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208년 봄 (2)
그날 밤.
격구 시합을 한 태학생들은 주루 한 곳을 빌려 술판을 벌였다. 술값을 대는 것은 태학박사 손권이었다.
“으하하하! 마셔라! 마셔! 술 잘 마시는 놈이 격구도 잘하고 학문도 잘하는 법이다!”
손권은 낮에는 뛰어난 신진 학자이며 격구의 달인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밤에는 낙양 제일의 주호로도 유명세를 떨치고 있었다.
매일 밤 막대한 술값을 지출하는 손권이지만, 이상하게 주머니에서는 돈이 마르지 않았다. 그는 강동의 지배자 손익의 형이니, 사람들은 그가 강동군에서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래서 돈이 많은 건 알겠는데, 저 꼬락서니는 너무 한심하지 않은가?”
“그러게 말이야. 아우는 피 흘려 가며 형의 공업을 이어 가는데, 둘째라는 자는 그 돈으로 매일 밤 기생을 끼고 술이나 축내고 있으니…….”
“게다가 손권의 뒷배가 되어 주는 대장군은… 자기 형의 원수 아닌가?”
낙양의 호사가들은 모두 손권을 한심하게 여겼다.
이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권은 그날도 술에 만취해서 기녀들을 껴안고 있었다.
“역시 우리 모란이가 천하제일이지!”
“아이, 손 대인!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으하하!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한동안 떠들썩하게 놀던 손권은 변소에 간다는 핑계로 잠시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는 눈에 띄지 않는 외모를 한 사내가 한 명 서 있었다.
그의 정체는 장군 오자란. 손권에게 포섭된 황궁의 무장이었다.
손권은 만취한 척 비틀거리며 바위 위에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옆에 있는 오자란에게 말을 걸었다.
“슬슬 주공근이 움직일 때가 되지 않았나?”
“오늘 역참을 통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주 도독이 양양성을 얻었다고 합니다.”
“하, 더럽게 빠르군.”
오자란의 말을 들은 손권은 피식 웃어 버렸다.
주유의 형주 공략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
그리고 그 소식이 낙양까지 전해지는 속도도 엄청나게 빠르다. 이는 마초가 지난 5년간 정비한 역참제 때문이었다. 역참제는 나관중의 건의로 원나라의 제도를 본따 시행한 정책이었는데, 두 사람의 내막을 모르는 손권이 그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좋아. 이제 우리가 움직일 차례로군. 동 국구에게 연통을 넣게.”
주유를 대적하기 위해서는 마초가 직접 양양으로 내려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초가 낙양을 비웠을 때, 반 마가군 성향의 무관인 국구 동승과 연합하여 낙양을 장악한다.
손권이 수년간 주정뱅이 흉내를 내며 준비해 온 계획이었다.
그런데 오자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이공자. 일이 꼬였습니다.”
“무슨 말인가?”
“주 도독의 형주 공략 사실이 전해지기 직전, 동 국구에게 성상의 밀조가 내려진 것 같습니다.”
천자 유협이 동승에게 비밀리에 조서를 내렸다.
손권은 인상을 찌푸렸다.
“밀조의 내용은?”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허나, 비밀리에 조서를 내렸다면 그 내용은 뻔하지 않겠습니까.”
동승은 천자의 후궁인 동 귀인의 아버지다. 그래서 천자의 장인, 국구라 불리고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조정의 거기장군이기도 했다. 마가군이 장악한 조정이기에 세력은 대단치 않았지만, 그래도 마초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수천 명의 병력을 당장 동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천자가 외척인 무장에게 비밀리에 조서를 내렸다면, 그 안에 무슨 내용이 담겨 있을 것인가?
“빌어먹을. 다 된 일에 천자가 끼어들어 망치게 생겼군.”
손권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오자란이 그런 손권을 달랬다.
