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양번 전투 (2)
양양성.
형주목 유표의 통치 아래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해 온, 남방 최대의 도시다.
하지만 지금 양양 일대는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강동군 대도독 주유는 양양성의 성루 위에 올랐다.
발밑으로 한수가 내려다보였다. 한수 너머에는 번성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 강동군의 땅이었으나 이제는 마가군의 땅이 된 곳이다.
“자명. 부디 좋은 곳으로 가거라.”
주유는 소반에 술과 간단한 음식을 올려놓고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여몽을 부르는 목소리가 공허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범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사가 끝난 후.
여범이 주유를 향해 다가왔다.
“주 도독.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여범은 믿을 만한 사내다. 주유는 굳이 감정을 숨기지 않고 쓸쓸하게 웃었다.
“알고 있소. 자명과 함께 짜 놓은 전략이 완전히 어그러졌지요.”
첫 번째 계책은 마초를 번성으로 끌어들인 후, ‘담로’ 정봉의 무위를 활용하여 암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제대로 시도해 보지도 못했다. 마초는 번성이 함락될 때까지 선두에 서지 않았다. 대신 100장 거리에서 성벽을 부술 수 있는 신형 투석기를 가져와서 번성을 함락시켰다.
두 번째 계책은 수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강동 수군은 물 위에서라면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니, 아무리 마초가 상대라도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 계획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범이 말했다.
“설마 수전을 아예 벌이지 않을 줄은 몰랐지요. 육로만으로 양양을 이토록 압박할 줄은 몰랐습니다.”
마초는 철저히 수전을 피하고 육전을 고집했다.
양양 동쪽의 장릉현을 순식간에 함락시키고, 강동과의 최단 거리 교통로를 완전히 장악했다. 육전에서는 강동군이 마가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형주자사부 최고의 맹장이었던 황충 때문입니다. 그자는 단신으로 성을 함락시키는 괴물입니다. 얼마 전 주유평(유평은 주태의 자)을 참살한 것도 모자라서, 장릉현 일대의 아군도 그자의 용맹을 당해 내지 못하고 대패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꼭 황충의 용맹 때문은 아니오. 전투 기록을 살펴보니 상대의 지략이 대단하더군요. 황충의 곁에 형주 출신의 모사가 하나 붙어 있다지요?”
“예. 방통이라는 자입니다.”
“경계하시오. 보통 인물이 아니오.”
방통의 전략은 매우 기발하고, 극히 과감했다. 주유는 적이지만 그런 방통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자의 지략을 내가 빌려 쓸 수 있었다면, 이번 싸움에서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런데 마가군에 먼저 출사해 있다니, 아무래도 내게 운이 따르지 않는 모양이군.’
문제는 또 있었다.
서쪽 방면으로 우회해서 마가군의 보급을 끊는 방안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서쪽 방면에도 이미 마가군의 손길이 뻗쳐 있었다.
한중으로 우회해서 내려온 감녕과 육손이 양양성의 서쪽 평야 지대를 장악한 것이다.
동쪽의 황충과 방통, 서쪽에는 감녕과 육손. 그리고 북쪽의 번성에는 마가군의 본대가 주둔하고 있다.
“마가군은 철저히 수전을 피하는 대신, 육전에서 전부 승리하며 아군을 포위해 오고 있습니다. 이제 남쪽만 장악하면 양양성에 대한 포위망이 완성됩니다.”
“옳은 말이오. 그렇게 되면 적은 다시 한번 태아포라는 무기를 꺼내 들겠지. 성이 포위당하면 우리는 태아포에 대항할 방법이 없소.”
이제 곧 장마가 시작된다.
나무가 습기를 먹는 장마철 동안은 태아포를 운용하기 힘드니, 마초는 장마철이 끝나기 전에 양양성의 남쪽을 장악해 포위망을 완성하려고 할 것이다.
주유는 고개를 들어 남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남쪽이라면 당양현인가.”
당양현 근처에는 당양 벌판이 있다. 기병이 달리기 좋은 땅이다.
황충은 동쪽에, 감녕은 서쪽에 묶여 있다. 그렇다면 당양현은 마가군의 어떤 장수가 공략할 것인가?
“여 선생, 마초는 당양현으로 누구를 보낼 것 같소?”
“방덕, 또는 마초 자신이 갈 것입니다. 어쩌면 둘 다 갈지도 모르지요.”
“내 생각도 그렇소.”
주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세 번째 계획을 실행해야겠군. 태사자를 준비시키시오. 그리고 담로도.”
“알겠습니다.”
여범이 머리를 숙이고 물러갔다.
