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당양벌의 만왕
한에서는 남중 이민족과의 통교를 전담하는 호만교위.
남중에서는 남만족의 대족장.
두 가지의 신분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맹획은 전황을 확인한 뒤 코웃음을 쳤다.
“흥. 강동 놈들이 죽으려고 용을 쓰는군.”
맹획은 양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동도나. 아회남. 우리는 기병을 이끌고 놈들을 들이친다.”
“예이. 예이.”
“목록. 교전이 시작되면 놈들이 우리를 향해 접근할 것이다. 너는 그때 코끼리로 놈들을 짓밟아라.”
“알았수다.”
“올돌골. 너는 목록의 옆에서 대기하다가 난전이 시작되면 적장을 노려라.”
“알, 았다.”
“좋아. 가자, 등갑군!”
맹획은 짧게 부르짖으며 말에 채찍질해서 앞서 달려 나갔다.
두두두두.
맹획의 뒤를 따르는 기병대는 가벼운 차림의 궁기병들이었다. 작지만 끈기 있는 남중의 말을 타고, 남중 특산물인 물소뿔로 만든 수우각궁을 들고 있었다.
가장 독특한 것은 갑옷이었다. 등나무 덩굴을 얽어서 만든 등갑을 입고 있었고, 역시 등나무로 만든 큼직한 방패도 하나씩 등에 지고 있었다.
맹획의 등갑군은 순식간에 강동군 기병대와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지체 없이 수우각궁을 들어 쏘기 시작했다.
퍼퍼퍽!
“으아악!”
강동군 기병대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똑같은 수우각궁을 쓰니 사거리도 같았다. 게다가 등갑군은 이제 막 전장에 도착해서 화살도 넉넉했다.
강동군 지휘관 반장은 앞쪽의 마가군과 뒤쪽의 남만군 사이에서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결론은 뻔했다.
“남만 놈들을 먼저 잡아라!”
물소뿔의 최대 산지가 남중이다. 등갑군은 같은 수우각궁을 쓰기 때문에 사거리의 이점이 없다. 등갑군을 먼저 잡지 않으면 마가군을 상대하다 등갑군의 화살에 치명타를 입을 것이 뻔했다.
“흥. 그렇게 순순히 맞아줄 것 같나.”
맹획은 등갑군을 향해 돌진하는 강동군 기병대를 비웃으며 수신호를 보냈다. 수신호를 받은 등갑군 기병들은 일사불란하게 두 갈래로 갈라지며 강동군의 화살 세례를 피했다.
맹획이 남중에 정착한 지 10년이 넘었다. 맹획은 순식간에 남중을 제패하고, 티베트 말들을 모아서 멀리 원정을 나갈 수 있는 남만 기병대를 육성했다.
언젠가 마초가 남방에서 전쟁을 치르게 되는 날, 힘이 되어 주기 위해서였다.
“목록!”
“알았다니까.”
강동군 기병대가 가까이 다가오자 맹획은 코끼리 부대에 신호를 보냈다. 코끼리 기수 목록은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며 코끼리를 전진시켰다.
부우우우―
코끼리가 긴 울음소리를 내며 적진으로 내달렸다.
말 정도는 아니지만, 코끼리도 충분히 발이 빠르다. 목록이 모는 코끼리는 최정예 보병대를 훨씬 상회하는 속도로 강동군 기병을 향해 쇄도했다.
콰지직!
등갑군을 향해 달려 들어오던 강동군 기병들은 코끼리의 돌격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코끼리의 머리에 받힌 강동군 기병들은 그대로 곤죽이 되어 날아가고, 그 뒤에 있던 기병들은 코끼리의 발에 짓밟히는 형국이 되었다.
“으아아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렸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죽어, 라.”
퍽!
코끼리의 뒤를 따라 달려온 거한, 올돌골은 양손에 창과 도끼를 하나씩 들고 휘둘렀다. 피가 분수처럼 흩뿌려지며 강동군 기병들의 대형이 무너졌다.
코끼리는 운용이 극히 까다롭지만, 제대로 전장에 나서게 되면 한 마리의 위력이 천하 용장이나 다름없다. 올돌골 또한 병사들의 대형을 부수는 실력만큼은 마가군의 오호대장 못지않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움직임을 유기적으로 통제하는 맹획의 지휘 실력. 이는 마초를 따라 수많은 전쟁에 종군하며 옆에서 보고 배운 것들이었다.
“빌어먹을, 원숭이 같은 남중 놈들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군사들을 보자 반장은 이를 부드득 갈며 대도를 꼬나쥐고 적진을 향해 달렸다.
그런 그의 앞을 막아선 것은 등갑기병대를 이끄는 동도나와 아회남이었다.
“헤헤, 강동군 장수인가?”
동도나와 아회남은 큼지막한 등나무 방패를 들고 반장의 양 옆으로 벌려 섰다. 반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깟 놈들과 상대하려는 게 아니다. 맹획을 데려와라!”
“공짜로?”
“이거 완전 도둑놈일세.”
동도나와 아회남은 그렇게 비웃으며 창을 들고 반장을 찔러 갔다.
