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268화 (255/306)

268화. 연왕, 북으로

유주, 그러니까 옛 연나라 땅의 정세는 복잡하다.

먼저 원소군의 잔당을 수습한 원소의 삼남 원상이 있다.

북쪽 오환산 일대에는 오환족의 무리가 세력을 떨치고 있다.

동쪽의 요동반도에는 요동태수 공손도가 거대한 세력을 일구고 있었다.

“하지만 낙양에서 유주까지 원정을 가기에는 너무 멀지요. 지금이야말로 변경의 치안을 유지하고, 천자를 대신해 민생을 위무하는 제후왕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마초는 그렇게 유비를 제후왕으로 천거한 배경을 설명했다.

노숙이 반문했다.

“하지만 그 말씀대로라면 군왕(郡王)으로 충분할 터. 광양왕이나 상곡왕이 아닌 연왕이라는 건 납득이 가지 않는군요. 잠시 위왕을 참칭했던 조조를 제외하면, 일자왕(一字王)은 지난 300년간 없었습니다.”

“그것은 고조께서 유씨가 아닌 자는 왕으로 삼지 말라고 교시를 내렸기 때문이고, 또 오초칠국의 난으로 종친들끼리 싸움을 벌였기 때문이오. 유 황숙께서는 성상의 숙부가 되시니 고조의 뜻에도 어긋나지 않고, 종친으로서 군사를 내어 성상의 어려움을 앞장서서 구했으니, 일자왕이 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소?”

말은 맞는 말이다.

노숙을 비롯한 유비의 수하들이 반신반의하는 이유는 연왕이라는 작위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유비는 이제 탁군에 왕부를 열 것이다. 면류관을 쓴 채 즉위식을 치르고,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고, 그 세자에게 옛 연나라 땅을 물려줄 것이다. 유비를 따르는 이들은 이제 국상(國相)이나 상장군(上將軍) 같은, 연나라의 관직을 받을 것이다.

독립 왕국이나 다름없는 정도가 아니라 독립 왕국이다. 유비는 그 왕국의 왕이 된 것이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유주가 그렇게 만만한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유주에는 갖가지 무장 세력들이 난립하고 있다. 보통의 군웅이라면 버텨내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유비에게는 관우와 장비가 있지 않은가?

유비군의 중신들도 슬슬 현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먼저 간옹이 유비의 앞에 몸을 던지며 흐느껴 울었다.

“현덕 형! 우리가 이날을 보려고 그렇게 풍찬노숙을 했나 보오!”

그다음은 손건이었다.

“사군, 아니 왕야(王爷). 이는 틀림없이 왕야께서 서주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에 하늘이 응답한 것입니다.”

어느새 술이 깬 위연도 유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원상이든, 공손도든 맡겨만 주십시오. 소장이 전부 집어삼키겠나이다!”

다른 군웅 휘하의 인물들에 비해, 유비군의 중신들은 유독 고생을 많이 했다.

그렇게 고생한 끝에 유비를 왕으로 만든 것이다. 유비의 손을 맞잡고 축하를 건네는 중신들의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얼떨떨하게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비는 뭔가 깨닫게 되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구나.’

당장 이만큼의 보상이 눈앞에 있는데, 어떤 명분이 있어서 이들을 다시 싸움의 길로 내몰 것인가?

유비는 자신의 사람들을 얼싸안고 크게 소리쳤다.

“그래, 이 사람들아! 가자! 가서 왕부를 열자. 나는 연나라의 왕이 되고, 그대들은 연의 공신이 되어 백 살까지 누려 보자고!”

20년간 죽음의 고비를 넘긴 게 몇 번인가.

이 정도면 적당히 꿈을 이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 * *

결국 그날의 술자리는 엉망진창이 되었다.

글을 쓰기 위해 유비군의 이야기를 취재하던 왕찬은 인사불성이 되었다. 조운도 이날만은 크게 취했다. 마대는 일 각도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마철이 의외로 잘 버텼으나, 관우와 장비조차 만취하는 판국에 마철이 버티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새벽까지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건 단 두 사람.

일부러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은 마초.

그리고 탁군 시절부터 천하제일의 주호라고 불리던 유비, 둘 뿐이었다.

“왕야께서는 술을 참 잘 드십니다.”

유비는 혼자 후원에 나와 술병을 들고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초는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예전에 탁군에서 두 분 아우님들과 형제의 의를 맺을 때, 술로 위아래를 결정했다고요?”

“아아. 비슷한데 좀 다르군요. 소문이 와전됐나 봅니다.”

“그런가요? 그러면 진실이 뭡니까?”

마초도 이 주제에만은 순수한 호기심을 보였다. 유비는 마초를 보며 씩 웃었다.

“탁군에서 처음 거병할 때는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사이였습니다. 형제의 의를 맺은 건 그러니까…안희현 현위로 있을 때였지요.”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독우라는 놈이 방자하게 굴기에 벼슬을 던질 생각으로 두들겨 패 줬습니다. 운장과 익덕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힘으로라도 막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요?”

“큰 놈들이 힘으로 하겠다는 건 비겁하니까 술로 결정하자고 했지요. 둘이 같이 덤비라고 해서 혼쭐을 내줬습니다. 그때부터 형 대접을 받기 시작했지요.”

“아니, 그러면…….”

마초는 기가 막혔다.

유비는 관우, 장비와 2대 1로 술 대결을 해서 이겼다는 것이다.

“무공은 나와 관운장, 장익덕 중 누가 천하제일인지 말이 분분합니다만, 주량은 논쟁할 필요도 없겠군요. 왕야께서 천하제일이십니다. 아니, 어쩌면 고금제일일지도 모르지요.”

유비는 크게 웃고 손에 쥔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는 독한 소주를 병째 마시면서도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곧 북쪽으로 가면 이 소주도 구하기 어렵겠군요.”

