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의외의 하객
며칠 후.
조정의 관직이 대규모로 재편되었다.
조조가 죽으며 승상의 자리는 폐지되었다. 대신 폐지되었던 삼공이 부활했다.
학술과 의례를 담당하는 사도(司徒)에는 순욱이, 일반 행정과 토목을 담당하는 사공(司空)에는 순유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새로 생긴 삼공의 수장이자, 군무를 담당하는 대사마(大司馬)는 태부 마등이 겸직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등은 장안으로 돌아갔으니 조정에는 마등의 대리인이 필요했다. 이 역할은 당연히 마초의 것이 되었다.
마초는 대장군 녹상서사로서, 한의 군무를 총괄하고, 황명을 출납하며, 대사마를 대리해 조정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정치적 고려 때문에 관직을 적당한 선에서 유지하고 있을 뿐, 명실상부한 한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이다.
“경하드립니다, 대장군.”
마초는 이제 수리가 끝난 대장군부에서 제갈량을 만나고 있었다.
“이번 전쟁에서 자네가 큰 공을 세운 덕분이지. 그래, 이제 현령직 대신 중앙의 관직을 맡게 되었다고?”
“그렇습니다. 순 사공 휘하의 사공연속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더 큰 자리도 맡을 수 있다. 하지만 제갈량은 사공부에 있고 싶어 했다.
“자네는 형주에 있을 때부터 대장장이나 농부들의 일에 관심이 많았다고 들었네. 자네가 고안한 연노차가 아니었으면 이번 싸움에서 이겼으리라 장담할 수 없네. 그런 재주는 대장군부에서 더 요긴하게 쓰일 것 같은데.”
“지금 천하에 뭐가 더 필요한지 봐야 합니다. 아직 연주와 예주에는 조조의 잔당들이 남아 있고, 전쟁터가 되었던 삼하 지방도 재건해야 합니다. 하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공부에서 일하겠다는 건가?”
“예. 사공부에서 토지와 농업 정책을 맡고 싶습니다. 농사에 힘써 곡식을 기르고, 백성들의 재물이 늘어나게 만들면 천하는 자연스럽게 안정될 것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하는 분야가 따로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자신의 적성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일을 찾아다니게 된다.
제갈량은 달랐다. 그에게 적성 따위는 의미가 없었다.
“자네는 항상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만 생각하는군. 지난번에는 좋아하지도 않는 경전 공부를 해서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뜬금없이 지방 현령으로 가서 전쟁을 준비하더니, 이번에는 사공부의 속관이라.”
“나아가면 장수가 되고, 들면 재상이 될 수 있어야겠지요. 그래야 관중과 악의에 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국강병을 이뤄낸 제나라의 명재상 관중.
70여 개 성을 빼앗은 연나라의 명장 악의.
제갈량은 아무렇지도 않게 전설적인 두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듣는 마초는 그저 피식 웃었다.
‘관중과 악의라. 이 녀석은 고작 그 정도로 끝날 것 같지 않은데.’
원래의 역사에서, 익주 1개 주의 생산력만으로 10주를 차지한 위나라를 위협했던 제갈량이다.
훗날 마초의 후원하에 안정된 통일 중국의 재상이 된다면 어느 정도의 업적을 남길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마초는 그런 제갈량을 보며 본론을 말했다.
“나는 자네를 훗날의 상서령으로 생각하고 있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상서령에는 확실한 대장군의 사람을 쓰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마초는 제갈량에게 물었다.
“그 말은, 자네는 아직까지도 내 사람이 아니라는 건가?”
“저 또한 따로 뜻한 바가 있으니, 그저 천하를 위해 일할 뿐입니다. 장사에서 대장군께 은혜를 입었기에 온현에서 최선을 다해 대장군을 도왔습니다. 앞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천하를 위해 일하면 그만이지요.”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따라 마가군의 반대편에 설 수도 있다는 뜻이다.
마초는 헛웃음을 지었다.
‘예전에 유 사군이 말했었지. 이 녀석이 하도 콧대가 높아서 끌어들이는 데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잠시 생각하던 마초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한 자부심을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 좋아.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능력을 펼쳐 보게. 나는 뒤에서 자네를 돕겠네.”
