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왕의 탄생
대장군부.
마초는 자신의 최측근 나관중과 국정을 상의하고 있었다.
“장합이 귀부했다고요?”
“그렇다네. 과거를 묻지 않고 풀어 주길 잘했지 뭔가. 나는 그자가 유 황숙의 밑으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말이야.”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그는 장년의 나이에 더 많은 군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앞으로 10년 후, 20년 후에도 전장에서 많은 공을 세울 것입니다.”
“게다가 앞으로의 전쟁은 정예병끼리의 대규모 전투가 될 것이다. 선두에 서는 맹장보다 장합 같은 지장이 더욱 쓸모가 많겠지.”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너무 늦게 귀부했다는 겁니다. 일찍 귀부했다면 육호대장이 될 만한 인재였는데요.”
“그거… 진짜 할 셈인가?”
“그럼요. 그것만은 꼭 해야 합니다.”
다섯 명의 맹장을 모아 오호대장이라는 칭호를 준다.
나관중이 이상하리만큼 집착하는 일이었다. 마침 방덕, 서황, 장료, 감녕, 황충까지 다섯 명의 맹장이 모였다. 방덕과 서황은 예전부터 마가군의 양 날개로 인정받고 있었고, 이번 조조와의 전쟁에서 장료, 감녕, 황충이 큰 공을 세우며 다섯 명을 동렬에 세울 만한 명분이 쌓였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육호대장보다는 오호대장이 어감이 좋으니까요.”
“뭐 알아서 하라고. 자네가 이름을 붙이면 이상하게 잘 되는 일이 많았으니까.”
마초는 피식 웃으며 나관중의 계획을 승인했다.
오늘은 가벼운 얘기만 하는 날은 아니다. 잠시 후, 상서령 가후가 들어오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가후는 천자의 비서실장이지만 마초의 사람이기도 하다. 어두운 안색으로 자신이 입수한 정보를 말했다.
“주공의 생각이 맞았습니다. 성상께서 유 황숙을 만났습니다.”
“역시 그랬나.”
마초와 나관중은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비를 수행해서 낙양으로 온 인물 중 노숙이 껴 있다는 소리를 듣자, 마초는 노숙에게 사람을 붙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했다.
유비의 주변에는 보는 눈이 많고, 유비도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다. 하지만 아직 무명인 노숙의 주변에는 그 정도의 경계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역사를 알고 있으니까. 유 황숙 주변에서 뭔가 계략을 꾸밀 만한 인물은 노숙뿐이다.’
설마 무명의 참모인 노숙에게 그 정도의 감시가 붙어 있다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유비와 유협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유 황숙이 형주를 얻으려 한다고요?”
“만약 그가 천하를 노리는 인물이라면, 그 외에 어떤 길이 있겠습니까.”
가후는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풀어 놓았다.
천자 유협은 마초와 사이가 좋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이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여차하면 마초 대신 자신이 의탁할 만한 세력을 키우고 싶어 할 것이다.
예주 자사 유비는 야심이 있는 인물이다. 민심을 얻는 모습들, 천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유협은 유비가 조정에 입조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마초가 버티고 있는 조정에서는 유비가 기를 펴기 어렵다.
“그러니 지방에서 세력을 키우려 하겠지요. 그런데 중원이 주공께 넘어간 상황에서 뜻을 펼칠 수 있는 곳은 남방밖에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형주가 가장 적합하지요.”
남방은 어디든 물자가 풍부하다. 문제는 길이다.
여차할 때 낙양을 직접 노릴 수 있는 진격로가 있어야 천하를 흔들 수 있는 것이다.
“교주는 만 리 밖에 있지요. 강동은 회남의 습지를 지나야 합니다. 익주는 관중을 통해야 하는데, 관중은 마가군의 직할지 아닙니까? 반면 형주에서 완성을 통해 북상하면 허도와 낙양이 지척이지요. 그러니 천하를 노리는 자가 남방에 할거하려면 반드시 형주를 얻어야 합니다.”