순식간에 십여 합이 지났다. 2대 1의 대결이지만 반장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오냐, 너희 두 놈의 목을 한꺼번에 베고 맹획에게 달려가 주마!”
반장은 기세 좋게 소리를 지르고 대도를 치켜들었다.
그때, 반장의 앞에 남만 장수 하나가 등장했다. 여위고 거무튀튀한 얼굴을 한, 딱 봐도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 장수였다.
“강동군 장수는… 죽여야…….”
“무슨 헛소리냐?”
한어로 더듬더듬 말하는 장수에게 반장이 소리쳤다.
남만 장수는 병장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달려오는 반장을 향해 팔을 휘둘러, 손에 쥐고 있던 가루를 얼굴에 흩뿌렸다.
“으… 으윽!”
눈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고통이 찾아오자 반장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흘렸다.
독을 쓰는 남만 장수, 타사는 반장이 눈이 먼 것을 보자 또다시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뒤로 빠졌다.
“전부… 죽여야… 해…….”
“이런 제기랄!”
반장은 눈을 감싸 쥔 채 오른손으로 크게 대도를 휘둘렀다.
퍼억!
“우왓!”
반장의 대도는 옆에서 달려들던 아회남의 등패를 그대로 쪼갰다. 하마터면 몸이 쪼개질 뻔한 아회남은 놀라서 급히 옆으로 빠졌다.
“쳇, 역시 우리 상대는 아닌가?”
반장과의 실력 차이를 보자 동도나도 투덜거리며 아회남의 맞은편으로 빠졌다. 반장은 여전히 대도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주변에 사람이 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두두두두.
그런 반장을 향해 말 한 기가 달려 들어왔다.
한인인지, 남만인인지 알 수 없는 화려한 복장을 한 청년.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맹획이었다. 소년 시절 말랐던 몸에는 이제 근육이 붙어서 8척 장신의 장한이 되어 있었다.
스윽.
맹획은 마초의 치란과 똑같이 생긴 5척 장도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반장을 향해 똑바로 달렸다.
“오냐, 내가 바로 반장이다. 남중 애송이 따위가 나와 겨루겠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안 떠지는 눈을 억지로 작게 떠서 맹획의 존재를 확인한 반장이 소리쳤다. 반장은 한 손으로 대도를 단단히 쥐고 달려오는 맹획을 맞이했다.
30장, 20장, 10장.
점점 가까워지던 두 사람의 거리가 드디어 5장까지 좁혀졌을 때, 맹획은 발로 말 배를 걷어차 가속을 붙이며 칼날을 가로로 눕혔다. 반장은 달려오는 맹획을 두 쪽으로 갈라 버릴 생각으로 대도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두 사람의 말머리가 교차하는 순간,
퍽!
하는 파열음이 울렸다. 두 마리 말이 무심하게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스르륵.
거짓말처럼 반장의 목이 아래로 향했다. 목을 완전히 자르지 않고 4분의 3만 잘라서 땅으로 떨어지지는 않고 몸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맹획은 비단 수건을 꺼내 칼날에 묻은 피를 닦으며 짧게 소감을 말했다.
“흥. 누가 네놈과 정정당당하게 겨뤄 준다더냐?”
지도자의 자질.
그것은 자신의 무리를 위해서라면 비겁한 승부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맹획은 무리해서 강동의 맹장 반장과 일대일 승부를 겨루지 않고, 독을 다루는 부하 장수 타사를 이용해 반장의 시력을 먼저 빼앗은 것이다.
“마대 녀석, 이 정도 해 줬으면 알아서 하겠지.”
순식간에 지휘관을 잃은 강동군 수우각궁 기병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맹획의 등갑기병이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강동군은 자신들과 대등한 거리에서 쏘는 화살에 경험이 없었다.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쓰러져 나가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남만병들에게 지지 마라!”
강동군이 남만병에게 붙들려 있는 동안, 마대는 목청껏 군사들을 독려하며 선두에 섰다. 소수의 금철기가 마대의 뒤를 따랐다.
“울어라! 나의 창이여!”
마대는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하면서 강동군 기병을 향해 금마삭을 내질렀다.
콰직!
“컥!”
그러나 인품과 상관없이 무공만은 이미 대성의 경지에 접어든 마대다. 마대의 금마삭이 가는 곳마다 상대 기병들이 쓰러져 나가며 길이 열렸다.
뒤이어 금철기들이 뛰어들었다. 중장갑 때문에 이제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던 금철기들은 등갑군이 만들어 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퍽! 퍽! 퍽! 퍽!
“으아아악!”
일단 접근전이 벌어지자 경무장의 수우각궁 기병들은 그대로 금철기에 쓸려나갔다. 뒤이어 마가군의 강족 기병들이 칼을 빼 들고 뛰어들자 강동군 수우각궁 기병대는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등갑군과 마가군은 사전에 신호를 주고받은 것도 아니면서 호흡이 잘 맞았다.
잠시 후, 양쪽 지휘관인 마대와 맹획이 전장에서 마주쳤다. 10년 만에 만난 두 사람이지만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아직 강릉에 있는 줄 알았더니 제법이구나.”