제갈량이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것은 민생을 안정시키고 나라의 곳간을 채우는 일이다.
이는 마초의 목표와도 일치했다. 마초는 굳이 충성 맹세를 받는 대신, 제갈량이 관료로서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후원자가 될 것을 약속했다.
제갈량은 깊이 머리를 숙이고 물러갔다.
“능력은 확실한 녀석이지만, 저렇게 콧대가 높아서야 상서령으로 삼기는 어렵겠군. 마음대로 일할 수 있는 독립된 기관을 맡기는 게 좋겠어. 사공연속으로 일하게 한 다음에는 태수 같은 지방관을 시켜 보고, 그다음에는 대사농부에서, 그리고 무관직도 한 번…….”
마초는 제갈량의 경력을 어떤 식으로 개발할지 정리했다. 비록 지금은 완전한 마초의 사람이 아니라고 선언했지만, 나중에는 결국 재상을 맡겨야 하는 인물이었다.
그사이 또 다른 청년이 들어왔다.
“대장군을 뵙습니다.”
몸은 약간 둔해 보이지만, 영민해 보이는 선한 인상을 가진 청년이었다. 전형적인 명문가 출신 수재의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이 청년이 바로 차기 상서령으로 가후가 천거한 두 번째 후보였다. 마초의 생각도 같았다.
‘최근 뛰어난 젊은 인재들을 많이 얻었다. 하지만 상서령에 썩 어울린다고 할 만한 인물은 마땅치 않다. 젊은 세대 중에서는 이 녀석이 가장 낫지.’
육손은 무장이다.
방통은 모사다.
그리고 사마의는…….
“믿을 수 없는 놈이지.”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닐세. 낙양 명문가의 젊은 선비들에게 또래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 누구인지 물으면 꼭 자네의 이름이 나온다더군.”
진군, 자는 장문.
훗날 구품관인법을 만들어 관리의 인사제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오늘날 공무원을 아홉 단계의 급수로 구분하는 것도 진군이 만든 구품관인법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20대의 진군은 명석한 두뇌와 함께 인간적인 매력도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마초는 기분 좋게 진군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의 사람됨을 잘 관찰했다.
‘나무랄 데 없는 재목이군. 하지만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
진군은 청류파 집안 출신이다. 그의 정책 또한 다소 보수적이면서 귀족 사회의 이익을 대변하는 성격이 강하다.
지방 군벌 출신이며, 미래의 역사를 참고하여 강도 높은 개혁을 추진하려는 마초와는 언젠가 뜻이 어긋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쓰지 않을 수도 없는 인물이다. 마가군 출신들만으로는 도저히 조정을 운영할 수 없는 것이다. 기존의 귀족 세력과 손을 잡아야 하는데, 진군 정도면 그중에서 말이 통하는 편이었다.
“진장문, 자네는 재미있는 경력을 갖고 있더군. 잠시 군웅의 휘하에 있었다고?”
“전란의 시대에는 칼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칼을 쥔 군웅이 나라 대신 백성을 돌보는 모습에 감동 받았습니다. 비록 가는 길이 달라졌지만, 지금도 개인적으로는 그분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진군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는 명문 사대부 출신이면서도 한미한 집안 출신의 군소 군벌의 휘하로 기꺼이 들어갈 수 있는 과감성과,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바로 사직하는 뚜렷한 주관이 있는 인물이었다.
마초는 웃으며 말했다.
“그를 존경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일세. 그래, 이제 조정에서 관직을 할 때가 되었지. 나는 자네를 상서로 천거할까 하네.”
상서는 일종의 엘리트 코스다. 진군은 상서령 가후의 휘하에서 상서로 일하게 될 것이다.
진군은 깊이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물러갔다.
이것으로 차세대들에 대한 인선도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제갈량은 사공연속으로, 진군은 상서로, 그리고…….”
방통은 대장군부의 군사장군이 되었다. 상서령이 되어 조정에 입조한 가후 대신, 수석 모사로서 정보와 모략을 담당할 것이다.
육손은 편장군 태원태수가 되었다. 태수로서 지방관의 직을 맡긴 후, 대장군부로 다시 불러들여 무장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사마의에게는 아무 관직도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온후로 삼고 식읍도 두둑하게 내려 줬지. 그 녀석은 위험한 놈이니까 그저 돈이나 실컷 쓰면서 살게 해야겠어.”