“으음… 하지만 형주목 유표는 예전부터 조정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인물입니다. 지금은 우리의 동맹 세력이기도 하지요. 그리 섣불리 유 황숙을 형주로 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방법이야 찾으면 여러 가지가 있지요. 예를 들어, 유범 대신 익주 자사로 세우는 건 어떻습니까?”
마초가 익주 내전에 개입해서 유범 정권을 세운 지 7년이 지났다.
아쉽게도 유범은 충의는 있지만, 재주는 그렇게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처음 탄탄해 보이던 유범 정권은, 지금은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란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익주 자사나 정남장군 같은 적당한 관직을 줘서 유 황숙을 익주에 보내면 됩니다. 그라면 순식간에 익주를 평정하겠지요. 그다음에 적당히 핑계를 대서 형주목 유표를 역적으로 선포하면, 익주에 있던 유 황숙이 형주를 병탄하지 않겠습니까?”
익주와 형주를 아우르는 군벌이 탄생한다. 그리고 그 수장은 유비가 된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었다.
“기껏 천하가 안정되어 가는 참입니다. 성상께서 정말 그것을 바라시겠습니까?”
나관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가후는 단호했다.
“성상께서도 주공을 깊이 신뢰하시는 건 확실하오.”
“하면 어째서…….”
“그러나, 천하에 다른 군웅이 없으면 성상은 온전히 주공께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오. 반면 유력한 군웅이 둘 있고, 둘 모두가 성상에게 충성을 바친다면?”
천자 유협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된다. 황실의 위상이 전혀 달라질 것이다.
마초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런 게 정치니까.”
가후는 거기까지만 하고 물러갔다. 어쨌든 천자를 모시는 상서령이니, 마초의 대응책에는 깊게 관여하지 않을 생각인 것이다.
마초는 나관중과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짰다.
“주공. 유 황숙은 뭘 바라고 있을까요?”
“더 큰 기반을 바라고 있겠지. 그게 있어야 부하들에게 더 큰 보상을 안길 수 있고, 더 큰 목표를 추구할 수 있으니까.”
“그가 그렇게까지 추구하려는 목표는 무엇이겠습니까?”
“그야…….”
유비가 마음속에 품은 꿈은 황제의 자리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바란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상황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그러니 그게 여의치 않을 것에 대비하여 현실적인 목표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 용상을 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가진 현실적인 목표는 이뤄줄 수 있지요.”
“자네 말은, 그와 다투지 말고 그의 꿈을 이뤄주자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는 주공의 지난 생의 은인이며, 이번 전쟁의 영웅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거대한 보상을 안기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초는 나관중의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이 옳네. 그에게 후한 상이 돌아가도록 성상께 주청하겠네.”
“적당한 상으로는 안 됩니다. 그가 이제 꿈을 다 이뤘다고 생각할 만큼, 그래서 칼날이 무디어지고 다리에 군살이 붙을 만큼 대단한 상이어야 합니다.”
나관중은 전에 없이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그가 형주를 얻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말입니다.”
* * *
낙양 외곽의 한 주루.
유비군이 통째로 빌린 이곳에서는 매일같이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장비와 간옹, 손건과 진도는 모두 소문난 말술이었다. 관우와 노숙도 취하도록 마시지 않을 뿐 남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술이 셌다.
“끼는 건 환영이지만 어지간한 주량으로는 어려울 텐데. 자네는 술 좀 하나?”
“훗…후후후. 서량 사람에게 술을 마실 줄 아냐고 묻다니.”
장비는 마대의 어깨에 팔뚝을 두르고 연신 술을 권했다. 예전에는 전쟁터에서 창검을 맞댄 적도 있지만, 지금은 기탄없이 술잔을 나누는 사이였다. 마대도 사양하지 않고 장비의 술을 넙죽 받아 마셨다.
그 모습을 보던 마초는 피식 웃었다.
“이 녀석아. 이 자들은 술 귀신들이니까 천천히 마셔라.”