“내가 때마다 보내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난 따뜻한 남쪽이 좋은데.”

“남쪽에 아는 사람도 없으면서 뭘 하려고요? 그냥 고향에 돌아가서 떵떵거리며 사십시오.”

“대장군. 유주는 배고픈 곳입니다.”

“왕야는 배가 고프겠지요. 하지만 수하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겁니다.”

마초와 유비는 뼈 있는 말을 몇 마디 주고받았다.

유비는 피식 웃어 버렸다.

“유주 땅에서는 천하를 노릴 수 없습니다.”

“조정에 내가 있는데, 왕야께서 천하를 노릴 일이 뭐가 있습니까.”

“만약 대장군이 역심을 품으면?”

“그때는 연나라 땅에서 한의 사직이 이어지겠지요.”

“하하하하.”

술의 힘일까.

마초와 유비는 굳이 속내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대장군. 나도 마흔이 넘었습니다. 내게 남은 시간은 이제 길어야 20년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반면 대장군에게는 30년이 넘는 시간이 남아 있지요. 내가 기력이 쇠한 뒤, 천하를 집어삼키기에 충분한 세월입니다.”

“내가 그리할 거라 보십니까?”

“나는 형주를 얻고 싶었습니다.”

유비는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형주를 얻으면 남쪽에 또 하나의 천하를 만들 수 있습니다. 형주와 익주도 좋고, 형주와 강동도 좋지요. 그렇게 남쪽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천하를 노리는 자에게나 기회일 뿐이지요.”

“그렇지요. 이제 유주로 가면 천하는 다시 노릴 수 없겠지만…….”

환한 보름달이 떠 있었다. 달 속에 지금까지 자신을 따라온 이들의 모습이 스쳐 갔다.

관우, 장비, 노숙, 간옹, 손건, 미축, 진도, 위연.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대형은 될 수 있겠지요. 좋습니다. 내 그걸로 만족하겠습니다.”

유비는 그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오갈 데 없는 몸이 대장군 덕에 의지할 곳을 얻었습니다. 이제 왕작까지 얻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대장군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 비는 북쪽 땅에서 대장군의 은혜를 뼈에 새기고 살아가겠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다시 만날 일이 없기를.

유비는 뒷말을 삼킨 채 자리를 떴다.

마초는 유비의 뒷모습에서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 * *

마초가 회귀한 것이 193년.

미오성의 맹세와 장안 탈출이 194년.

개봉대전에서 승리하고 여포를 쓰러뜨린 것이 198년.

조조가 죽고, 유비가 연왕이 되어 북쪽으로 떠난 것이 203년의 일이다.

193년부터 203년까지 10년간, 중원에는 매해 전란이 있었다.

“하지만 지난 5년간은 중원이 평화로웠지. 아니, 천하가 평화로웠다네.”

208년 봄, 형주 양양성.

형주목 유표는 침상에 누운 채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맞고 있었다.

“전부 마 대장군 덕분이지요.”

“그렇지. 이 형주에도 대장군 덕에 큰 전란이 없었네. 그가 장사를 둘러싼 분쟁을 중재하고 간 이후로, 나도 더 이상 전쟁을 벌일 수 없게 되었고, 그대들도 우리 형주를 침탈할 생각을 하지 못했었으니까.”

유표의 앞에는 긴 머리를 늘어뜨린 사내가 서 있었다.

사내는 보는 이의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의 미남이었다. 원래부터 미남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외모다. 이제 서른을 넘기며 이목구비가 더 뚜렷해져 있었다.

강동군 대도독, 주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기습으로 순식간에 양양성을 떨어뜨린 사내의 이름이었다.

“주 도독. 이 늙은이가 하나 물어보세. 만약 작년에 내가 죽었다면, 이렇게 쳐들어올 수 있었겠나?”

유표의 물음에 주유는 두 손을 모으고 답했다.

“어려웠을 것입니다. 작년에는 강동에서 산월족의 반란이 있었고, 전선의 건조도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르신께서 일 년 전에 돌아가셨다면 양양성을 노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허허, 그런가. 이 늙은이가 너무 오래 살았군.”

유표는 허탈하게 웃었다.

“어르신께는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두 분 아드님께는 전혀 누를 끼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주를 병탄해서 무엇을 할 셈인가. 이제 와서 천하라도 노릴 셈인가.”

“그건 어렵습니다. 제가 관우나 장비를 부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겠지만, 관우와 장비는 지금 북방에서 이민족들과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관우와 장비를 부린다면 진짜로 천하를 넘볼 자신이 있다는 걸까?

유표는 주유가 내비치는 자신감이 허무맹랑해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장강을 거슬러 쳐들어와 양양성을 떨어뜨린 실력을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유가 거느린 군사는 고작 3만. 이 군사로 천하의 대부분을 장악한 마초에게 맞서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자네는 왜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이는가. 이제 대장군이 직접 형주로 내려올 걸세.”

“저는 그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답하는 주유의 목소리는 공명이 풍부했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유표에게는 주유의 목소리가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렸다.

“저에게는 대장군 마초의 목이 필요합니다.”

양양성이 떨어지고, 형주가 강동군의 지배하에 놓인다.

이 정도의 위협이 아니면 마초를 끌어낼 수 없다.

주유는 유표의 방 한쪽에 있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창문 아래로 장강의 지류 한수(漢水)가 내려다보였다.

‘북방의 벌판에서는 누구도 그를 당해낼 수 없다.’

하지만 강 위에서라면 기회가 있을 것이다.

한동안 강을 내려다보던 주유는 이내 창문을 닫고, 유표의 방을 나섰다. 순식간에 세력을 잃게 된 유표의 쓸쓸한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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