 맹세도 얼마 후면 완성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뭘 더 해야 하겠느냐.”
“대장군.”
“권력 투쟁을 하다 보면 가족이 다친다. 이제껏 함께 어깨를 걸고 걸어온 벗들도 두 패로 나뉘어 싸움을 벌일 것이다. 막말로 내가 천자라도 됐다고 치자. 내 아들들 사이에 싸움이 나지 않겠느냐? 아들 대에서 나지 않는다면 손자 대에서라도 피바람이 불지 않겠느냐.”
한숨을 쉬는 마초.
맹획은 그런 마초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대장군께서는 마음대로 낙향하시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무슨 소리냐?”
“천자란 하늘의 명을 받아 사람을 다스리는 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천자가 없었습니다. 하늘이 명을 내리지 않아 그랬겠습니까? 아닙니다. 천자란 사실 백성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초는 말이 없었다. 맹획이 말을 이었다.
“백성은 싸움을 멈추기 위해 천자를 세우고, 천자의 권위를 신성한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건 어느 책에 나온 말이냐?”
“남중에 전해지는 격언입니다. 하여튼 그래서 백성은 천자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백성이 누구를 천자에 어울린다고 여기겠습니까? 누가 싸움을 멈출 수 있겠으며, 누가 백성의 삶을 낫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맹획은 마초를 상대로 아주 솔직한 이야기들을 토해냈다.
한참 듣고 있던 마초는 손을 들어 맹획의 말을 저지했다.
“알았으니 그만둬라.”
“대장군.”
“그래, 마음대로 낙향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지. 호랑이의 등에 올라탔으니, 앞으로 몇 년은 더 정치를 해야겠지.”
적당한 시점이 되면, 마초가 원하는 개혁이 완성되면.
그때는 중앙 관직을 내던지고 서량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나는 네 생각만큼 대단한 자가 아니다. 싸움이야 누구보다 잘하지만… 싸움은 이제 곧 끝날 테니까.”
어느덧 음력 7월이다. 이제 곧 장마가 끝나고 연일 폭염이 계속될 것이다.
비가 그치면 태아포를 다시 조립해서 가동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양양성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떨어질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싸움을 끝내려면 필요한 게 있지요.”
“그래. 이제 곧 관중이 그걸 들고 오겠군.”
마초와 맹획은 나관중을 떠올리며 차를 마셨다.
나관중은 지금 먼 곳에서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 * *
음력 8월.
드디어 밤바람이 시원해지는 계절이 되었다.
장마가 끝나자마자 조립을 시작한 태아포는 순식간에 양양성을 포위했다. 번성 공략 때보다 숫자는 더 늘어나서 8문에 달했다. 남문에 4문, 서문에 4문이 배치되어 연일 성문을 두들겼다.
마가군은 천천히 성벽을 무너뜨리며 전진했다. 사흘 만에 외성이 무너지고, 외성을 수복하려던 병사들이 무력화됐다. 그리고 닷새 후에는 내성이 무너졌다.
이제 남은 것은 좁은 옹성뿐이었다.
주유의 집무실은 옹성 위, 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었다. 주유는 이곳에서 문서를 읽고 있었다.
“더 빠르게 공격하려면 더 빠르게 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의외로 신중하군.”
“도독.”
“아마 탄으로 쓸 만한 바위를 아끼기 위해서일 것이다. 철저히 성벽을 부수는 데만 사용할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 곧 바위도 필요 없어지는 순간이 오겠지.”
싸움의 승패가 기울었다.
강동군이 자랑하는 수군은 아무 활약을 하지 못했다. 마가군이 수로를 무시하고 육지의 거점들을 전부, 너무나 쉽게 점령했기 때문이다.
번성과 양양성의 높은 성벽도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마가군의 압도적인 물량, 그리고 신무기 태아포 앞에 성벽은 한없이 무력했다.
한 방 역전을 노리며 준비한 담로검의 계승자, 정봉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계략에 걸린 줄 알았던 마초였지만, 단기접전으로 정봉을 제압할 정도의 무위가 있었다.
이제 양양성에는 파국이 예정되어 있었다.
“소장은 죽어서도 도독을 따르겠습니다.”
부장 능통이 결연한 눈으로 말했다. 주유는 능통을 돌아보며 씩 웃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겠느냐. 공적(능통의 자), 너에게는 미래가 있다.”
“도독께서도 아직 한창이시지 않습니까?”
“글쎄다.”
주유는 알 듯 모를 듯, 묘한 말을 남기고 쓸쓸하게 웃었다.
최근 양양 성내의 의원들 몇몇이 주유를 진찰한 적이 있다. 주유가 입을 꾹 닫고 있어서 진료 결과가 어땠는지는 불분명하다.
능통은 물끄러미 주유를 바라보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독, 설마…….!”
“경거망동하지 마라. 그저 오랫동안 전장에 있으니 몸이 좋지 않을 뿐이다.”
주유는 능통에게 잔잔히 웃어 보인 후, 손에 들고 있던 문서를 서안에 내려놓았다.
“공적.”
“예, 도독.”
“행장을 꾸려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쟁이 한창인데 행장을 꾸리라니요?”
“전쟁은 이제 곧 끝난다. 너는 오군으로 갈 준비를 해라. 태사자의와 여자형에게도 그렇게 전하라.”
주유는 마음의 짐을 떨친 듯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잠시 멍하니 주유를 쳐다보던 능통은 문득 주유가 읽던 문서에 주의가 미쳤다.
문서를 집어든 능통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이건! 도독,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파면장.
주유를 진서대도독에서 파면하고, 오군으로 소환하는 손익의 명령서였다.
“승패가 기울면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이럴 수는 없습니다! 도독은 지금의 강동군을 만드신 분입니다. 아무리 주공이라도, 도독께 이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얼마 전, 마가군의 나관중이 장강을 따라 오군을 방문했다.
그의 손에는 양주목의 인수가 들려 있었다. 오후 손익을 양주목에 임명해 강동의 지배권을 인정하게 하려는 유인책을 들고 협상을 하러 간 것이다.
그 반대급부로 나관중이 요구한 것은 형주 방면에서 강동군의 철수, 그리고 형주 공략을 주도한 주유의 파면이었다.
“주공은 만인지상의 위치에 계신 분이다. 그분의 고뇌가 어땠겠느냐?”
“하지만… 으흐흑!”
주유를 보며 소리치던 능통은 끝내 눈물을 쏟았다.
주유는 그저 편안한 미소로 그런 능통을 달랠 뿐이었다.
“천하를 남북으로 가르고 싶었으나, 그러기에는 내 재주가 부족하구나. 다만 주공은 젊으니 장강의 한 귀퉁이에 할거해 훗날을 도모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공적, 앞으로 네가 주공을 잘 보살펴다오.”
“도독께서는 같이 가지 않으십니까?”
“내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구차하게 삶을 구하고 싶지 않구나.”
휘이이잉.
집무실의 창문으로 거센 강바람이 들어왔다. 어느새 형주에도 가을이 오고 있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늦은 밤.
주유는 한수 어귀에 정박 중인 거대한 전선(戰船) 위에 올랐다.
이곳은 회담장이었다. 회담 상대는 일찌감치 도착해 전선의 갑판에서 한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랑인가. 오랜만이군.”
긴 머리를 늘어뜨린 평복 차림의 마초가 주유를 보며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