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두 개의 복숭아
유비는 깊게 허리를 숙였다. 마주 선 마초에게 등짝이 보일 만큼이었다.
그렇게 허리를 숙인 채, 얼굴은 활짝 웃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 미소를 보면 경계하는 마음이 누그러질 만큼 밝은 표정이었다.
“오갈 데 없던 몸이 대장군의 은덕으로 여남에 몸 둘 곳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침 힘쓰는 아우들이 있어 대장군께서 천하를 위해 싸우시는 데 손을 보탤 수 있었으니, 이 비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유비의 말투는 호들갑스럽고, 비굴했다.
오랫동안 유비를 보고 싶어 하던 마초다. 하지만 뜻밖의 자리에서 유비를 만난 그의 표정은 이상할 만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흐른 후, 마초가 두 손을 모아 답례했다.
“마초가 유 사군을 뵙습니다.”
“말씀을 낮추십시오, 대장군. 부끄럽습니다.”
“됐습니다. 앉으시지요.”
마초는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유비에게 자리를 권했다.
유비가 자리에 앉자마자 멀리서 누군가 달려왔다. 그날의 주인공인 신랑 조운이었다.
“사군, 언제 오셨습니까?”
“으하하하! 이 사람아, 자네가 혼례를 치른다는데 아우들만 보낼 수 있나?”
유비는 크게 웃으며 조운의 손을 맞잡았다. 관우와 장비까지 네 사람이 같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조금 떨어져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초는 술을 입으로 가져갔다.
나관중은 유비를 보며 감격하는 대신 마초의 옆으로 다가왔다. 10년의 세월을 같이 보낸 그에게는 지금 마초의 태도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주공, 항상 유 사군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아, 그랬지.”
“그런데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관중의 물음에 마초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유 사군의 태도를 봤나.”
“예. 과장되게 예의를 차리더군요. 그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주공은 유 사군에게 둘도 없는 은인이신데요.”
“저 사내는 자기 사람에게 허리를 숙이지 않는다.”
유비는 그랬다.
그는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공손찬, 원소, 유표의 휘하에 있었을 때도 그들에게 이렇게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대신 특유의 친화력으로 그들에게 호감을 샀을 뿐이다.
지난 생에서 유비와 수년을 함께 했던 마초는 그런 유비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공손찬이나 원소, 유표의 휘하에서도 그렇지 않았다면…유 사군은 저렇게 길게 읍을 하고 낮은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겠군요.”
“아니, 없지는 않았지.”
“예?”
“단 한 명에게는 저런 태도를 보였다고 하더군.”
나관중의 머릿속에 뭔가 짚이는 바가 있었다.
“설마 그 사람이…….”
“그래. 조조다.”
마초는 술을 마시며, 티 나지 않게 유비를 관찰했다.
유비의 곁에는 금세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런 그들과 순식간에 술잔을 나누며 십년지기처럼 친해지는 유비를 보며, 마초는 뭐라 형언하기 힘든 이질감을 느꼈다.
나관중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유 사군이 주공에게 적의를 가진 걸까요?”
“그건 모르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절대 저 사내를 만만히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마초는 조정의 대장군이며, 한의 실질적인 통치자다. 이제 천하의 대부분에 마초의 영향력이 미친다.
그에 비해 유비는 고작 한 고을을 다스리는 인물일 뿐이다.
‘하지만 절대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언제든 대세를 뒤집을 수 있는 인물이니까.’
조운과 마화의 혼례식은 성황리에 끝났다.
먼 길을 달려온 예주 자사 유비가 자리를 빛내 주었다.
* * *
관우와 장비는 여남을 떠나며 유비의 명을 받았다.
“조조의 목을 들고 돌아와라.”
그러나 그 명은 이뤄지지 못했다.
정위부의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은 조조의 시신은 낙양 성문 밖에 효수되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조조의 가노들이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고자 하였다.
관우와 장비는 마초에게 청을 넣어 조조의 매장을 잠시 연기했다. 최고의 전공을 세운 두 사람의 청이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여남에 머무르던 유비가 달려와 낙양에 당도하자, 마침내 그 의도가 밝혀졌다.
“전 서주목 유비가 고하나이다. 제위께서 조조의 칼날에 억울하게 희생된 지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이제 늦게나마 원수의 목을 얻게 되어, 향기로운 술과 여러 음식을 올리니 두루 흠향하소서.”