“흥, 강릉은 진작 떨어뜨렸다. 네가 대장군께 누가 될까 불안해서 빠르게 달려왔지.”
턱.
마대와 맹획은 서로의 창검을 허공에서 한 번 부딪혀서 인사를 끝냈다.
한편.
막상막하의 대치를 이어가고 있는 방덕과 태사자, 마초와 정봉 쪽에도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제기랄…….”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정봉은 입술을 깨물며 마초를 노려봤다.
승기를 잡은 마초는 여유가 있었다.
“빨리 너를 꺾고 저 태사자를 잡아서 돌파구를 찾으려 했는데, 이제 그럴 필요도 없게 됐군. 어떻게 할 테냐? 이대로 계속 싸우면 내가 널 죽여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투항하면 다른 방법이 있지.”
정봉은 잠시 마초를 바라보며 씨근거리다, 이내 결심을 굳히고 눈앞에 칼을 세웠다.
“대장군의 아버지는… 장안의 마 태부라지요?”
“잘 알고 있군.”
“나도 아버지가 있었소. 아버지가 죽지만 않았으면 이런 담로검 따위 배우지 않고, 계속 농사나 지으며 살았을 거요.”
“사연이 있는 게냐.”
“아버지는 병졸로 뽑혀서 북방으로 끌려갔소. 손 장군 휘하의 화병(火兵, 취사병)이었는데, 진국에서 죽었소. 복파장군 마초의 말발굽에 짓밟혔다고 하더군.”
“그러냐. 알았다.”
마초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치란을 들었다.
정봉은 장검을 들어 마초를 겨눴다. 눈에서는 울분으로 인해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으아압!”
비명 같은 기합 소리와 함께 정봉이 출수했다. 방어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상대와 같이 죽겠다는 뜻이 담긴 강맹한 왼손 찌르기였다.
마초는 치란을 서서히 내리며 정봉의 장검을 맞이했다.
그리고 두 칼이 맞닿는 순간, 마가도법 절초 낙일의 수법으로 정봉의 장검을 눌렀다.
콰득!
정봉의 장검이 그대로 땅으로 처박혔다.
하지만 정봉의 몸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예상한 듯, 정봉은 미련 없이 왼손에 쥔 장검을 놓아 버리고 마초에게 달려들었다. 오른손에는 어느새 비수가 들려 있었다.
훗날 천하제일로 불리게 되는 재능이 한순간 개화했다.
퍽!
정봉의 비수가 마초의 가슴에 꽂혔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일격이었다.
“대…대장군!”
주위의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마초는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았다.
“허억, 허억…….”
정봉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초의 가슴에 꽂힌 비수를 움켜잡았다. 눈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마초는 그런 정봉을 향해 덤덤하게 말했다.
“조금 빗나갔구나. 내게 운이 따랐군.”
“제기랄!”
정봉은 고함을 질렀다. 마초의 속내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치명상을 피할 정도로 맞아줬다. 이 자는… 내게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도저히 이길 수 없다.
하늘이 내린 검의 재능을 타고났고, 전설의 담로검을 배웠고,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계략까지 제대로 걸어서 전장에서 상대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이길 수 없다. 마초는 그런 존재였다.
“알겠느냐? 칼로 나를 어떻게 할 방법은 없다. 미련을 버려라.”
“빌어먹을!”
정봉은 그대로 비수를 부여잡고 마초의 가슴을 그어 내리려 했다.
척.
그러나 당연히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초에게 손목을 붙잡히자 정봉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었다. 마초는 손목의 작은 접점을 통해 자유자재로 정봉의 몸을 통제했다.
한 번 크게 힘을 쓰자, 정봉의 몸이 옆으로 쓰러지며 손목과 어깨가 뒤틀렸다.
우드드득.
“끄으윽…….”
관절이 빠지면서도 정봉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어떻게든 다시 손을 뻗어 비수를 집으려고 버둥거렸다.
마초는 그런 정봉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정녕 미련을 떨치지 못하겠느냐.”
“끄윽…….”
“할 수 없구나.”
마초는 그대로 정봉의 팔을 잡은 채, 몸을 크게 돌렸다.
콰직.
“으아아악!”
손목과 어깨뼈가 부러지자 정봉의 입에서도 비명이 터졌다. 긴장한 몸이 마구 힘을 쏟아냈다. 그러나 마초에게 청경의 수법으로 붙잡혀 있으니, 그렇게 쓰는 힘들이 오히려 정봉의 몸으로 되돌아와 몸을 기묘한 각도로 마구 요동치게 만들었다.
마초는 정봉이 무력화된 걸 확인한 다음 팔을 놓았다. 그리고 가슴팍에 박힌 비수를 뽑아냈다. 상처는 깊지 않았다.
“난세가 어찌 네 탓이겠느냐.”
마초는 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정봉을 포박하는 군사들에게 상처를 돌봐줄 것을 지시했다.
전황이 기울었다. 방덕과 대치하던 태사자는 결국 양양성 방면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날의 승리로 마가군은 양양 남쪽의 당양현까지 얻게 되었다.
이로써 양양성에 대한 동, 서, 남, 북 4면 포위망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