“아직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릅니다. 밀지의 내용이 우리의 생각과 다를 수도 있고, 마 대장군이 밀지를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상황이 위험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공자께서는 일단 장안으로 몸을 피하십시오. 낙양의 정세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이공자의 도움이 필요해지면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오자란, 자네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일입니다. 누군가는 낙양에서 상황을 지켜봐야 하니 제가 하겠습니다. 상황이 잘 돌아가면 이공자에게 사람을 보내 낙양으로 모시겠습니다. 만약 일이 여의치 않으면…….”
오자란은 숨을 들이켰다.
“동 국구와 함께 죽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공자께서는 더 훗날을 기약하십시오.”
* * *
대장군부.
마초는 시랑군 대장 이감과 독대하고 있었다.
“손중모(중모는 손권의 자)가 오자란을 만났다고?”
“그렇습니다. 벌써 여섯 번째입니다. 그저 같은 주루에 드나드는 까닭으로 생각하기에는 석연치 않습니다.”
이감의 보고를 들은 마초는 턱을 괴고 고민에 빠졌다.
‘그 정도라면 오자란과 없던 친분도 생겼을 터. 하지만 손권과 오자란은 낮에는 전혀 만나지 않는다.’
게다가 오자란이 고급 주루에 드나드는 것도 수상했다.
손권은 강동산 향신료와 대모갑을 밀매해서 많은 돈을 벌고 있었다. 그 정도는 눈감아줄 만한 범위 내였다. 아니, 그가 그렇게 낙양에서 적당히 귀족적인 생활을 누리며 타락하는 것이야말로 마초가 바라는 바였다.
하지만 오자란은 그저 평범한 무관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관중의 하급 군관으로 전란에 휩쓸려 죽었고, 그 자신은 검술 실력으로 황궁 무관까지 출세했지만, 딱히 전공을 세운 적은 없다. 그러니 그렇게 많은 돈이 있을 리 없었다.
‘뭔가 있다.’
마초는 이감의 시랑군을 통해 위험인물 몇몇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번 보고도 시랑군에서 올라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위험인물은 손권뿐만이 아니었다. 오자란도 위험인물이었던 것이다.
“다른 이들의 동향은 어떤가?”
“왕자복, 충집, 오석은 아직 별다른 동향이 없습니다.”
“국구 동승은?”
마초가 묻자 이감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성상께서 동승에게 비밀리에 의대를 하사하셨습니다. 어제의 일입니다.”
“하하.”
마초는 헛웃음을 지었다.
“알았네. 나가 보게.”
이감이 물러간 후, 마초는 자리에 앉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원래의 역사에서, 천자 유협은 동승에게 의대 안에 숨긴 밀조를 내려 조조 암살을 시도한다. 왕자복, 충집, 오자란, 오석은 그 당시 동승과 같이 거병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바뀐 역사에서도 의대가 내려왔다. 만약 그 의대 안에 밀조가 숨어 있다면, 이번에는 조조가 아닌 다른 인물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인가.”
마초는 너울거리는 호롱불을 가만히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이 각의 시간이 지난 후.
마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동승의 집은 황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집은 꼭 주인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처럼, 천자의 장인이 사는 곳치고는 소박했다.
“대장군께서 이 밤중에 어인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동승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마초를 맞았다.
“국구께서 좋은 의대를 하나 얻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마초는 얼굴에서 고민의 흔적을 숨길 수 없었다. 퀭한 눈과 거뭇한 눈자위를 보자 동승은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보시다시피 동모는 재물을 다루는 게 시원찮아 살림이 누추합니다. 대장군께 보여드릴 만한 의대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국구. 나는 어제 성상께서 내려주신 의대를 보러 왔습니다.”
아무리 봐도 뭔가 잘못되고 있다.
그러나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동승은 어쩔 수 없이 벽장에서 천자 유협이 하사한 의대를 꺼냈다.
그저 옷(衣)과 허리띠(帶)였다. 좋은 비단에 아름다운 수가 놓여 있었는데, 이는 천자가 자기 첩의 아버지에게 선물하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다. 별다른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가만히 의대를 들여다보던 마초는 별안간 호롱불을 집어 들었다.
“아니, 대장군!”
치이이익.