주유는 나직하게 혼잣말을 했다.
“결국 도박이 되었군. 만약 마초가 오지 않는다면 큰 계책을 작게 쓰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마초가 직접 당양 벌판으로 온다면…….”
한 번 싸움으로 역전이 가능하다.
주유는 한동안 남쪽을 바라보다 성루를 내려왔다.
* * *
마초는 자신이 직접 당양현을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번성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양양성을 포위하는 데 성공하더라도 전투에 참여할 수 없다. 양양과 번성 사이에는 한수가 흐르고 있으니까. 내가 직접 당양현을 떨어뜨리고, 내친김에 양양성 공략을 지휘할 것이다.”
마초가 처음 이렇게 선언했을 때, 법정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마초를 만류했었다.
“재고해 주십시오, 주공. 당양 남쪽의 강릉에도 강동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당양을 공략하시다 강동군의 습격이라도 받으면 어려움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는 강릉까지 밀어 버리면 되지 않나? 게다가 이제 곧 익주의 원군이 도착하면 강릉의 강동군은 그들을 막느라 정신이 없을 걸세. 효직은 너무 걱정하지 말게.”
“하지만 주공.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양현을 지키는 자는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본래 유표 밑에 있던 인물인데, 직위는 비록 현령에 불과하나 문무에 모두 능하고 장재도 뛰어나다고 합니다.”
“아아, 그자 말인가?”
마초는 나관중과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한 후, 법정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자라면 내가 따로 대책을 세워 놓은 게 있지. 내가 서찰 한 통만 보내면 그자는 우리 편으로 돌아설 걸세.”
법정은 마초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자신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더 이상 토를 달지는 않았다.
‘주공의 사람 보는 눈은 틀린 적이 없다. 이번에도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법정의 추측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마초의 서신을 받은 당양현령은 성 밖 50리까지 달려 나와 마초를 맞이했다.
“대장군! 이제야 밝은 주군을 찾았습니다. 소생의 성은 이, 이름은 엄, 자는 정방이라 하며…….”
당양현령 이엄은 마초와 비슷한 30대의 나이에, 화려한 의복으로 멋을 잔뜩 부린 인물이었다. 하얀 얼굴과 강렬한 눈빛, 단단한 근골을 보면 제법 총명하고 믿음직해 보였다.
‘그리고 아주 출세 지향적인 녀석이기도 하지. 높은 관직으로 유혹하면 틀림없이 움직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들어맞았군.’
이엄은 마초가 지난 생에서 알던 인물이다. 익주에서 같이 유비 휘하에 있었는데, 그때도 문무 양쪽에서 모두에게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나중에는 모난 성격을 주체하지 못해서 부정을 저지르고 제갈량에 의해 실각한다고 전해 들었지만, 그 성격을 잘 다룬다면 분명히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인물이었다.
‘좀 건방지긴 하지만 뭐 어때? 법효직 같은 녀석들도 잘 써먹고 있는데.’
이엄은 익주 내부의 반란을 깔끔하게 진압한 무장이며, 제갈량과 함께 촉한의 법전을 완성한 유능한 문관이기도 하다.
그러니 지금 하고 있는 현령직보다 더 큰 자리를 제시해도 괜찮을 것이다. 마초는 이엄을 남군태수, 흥업장군으로 삼기로 했다.
이엄은 뛸 듯이 기뻐했다.
“대장군! 이 이엄, 충성을 다해 대장군을 섬기겠습니다!”
“충성은 됐고 능력을 발휘하라. 그대가 형주에서 일하는 걸 보고, 괜찮으면 중앙으로 부를 테니 그렇게 알라.”
“하하하,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이엄은 강력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마초는 씩 웃으며 말했다.
“좋아. 내가 당양현으로 직접 내려온 이유를 알겠나?”
“짐작하고 있습니다. 대장군께서 당양을 장악하시면, 강릉 방면에서 오는 강동군의 원군을 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양양성을 포위할 수 있지요.”
“잘 알고 있군.”
“그런데 대장군. 강릉의 일은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슨 말인가?”
“강릉에 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흘 전에 그들이 전하기를, 익주에서 한 무리의 군사들이 강릉을 침공해 왔는데 그 기세가 심히 강맹하여 오래 버티기 힘들 것이라 하였습니다.”
마초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빨리도 왔군. 알았네.”
익주 방면의 원군이 벌써 강릉에 도착했다.
마초의 계획대로라면 그들은 며칠 후, 강릉성을 함락시키고 양양성 포위에 합류할 것이다.
