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균열
황궁.
천자 유협은 늦은 밤까지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폐하. 대장군 들었사옵니다. 급한 공무로 알현을 청한다 하옵니다.”
환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는 전후 사정을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유협은 긴 한숨을 토했다.
“알았다. 밤이 늦었으니 대전에 불을 밝히지 마라.”
“하오면…….”
“서고에서 보겠다.”
유협은 자신의 개인 서고로 발길을 향했다.
천자의 개인 서고지만 별다른 대단한 서책이 있지는 않았다. 대장군부에서 활판 인쇄술로 찍어내는 서책의 초판본들만 잔뜩 쌓여 있었다.
잠시 후, 마초가 들어왔다.
“강녕하셨습니까.”
마초는 처음 들어오는 순간부터 표정으로 여러 가지를 말하고 있었다. 유협은 그 표정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 짐은 강녕하지만, 대장군은 강녕하지 못한 것 같소.”
“폐하.”
마초는 뜸을 들이지 않았다.
“방금 동 국구를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그렇구려.”
“의대 안에 숨기신 밀조도 확인했습니다.”
“이 밤중에 찾아온 것을 보면 그랬을 거라 생각했소.”
“왜 신을 주살하라 하셨습니까.”
곤란한 질문이다.
유협은 대답하기에 앞서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짐이 비록 배움은 얕으나, 이곳에 있는 고금의 서책에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소. 충신들의 이야기, 그리고 군주의 이야기…….”
“신의 말에 대답하십시오. 왜 신을 주살하라 하셨습니까.”
마초는 유협의 말을 길게 듣고 싶지 않았다.
유협은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대장군께서는 같이 난세를 끝내자고 한 맹세를 기억하시오?”
“물론입니다. 아니, 신이 말하고 싶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날의 맹세를 잊으셨습니까.”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194년 6월의 어느 날이다. 그날은 곽사가 죽은 날이기도 하다. 곽사의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마초와 유협은 독대했다.
그리고 서로의 죽은 형제를 두고, 함께 난세를 끝낼 것을 맹세했다.
“짐은 맹세를 잊지 않았소.”
“하면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이셨습니까.”
“대장군. 난세의 끝에는 뭐가 있다고 생각하시오?”
마초가 잠시 대답할 말을 찾는 사이, 유협은 서고의 한쪽에 모아 놓은 서류 더미 사이로 다가갔다. 그리고 묵직한 문진으로 눌러 놓은 서류 더미를 마초의 앞으로 가져왔다.
“이것은…….”
“상소문이오. 내용은 대동소이한데, 대장군을 양왕(凉王)으로 봉하고 서량과 관중을 분봉하여 공을 치하하라는 것이오. 차이점은 왕작의 이름을 진왕(秦王)이나 양왕(梁王)으로 하라는 정도요.”
“폐하. 그 문제에 대해서는 신이 분명히 입장을 말씀드렸습니다. 유씨가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고조의 뜻입니다. 조조가 그 문제를 무시하다 나라에 변이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렇게 많은 이들이 대장군이 왕이 되기를 바라겠소?”
유협은 씁쓸하게 웃었다.
마초는 상소문 한 장을 붙들고 구기며 말했다.
“이들은 신의 충직한 수하가 아닙니다. 아니, 이들은 권력을 찾아 헤매는 파리떼 같은 자들에 불과합니다.”
“조정에는 그런 파리떼가 대부분이오. 대장군을 따르는 이들이 참된 선비들이라 한들, 그들은 스무 명이나 서른 명에 불과하오. 나머지 수백 명은 이런 자들로 이루어져 있소이다. 이건 어느 시대나, 어느 조정이나 마찬가지일 것이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유협이 다시 침묵을 깼다.
“대장군. 한이 살아 있는 한 난세는 끝나지 않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광무제께서 한의 사직을 다시 세우신 지 200년. 그동안 천하는 점점 혼란스럽게 변해 갔소. 환관과 외척의 싸움이 그치지 않았고, 백성의 땅이 줄어드는 만큼 호족의 땅은 늘어났소. 세수는 항상 부족한데, 호족의 손을 빌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소.”