유비는 서주대학살의 희생자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제단에는 술과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가운데에 조조의 목이 놓여 있었다. 음식은 그렇게 훌륭하지 않았지만, 제사를 구경하러 모여든 백성들과 나눠 먹어야 하니 양만은 엄청나게 많았다.
천하에 이름 높은 영웅 유비가, 서주목 시절 지키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원수의 목으로 제사를 지낸다.
백성들에게는 대단한 볼거리였다.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을 얹었다.
“주자사까지 한 양반이 참 유난이구먼.”
“이 사람아, 유난이라니? 자기 백성들 죽었다고 제사 지내 주는 사람이 유 예주 말고 또 누가 있는가?”
구경꾼들 사이에서 그렇게 이야기가 돌고 있으면, 어느새 건장한 사내들이 한 명씩 끼어들어 말을 얹었다.
“댁들은 잘 모르시나 보오. 유 예주는 그냥 창칼 든 군웅들하곤 다른 사람이외다.”
“유 예주가 서주에 자리를 잡으니 하북 사람들 수천 명이 따라갔지요. 그 후에 여남에 자리를 잡으니 또 서주에서 수만 명이 유 예주를 따라갔다고 하더이다.”
“아니, 왜들 그런답니까?”
“그야 지금 보고 계시지 않소. 유 예주는 자기 백성이 죽으면 끝까지 복수하는 사람이외다. 게다가 무거운 세금을 걷는 법도 없지요.”
구경꾼들 곳곳에 섞인 백이병들은 교묘하게 유비의 칭찬을 하며 바람을 잡았다.
제단 아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숙은 분위기가 무르익자 제사 음식을 나눠주게 했다. 그리고 유비에게 미리 약속된 신호를 보내자, 유비가 고개를 끄덕이고 크게 외쳤다.
“오늘은 이 유 아무개가 원수의 목을 얻은 날이오. 차린 건 없지만 모두 똑같이 나눠 먹읍시다.”
별것 아닌 음식이라도 공짜로 먹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제사 음식을 얻어먹는 백성들은 저마다 유비에 대해 좋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사 어르신 풍채가 아주 좋구먼. 얼굴도 깨끗하고, 귀가 큰 게 아주 복스럽고 말이야.”
“저기 키 큰 장수가 관운장인가? 꼭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 같은걸.”
“저 장익덕은 또 어떻고? 팔뚝 한번 대단한데.”
오늘 이 자리에서 유비를 본 백성들은, 유비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는 역할을 해 줄 것이다.
이 행사를 설계한 유비의 참모 노숙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백성들 틈에 섞여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생각이 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늘의 때도, 땅의 이익도 전부 다른 이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 민심이라면 우리 주공이 기댈 만하다.’
민심을 얻어서 대체 뭘 하려는 것일까?
노숙은 유비의 곁을 지나치며 성공이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유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 *
황궁.
유비는 천자 유협을 알현하고 있었다.
“신 비는 본래 북쪽 변방에서 돗자리를 팔며 살던 몸으로, 오늘 성상 폐하를 뵙게 되니 무한한 영광이옵니다.”
유협은 바닥에 고두한 유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대에게도 황실의 피가 흐른다고 들었다.”
“신은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예이고, 효경황제(孝景皇帝)의 현손이 되옵니다.”
중산정왕 유승.
후한도 아닌 전한의 황족이며,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 사람이다. 그는 소문난 난봉꾼이라 아들과 손자가 100명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300년이면 엄청나게 긴 세월이다. 예를 들어 마초의 선조는 200년 전 후한 개국공신인 마원이었으나, 지금은 강족과의 혼혈로 서역인의 외모를 갖게 돼 버린 것이다.
그런데 천자 유협은 무슨 생각인지, 황실의 종정(宗正)을 불러 족보를 확인하게 했다.
“효경황제께서 아들 열네 명을 두셨으니, 일곱째 아들이 곧 중산정왕 유승이고, 유승은 육성정후 유정을 낳고, 유정은 패후 유앙을 낳고… 유웅이 유홍을 낳았으니, 유비는 곧 유홍의 아들이며, 효경황제의 십팔 대 후손이 맞습니다.”
전한 경제의 18대손.
따져 보면 당금 천자 유협과의 촌수는 25촌이 된다. 그러니까 유씨 성 쓰는 평민이라는 소리다.