어쨌든 이엄의 귀순으로 마초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당양현을 얻었다. 이엄은 마초와 군사들을 당양현성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당양현성이 가까워졌을 무렵.
갑자기 마초가 말을 멈췄다.
“대장군. 무슨 일이십니까?”
이엄은 의아한 표정으로 마초를 바라봤다.
마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몇 걸음 뒤에서 수행하는 방덕도 마찬가지였다.
멀리서 기병대가 달려올 때의 미세한 진동. 기마에 극히 익숙한 무장들만 느낄 수 있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방덕의 지시를 받은 서량 출신 군사들 몇몇이 내려서 땅에 귀를 댔다. 그들의 의견도 같았다.
“아무래도 적의 기병 같습니다.”
잠시 후.
예측이 들어맞았다. 멀리서 흙먼지가 일며 한 무리의 기병대가 나타난 것이다.
방향을 보니 남쪽의 강릉 방향은 아니다. 북쪽의 양양 근처에서 출발한 것처럼 보였다.
“강동군 기병대인가. 주랑이 내가 올 줄 알고 수를 쓴 모양이군.”
마초는 가까워지는 기병대를 보며 씩 웃었다.
당양 벌판은 기병이 달리기 좋은 땅이다. 하물며 지금은 자신은 물론 방덕까지 같이 있었다. 얼마든지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
상대 기병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덥고 습한 남방의 기후에 맞게 가벼운 무장을 한 궁기병대였다.
끼이이익.
어느새 마초의 옆에 선 방덕이 각궁에 화살을 걸고 한껏 당겼다.
“인사를 해 줘야겠군.”
“이런, 첫발에 맞춰 버리면 내가 나설 자리가 없을 텐데.”
상대와의 거리는 130장. 통상 화살 사거리의 세 배에 달한다.
하지만 사수가 방덕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방덕은 이 거리에서도 상대를 맞출 자신이 있었다. 마초도 그걸 알기에 방덕과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상대 기병대의 선두에 선 장수도 같이 말을 멈췄다.
끼이이익.
그 또한 130장 거리에서 화살을 당겼다. 그의 활 또한 방덕의 활에 뒤지지 않는 명품이었다.
탕!
방덕과 상대 장수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화살을 쐈다.
쉬익!
상대 장수의 화살은 130장의 거리를 정확하게 날아와 방덕을 겨눴다. 방덕은 몸을 크게 틀어 상대의 화살을 피했다. 그렇게 피하지 않았으면 몸통에 명중했을 만큼 조준이 정확했다. 신궁이라 불려도 될 만한 솜씨였다.
한편, 상대 장수도 한껏 몸을 틀어서 방덕의 화살을 피했다. 활 솜씨뿐만 아니라 몸놀림도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보통 장수가 아니군.”
서로의 솜씨를 확인한 두 사람은 신중한 태도로 서로에게 다가갔다. 먼 거리에서는 서로가 화살을 보고 피할 수 있기에 좀 더 가까운 거리로 접근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상대 장수와 방덕의 거리가 100장까지 줄어들었을 때, 상대 장수의 뒤를 따르던 궁기병들이 일제히 화살을 겨눴다.
“설마, 이 거리에서?”
마초도 적잖이 놀랐다. 그러나 강동군 기병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100장의 거리에서 활을 당겼다.
휘이이잉.
보통의 화살이라면 닿지도 못할 만한 거리다. 그러나 강동군 기병대의 첫 번째 사격은 마가군 1열 근처까지 도달했다. 비록 거리가 멀어서 큰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마가군 병사들 몇몇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게 보일 정도였다.
강동군 기병들이 들고 있는 활은 보통 활이 아니었다. 남방에서만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활 재료, 물소의 뿔로 만든 수우각궁이라 사거리가 통상의 두 배에 달하는 것이다.
타앙!
그 사이 방덕과 상대 장수는 서로 두 번째 화살을 당겼다.
이번에도 결과는 비슷했다. 방덕의 화살도, 상대 장수의 화살도 아슬아슬하게 서로의 몸을 스쳤다.
긴 사거리를 가진 명품 활로 무장한 기병대.
그리고 그 기병대의 선두에 서 있는, 신궁이라 불릴 만한 활솜씨를 가진 적장.
생각보다 어려운 싸움이 될 것처럼 보였다. 방덕은 상황을 파악하고 씩 웃었다.
“오랜만에 즐거운 싸움이 되겠군.”
방덕은 수신호를 통해 마가군 궁기병들에게 지시를 내린 후, 적장을 향해 단기로 달려 나갔다.
수우각궁을 든 적장, 태사자도 지지 않고 방덕을 향해 달려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