“폐하. 그것을 끝내기 위해 신이 개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대장군도 늙겠지. 대장군이 없는 조정에 누가 있어 그 개혁을 이어 가겠소? 그들이 복종할 만한 이는 혈연으로 이어진 대장군의 후계자뿐이오. 대장군의 장남과 차남이 모두 총명하다지요? 한데, 대장군의 가문이 대를 이어 집권하면, 그것이 한의 사직이겠소?”
과거제.
난세 이전과 같은 조세 부과.
가도와 수로 건설에 투입하는 막대한 지출.
그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소금 광산의 국가 전매.
마초가 시행하는 정책들은 이미 호족들의 반발을 사고 있었다. 그러나 마초는 새로운 문물을 통한 경제 발전이라는 당근을 끊임없이 던지며, 군부의 최고 실력자라는 채찍을 보여주기 때문에 다들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대장군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을 것이오. 한의 황권은 현실적으로 바로 서기 어렵소. 이미 천하 사람들은 대장군을 지존으로 여기고 있소. 다만 대장군에게는 천자라는 권위가 없으니, 대장군이 물러나면 다시 난세가 열릴 것이오.”
“폐하.”
“짐에게 남은 길이 무엇이 있겠소? 이름뿐인 천자로서 서서히 병들어 가는 나라를 바라보다 늙어 죽거나, 아니면 대장군에게 보위를 넘기고 폐주가 되거나.”
유협은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그도 저도 아니면, 황권을 휘두르는 진짜 군주가 되기 위해 대장군을 배신하거나. 그 정도였소. 선황께서는… 돌아가신 형님은, 어린 짐에게 폐주가 되지 말라 하였소. 짐은 형님의 말을 어길 수 없었소. 그래서 대장군을 배신하였소.”
마초는 말이 없었다.
유협이 초조해질 만큼 시간이 지난 후, 마초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폐주가 되지 않겠다.”
“짐에게는 중요한 일이오.”
“고작 그런 이유로 신을 주살하려 하였습니까.”
마초의 눈에 분노가 떠올랐다.
“선황의 유지를 말씀하시니 신도 신의 아우와 나눈 맹세를 말씀드리지요. 죽은 아우는 난세를 끝내고, 권신이 되지 않고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한의 사직을 지켜야 난세를 막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꿈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하면, 십 분의 일의 군사로 이각과 곽사에게 도전해서 이긴 것은 꿈같은 일이 아닙니까? 개봉 벌판에서 원소의 이십만 대군을 패주시킨 것은 어떻습니까? 여섯 장수를 베고 조조군을 깨뜨린 것은 어떻습니까? 폐허가 된 관중을 재건하고, 쑥대밭이 된 중원을 다시 옥토로 만든 것은 어떻습니까?”
마초는 격렬하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유협은 묵묵히 듣고 있었다.
“폐하. 신은 언제나 꿈같은 일들을 현실로 이뤄 왔습니다.”
“지당한 말이오.”
“난세를 끝낸 뒤, 용상을 욕심내지 않고 돌아가는 일, 그까짓 것을 신이 못 할 것 같습니까?”
“대장군. 지금 한 말을 찬찬히 생각해 보시오.”
“무얼 말입니까?”
“그런 꿈같은 일들을 이룰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진정 용상에 어울리는 자는 그 자가 아니겠소?”
“폐하!”
“나도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소!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누가 봐도, 천자의 자리에는 그대가 더 어울리는 것을!”
유협의 말도 격렬해졌다. 유협은 마치 평범한 청년 같은 말투로 자신의 격정을 쏟아냈다.
“대장군, 이제 어쩌시겠소? 이제 명분도 얻었으니, 나를 폐하고 천자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오.”
마초는 유협에게 다가갔다.
콱.
그리고 유협의 옷깃을 잡아 틀어쥐고,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폐하. 명심하십시오. 신은 역적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무슨 말이오?”