야심이 큰 사마의는 돈보다 중앙 정계 진출을 더 원할 것이다. 하지만 마초는 그런 그의 희망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차세대들의 일을 정리한 마초는, 진군이 과거에 섬겼다던 인물에게 생각이 미쳤다.
“군소 군벌의 몸으로 진장문을 귀신같이 알아보고 불러다 썼군.”
그런 안목과 매력을 가진 인물은, 당연히 유비였다.
* * *
203년 가을.
낙양 외곽에서 혼례식이 열렸다.
신랑은 우림중랑장 조운, 신부는 태부 마등의 차녀 마화였다.
혼례식에는 조정의 고관들이 엄청나게 많이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왈가닥이었던 장녀 마수는 문사 왕찬과 혼인하고, 요조숙녀였던 차녀 마화는 정변에서 직접 칼싸움까지 한 뒤 무장인 조운과 혼인했다.
중앙 정계를 한바탕 뒤집어 놓은 후, 유유히 장안으로 돌아갔던 마등은, 혼례식 날짜가 잡히며 다시 급하게 낙양을 방문하게 되었다. 모양새가 빠지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사연이 있었다.
“이놈들은 대체 왜 아이부터 만드는 거야?”
“크흠.”
투덜거리는 마초의 옆에서 나관중이 헛기침을 했다. 채염과의 사이에 생긴 첫째 딸은 벌써 세 살이 되었다.
채염을 여자로서 탐냈던 조조는 심리전을 걸었다. 유폐된 나관중을 석방해서 집으로 돌려보내 주며, 나관중이 채염을 의심하도록 만들어 불화의 씨앗을 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바로 둘째가 생겼다고?”
“계산해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그걸 미리 알았으면 조맹덕이 죽기 전에 알려줬을 텐데. 아깝구만.”
조조가 채염을 탐내서 걸었던 계략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마초는 피식 웃으며 옆에 있는 하객 두 사람을 바라봤다. 얼마 전부터 대장군부의 객식구가 되어 몇 달째 무위도식하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관공과 장익덕은 여남으로 안 돌아가시오?”
“으하하하! 놀아도 낙양에서 놀아야 하지 않겠나? 조금만 더 놀다 갈 테니 대장군은 우리를 너무 타박하지 말게. 우리 대형이 곧 낙양으로 온다고 하니, 오면 다 같이 한잔하고 헤어지자고.”
장비는 껄껄 웃으며 마초의 말을 받았다.
관우도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나 선생이 매일같이 옛이야기들을 묻기에 상대해 주려면 어쩔 수 없소이다. 대장군께서 이해하시오.”
나관중은 관우와 장비를 쫓아다니며 숨은 옛이야기들을 받아 적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시 한번 패설을 쓰려는 모양이었다.
관우도 나관중이 보여주는 순수한 존경심과 호의가 마음에 들었다.
“비서랑이 관공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는지 걱정이오.”
“그런 말씀 마시오. 관모는 배움이 얕아서 나 선생께 많이 배우고 있소. 얼마 전 서자를 하나 얻었는데, 서자의 이름을 지어 준 것도 나 선생이시오.”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이름이 없던, 관우와 두혜 사이의 아들.
사실은 두혜가 관우의 첩이 되기 전에 임신했던 아이지만, 나관중이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관우에게 이름 없는 셋째 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자 나관중은 당장 달려가서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아이의 이름은 색(索)이라고 하시지요. 관색, 어떻습니까?”
“좋은 이름이오.”
나관중은 그렇게 아이의 이름까지 지어 주며 관우와 친분을 쌓고 있었다.
조운과 마화의 혼례식은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모인 채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연회 자리가 깊어 갈 무렵.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대장군.”
그는 연회장에 들어오자마자 마초부터 찾았다.
7척 5촌의 키에, 유독 귀가 큰, 40대 초반의 남자였다.
그는 긴 팔을 뻗어서 공손히 모으며 마초에게 예를 갖췄다.
“영매의 혼사를 치르신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인사드립니다. 소인의 성은 유씨이며, 이름은 비, 자는 현덕이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