“형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분들이 전부 호걸인 건 잘 알고 있지만, 설마 우리 서량 사내들만큼 술을 하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지.”
마초는 웃으며 지난 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가족을 잃고, 서량의 기반도 잃고 술독에 빠져 살던 때였다. 그러다 익주의 유비에게 귀부하게 되었다.
유비군은 다른 세력과 구분되는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었다. 전원이 말술이라는 것이었다.
‘관우나 장비는 그렇다 치고, 설마 제갈량까지 말술일 줄은…….’
제갈량은 술을 즐기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연회 자리가 있으면 가뿐히 한 동이를 비웠다. 그 상태로 자신의 부중으로 돌아가서 호롱불을 밝히고 밤새 정무를 본다고 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옛 동료들과 술잔을 나누기 위해 찾아왔다. 유비군의 인사들은 당연하게도 마초를 크게 반겼다. 필요 이상으로 예를 표하지 않고, 술을 통해 흉금을 터놓는 게 지난 생의 모습 그대로였다.
마초를 따라온 가족들도 유비군의 분위기에 완전히 적응해 있었다. 아우 마철, 사촌 아우 마대, 그리고 매제인 왕찬과 조운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얼마나 좋을까.’
마초는 자신의 가족들과 유비의 수하들이 어울려 있는 모습을 보며 잠시 감상에 젖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첫 번째 만취자가 나왔다. 유비군의 신예 장수였다.
“끅, 끄윽… 대장군! 소장이 술 한 잔 올리겠…….”
“많이 취한 것 같은데, 괜찮겠나?”
“이놈, 이때까지 그저 악으로 버텨 온 놈입니다! 이깟 술을 못 이겨서… 끄흑…….”
건장한 체격에 날카로운 눈매가 범상치 않은 청년 장수는 관우, 장비와 번갈아 대작하다 결국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 상태로 또 마초와 대작하려 하고 있으니, 근성만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마초는 웃으며 그를 말렸다.
“위문장은 너무 고집부릴 필요 없네. 관운장과 장익덕은 술로도 만 명을 당해낼 수 있는 자들이니 무리해서는 안 되네.”
“끄윽…….”
유비군의 젊은 장수, 위연은 마침내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관우, 장비와 대작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지켜보던 마철과 왕찬이 수군거렸다.
“과연 관공과 장 장군… 술도 천하제일이시군.”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옛날 탁군에서 형제의 의를 맺을 때, 술로 위아래를 정했다지요.”
“음? 잠깐, 그러면 저 둘보다 술을 더 잘 마시는 인물이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천하에 딱 한 명이 있다고 합니다.”
펄럭.
마철과 왕찬의 대화를 들은 것일까? 옷자락이 휘날리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주루에 들어왔다.
“어어, 대형.”
장비가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별다른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이 무리의 주군 유비는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술자리에 끼어 앉았다.
“아, 돌겠네.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구만.”
“그게 무슨 소리요?”
“알고 싶냐? 여기 있는 대장군에게 물어봐라.”
유비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마초를 지목했다.
장비, 관우, 그리고 유비군 중신들의 시선이 마초에게 모였다. 마초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대장군. 무슨 일입니까?”
“글쎄요. 유 황숙에게 무거운 상을 내려야 된다고 내가 주청했던 일이 있기는 합니다.”
탁.
유비는 복잡한 심경으로 인수를 내려놓았다. 방금 황궁에 들어가서 받아 온 물건이었다.
“아… 아니!”
“이것은……!”
어떤 도장인지 눈치챈 이들의 눈이 커졌다. 술기운이 확 달아날 만한 물건이었다.
“…주공. 경하드립니다.”
인수와 유비를 번갈아 바라보는 노숙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연왕(燕王).
인수는 옛 연나라 땅, 지금의 유주를 다스리는 제후왕의 것이었다.
유주의 중심지 탁군은 지금부터 20년 전, 황건적의 난에 의용군으로 참전하면서 떠나 온 유비의 고향이다.
이제 유비는 20년간의 방랑을 끝내고, 왕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