“신에게는 가족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역적으로 몰리면… 가족이 다 죽습니다.”
마초는 타는 듯한 눈으로 유협을 쏘아보며 말했다.
“신을 죽이고 싶으면 암살을 꾸미십시오. 자객이 백 명이든, 천 명이든 상대할 것입니다. 그러다 혼자 죽게 되면 기꺼이 죽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적 몰이는 안 됩니다. 다시는 그런 일을 꾸며서 신의 가족을 위태롭게 하지 마십시오.”
만약 다시 그런 일을 꾸민다면…….
마초는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의도는 유협에게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스윽.
마초는 유협의 옷깃을 놓았다. 유협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대장군은 이제 어찌할 셈이오?”
“권신이 될 것입니다.”
“권신이라.”
“이번 일은, 의대조 사건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우리의 가는 길이 달라졌으니, 나는 이제부터 나 자신의 방법으로 한을 통째로 바꿔서, 난세를 끝낼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나를 방해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마초는 천자 유협에게서 등을 돌렸다.
“나는 적당한 시기가 오면 서량으로 돌아가 늙어 죽을 것이니 그렇게 아십시오.”
마초는 남색 비단옷을 크게 휘날리며 걸어 나갔다.
천자 유협은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차라리… 거사를 일으켰다 실패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으면 마초가 유협을 폐하고 황위에 오를 훌륭한 명분이 되었을 것이다.
힘없는 천자가 천하제일의 영웅을 토사구팽하려다 실패하는 그림이 되었으면, 마초의 집권에 부정적인 인사들도 마초의 황위 등극에 크게 반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만약 거사가 성공했다면?
“용상은 계속 지킬 수 있었겠지. 단지… 그것뿐인가.”
전쟁 영웅이자 명재상으로, 엄청난 명성을 갖고 있는 마초.
그런 마초에게 난세를 끝낸 후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는 말을 남겼던, 마초의 죽은 아우 마휴.
아무 실권도 없는 황제 유협.
그런 유협에게 폐주가 되지 말라는 말을 남겼던, 선대 황제 유변.
폐주가 되지 않기 위해 마초를 먼저 치려던 계획은 실패했다.
유협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는 앞이 보이지 않았다.
* * *
대장군부.
마가군의 수뇌부에 해당하는 인사들은 아침부터 이곳에 모여 있었다. 순유, 서황, 가후, 황권, 감녕, 이감, 그리고 나관중이었다.
양양성 함락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양양은 천혜의 요새입니다. 단시간 내에 함락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양양에 입성한 주유는 강동군 최고의 무장이지요. 군사를 부리는 솜씨가 죽은 손책 이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강동군은 한수를 통해 무한정으로 보급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에게는 수군이 부족합니다.”
“단기간에 끝날 전쟁이 아닙니다. 먼저 상장을 하나 뽑아서…….”
순유, 서황, 가후, 황권.
중신들의 의견이 전부 일치했다. 상장을 하나 뽑아서 양양에 진을 친 후 장기전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 상장으로는 역시 서황이 가장 먼저 거론되었다.
저벅. 저벅.
그때, 발소리와 함께 마초가 들어왔다. 밤새 잠을 못 이룬 탓에 눈가에 피로가 가득했다.
“무슨 논의들을 하고 있는가.”
“양양에 대한 건입니다. 아무래도 상황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내년, 내후년까지 장기전을 치를 생각을 하고 계획을 짜야 할 것입니다.”
“그런가. 한창 논의하는데 미안하게 됐군.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탁.
마초는 손바닥으로 탁상을 쳤다.
“출진은 한 달 후. 총대장은 나다. 방영명과 법효직이 함께 갈 것이니, 장안에도 사람을 보내라.”
오랜만에 전장에 나가는 것을 결의하자 마초의 눈에 힘이 돌아왔다.
마초는 그대로 좌중을 돌아보며 선언했다.
“장기전은 없다. 가을이 오기 전에 양양성을 부수고, 주유의 목을 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