그런데 25촌을 본 유협은 별안간 옥좌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유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렇다면 우리 두 사람은 숙질간이 아닌가? 숙부님! 조카의 절을 받으십시오!”
유협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좌중의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졌다.
단 한 사람, 유비만은 천연덕스럽게 숙질간의 예로 유협에게 답례를 했다.
“황숙(皇叔)께서 군사를 보내 역적을 토벌하였으니, 아직 한의 사직이 기울지 않았나 봅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신이 비록 재주 없으나 종실의 일원이니, 어찌 집안의 일에 수고를 아끼겠사옵니까?”
“하하, 숙부님께서는 궁에 언제든지 찾아오십시오. 이 조카는 궁 안에서만 살아서 세상일을 잘 모르니 가르침을 주십시오. 또 숙질간에 집안의 이야기도 나누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실권이 없는 황제는 먼 친척뻘 되는 군벌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했다.
한미한 집안 출신의 군벌은 황숙이라는 명예를 얻어 자신의 배경을 세탁했다.
그날의 정무가 파한 뒤.
유협은 변복을 하고 궁 밖으로 나갔다.
허도 피난 시절부터 유협은 잠행하는 일이 잦았다. 보는 눈과 귀가 없는 편안한 자리에서 근황파 인사들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최근에는 노래 잘하는 기생을 보러 다니는 것처럼 꾸미고 있었다.
즐겨 찾는 기루에 앉아 있으니 옆자리에 유비가 와서 앉았다. 유협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노래하는 기생을 바라보다 불쑥 말을 꺼냈다.
“유 대인께서는 오랫동안 전장을 주유하셨지요?”
지금 유협은 천자가 아니라 그저 젊은 귀공자일 뿐이다.
유비도 유협의 속내를 알아채고 모르는 척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유 공자.”
“그렇다면 조정에 남아 금군(禁軍)을 맡아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기루의 아래층에서는 가희가 맑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돌아보지 않고 아래층의 가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이야기를 나눴다.
“불가합니다.”
“어째서입니까?”
“지금 금군을 창설하면 대장군의 집권을 흔들게 됩니다. 유모는 대장군의 눈 밖에 나서는 아니 됩니다… 아직은.”
노래가 절정에 이르자 가희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가희는 마치 속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처연한 음색으로 노래를 이어 갔다.
힘은 능히 남산을 등에 지고(力能排南山).
지략은 능히 땅의 기운을 끊을 만 했으나(文能絶地紀).
하루아침에 모략에 휘말리니(一朝中陰謀).
두 복숭아가 세 장사를 죽였네(二桃殺三士).
옛 초나라 땅, 지금의 형주에 전해지는 양보음(梁甫吟)이었다.
유협은 가희의 호흡이 끊어지는 틈을 타서 말했다.
“하면, 내가 유 대인을 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저는 중앙 정계에서 뭔가 이룰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저에게는 지방의 더 큰 기반이 필요합니다.”
“기반이라. 어디가 적절하겠습니까?”
어떤 이가 그리 했을까(誰能爲此者).
제나라 재상 안자였다네(相國齊晏子).
가희는 호흡이 많이 섞인 목소리로 양보음의 마지막 구절을 노래했다.
유비는 가희의 노래가 끝날 때에 맞춰 말했다.
“형주목 유표가 고령이지요.”
“형주라.”
“북방에서는 이제 뭘 해도 대세를 뒤집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방에는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남방.
강동, 형주, 교주, 그리고 익주를 말한다.
“유 공자께서 믿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가희는 깊이 고개를 숙여 좌중에 인사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졌다.
“나는 형주만 얻을 수 있으면, 그곳을 기반으로 천하를 진동시킬 자신이 있습니다.”
잠시 시간이 흐른 후, 유협이 대답했다.
“형주목 유표는 황실의 통제를 벗어난 인물입니다. 그러나… 방법을 찾자면 찾을 수 있겠지요.”
“기대하겠습니다.”
유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협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노숙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주공.”
“딱 자네가 예견한 대로 됐네.”
돌아오는 말 위에서, 유비는 낙양 시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조조에게 원수를 갚았다. 마초에게 은혜도 갚았다.’
이제 은원이 깨끗해졌다.
“협(俠)으로서 할 일은 다 했으니, 나도 이제 정치를 해야겠지.”
멋지게 사는 협객의 삶은 이제 끝났다. 앞으로는 더럽고 치졸한 정치가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유비는 어딘지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늦가을의 바람이 차갑게 몸을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