마초는 호롱불의 불꽃으로 천자가 하사한 허리띠에 구멍을 냈다. 동승은 대경실색해서 말리려 했지만, 마초의 손놀림이 더 빨랐다.
잠시 후.
마초는 구멍 난 허리띠에서 문서 한 장을 끄집어냈다. 천자의 옥새가 찍혀 있는 조서였다.
“하하하.”
마초는 낮게 웃었다. 웃음소리에 허탈함이 짙게 배어 나왔다.
“목숨을 걸고 천하를 위해 싸운 대가가 겨우 이것인가.”
마초는 의대 안에 든 밀조를 굳이 읽어보려 하지도 않았다.
천자 유협은 원래의 역사에서 했던 행동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그러니 저 밀조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을지도 뻔했다.
“국구께서 한 번 읽어보시오.”
마초는 동승의 앞에 밀조를 내던졌다.
사태를 직감한 동승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어쨌든 밀조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는 확인해야 했다. 동승은 밀조와 마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시선을 밀조 쪽으로 가져갔다.
“아… 아니!”
[대장군 마초를 주살하라.]
밀조를 읽은 동승의 손이 떨렸다.
‘이게 정녕 성상의 뜻이란 말인가?’
천자의 밀조를 받은 이상, 동승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뿐이다.
이대로 마초의 편에 서거나, 아니면 천자의 명을 받들거나.
마초는 옆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또한 큰 충격을 받은 듯, 시선이 공허해 보였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철컥.
동승은 탁상 옆에 기대 둔 칼을 쥐었다. 그리고 마초를 향해 뽑았다.
“이 늙은이를 용서하십시오, 대장군.”
마초의 무공은 천하제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비무장이다.
마초가 청경과 촌경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동승 또한 일신의 무예에는 자신이 있었다. 상대가 천하제일인이라도, 비무장이라면 동귀어진할 자신은 있었다.
슈욱!
동승의 칼날이 날아들었다. 마초는 공허한 눈으로 칼날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퍽!
칼날이 무언가에 걸리는 소리가 났다.
마초가 두 손가락으로 떨어지는 칼날을 잡아낸 것이다.
“큭!”
동승은 이를 악물고 몸을 비틀며 힘을 썼다. 그러나 마초의 손가락 사이에 걸린 칼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노고수 동승조차 한 번도 보지 못한, 달인의 경지조차 뛰어넘은 청경이었다. 마초는 두 손가락의 작은 접촉면을 통해 칼을, 그리고 칼을 쥐고 있는 동승의 몸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마초는 몸을 일으키고 칼날을 내리눌렀다. 그러자 놀라움을 참지 못한 동승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윽!”
끼이이익.
강철로 된 칼날이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마초는 동승이 쓰는 힘을 그대로 흘리고 있었다. 그러자 칼날이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쨍그랑.
마초는 경악한 동승에게서 구부러진 칼을 빼앗아 옆으로 던졌다. 동승은 더 이상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대로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마초가 입을 열자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동 국구. 이 밀조를 본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소?”
동승은 간신히 힘을 쥐어 짜내 고개를 저었다.
“이 늙은이도 방금 알았습니다. 허리띠 속에 밀조가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그런가.”
마초는 옷자락을 떨치며 동승에게서 돌아섰다.
“이 일이 새어 나가서는 아니 되오. 그랬다가는 나와 성상 중 한 명은 파국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오.”
마초와 유협.
둘 중의 하나는 파국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파국을 맞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허허허허.”
동승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허탈하게 웃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이 늙은이가 너무 오래 살았지요. 사내가 난세에 육십을 넘게 살았으면 무슨 여한이 있겠습니까. 묘시가 되기 전에 마무리할 테니 대장군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침이 오기 전에 자결할 것을 약속하는 동승.
“잘 가시오.”
짧은 인사를 남기고 저택을 나오는 마초.
봄이지만 밤에는 날씨가 쌀쌀했다. 마초는 품속으로 파고드는 찬바람을 느끼며 수하들에게 말했다.
“황궁으로 가자.”
아직 밤이 끝나지 않았다.
오늘 밤이 지나기 전, 천자 유협과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