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실패자의 사연
대장군의 집무실.
“곽봉효의 최후를 지켜보셨다고 들었소.”
마초는 차를 내리며 순욱에게 물었다.
순욱이 대답했다.
“곽봉효는 저와 같은 고향 사람이고, 예전부터 교류하던 벗입니다. 그의 죄는 씻을 수 없겠으나, 인간적인 정리로 그의 마지막을 지켜 주고 싶었습니다.”
조조가 죽은 후, 조조의 최측근들은 전부 처형당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곽가였다.
순욱은 자신과 앙숙이었던 곽가가 옥살이를 하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갖은 편의를 봐주었고, 곽가가 참수형을 당하는 순간까지 그의 옆에 있었다. 처형이 끝난 후에는 곽가의 잘린 목을 끌어안고 통곡했는데, 그 울음을 들은 구경꾼들이 아무도 곽가를 욕하지 못할 만큼 처연한 소리였다고 한다.
마초는 씩 웃으며 순욱의 앞에 마주 앉아 차를 건네주었다.
“내가 들었던 것과 다르구려. 곽봉효는 순령군을 미워했다던데.”
“관직 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사소한 대립을 겪지요. 그저 그 정도였습니다.”
“군자는 남과 화합하지만 뇌동하지 않는다(和而不同)고 하더니, 순령군이 딱 그런 경우인 듯싶소.”
마초는 논어를 인용해서 순욱을 칭찬한 뒤 같이 차를 마셨다.
마초와 순욱은 지금 식탁을 사이에 두고,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본래 의자는 유목민의 문화라서, 이 시대에는 호상(胡床)이라고 불렸다. 이 시대에는 의자가 있기는 있었지만, 좌식 생활이 기본이었다. 의자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당나라 이후의 일이다.
하지만 의자에 앉는 것이 바닥에 앉는 것보다 편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마초는 나관중이 만들어 낸 원나라 양식의 편안한 의자를 보고 냉큼 차용해서, 이제는 의자가 없으면 사무를 보기 힘들 정도였다.
마초가 쓰는 의자는 순욱의 눈에도 신기했다.
“대장군께서는 기발한 문물을 여러 가지 도입하셨지요. 이 의자는 몸의 무게를 잊을 만큼 편안합니다.”
“하하, 바닥에 오래 앉아 있으면 무공이 쇠하기 쉽지요. 의자도 마찬가지지만 바닥보다는 허리와 다리가 덜 아픕니다. 조만간 내가 댁에 장인을 한 명 보내 드릴 테니, 이참에 순령군도 하나 맞추시지요.”
마초는 잠시 동안 순욱과 정담을 나눴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순욱이었다.
“대장군께서 저를 부르신 데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있지요. 그러나 그 얘기는 차 한 잔을 다 마시고 나서 합시다.”
“하면, 그 전에 제가 대장군께 궁금한 것을 하나 묻고자 합니다.”
“말씀하시오.”
“대장군께서는 한실을 어떻게 여기십니까?”
“하하하하.”
마초는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보기와 달리 성미가 급하시군. 순령군, 나는 한의 신하요.”
“맞습니다. 이 순모가 한의 신하인 것처럼, 대장군 또한 한의 신하시지요.”
“그러나.”
탁.
마초는 찻잔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신하라고 다 같은 신하는 아닐 것이오.”
“무슨 뜻이신지요?”
“그대가 조조를 섬기는 동안, 나는 조조에게 맞서서 근황파를 수호했소. 그대가 조조를 동쪽의 패자로 만드는 동안, 나는 서쪽에서 역적을 토멸하고 장안에서 곤경에 처하신 성상을 탈출시켰소.”
“그러셨지요.”
“즉, 나는 그대에게 한실을 어떻게 여기는지 추궁당할 이유가 없소. 그대가 몸으로는 역적을 섬기며 입으로만 바른말을 하는 동안, 나는 행동으로 충정을 보였기 때문이오.”
마초는 작심한 듯 위험한 수위의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러면서도 얼굴에서는 여유 있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하나 물어봅시다.”
“말씀하십시오.”
“방금 내게 한 질문, 조맹덕에게도 할 수 있었겠소?”
“제가 조 승상을 만난 지 십 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열세 번 물었습니다.”
순욱의 말을 듣자 마초는 헛웃음이 나왔다.
“순령군도 어지간하군. 그래, 조맹덕은 뭐라 답했소?”
“매번 조금씩 달랐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솔직하게 답하셨지요. 대장군께서는 믿기 힘드실 수도 있겠지만, 조 승상은… 찬탈을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작년까지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는 왜 그렇게 권력에 집착한 것이오?”
“조 승상은 죽을 때까지 싸움을 하고, 남의 여인을 취하고, 정책을 펼치고, 시를 쓰면서 살아가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새 왕조의 창시자가 되면 앞의 두 가지는 포기해야 하지요.”
“으하하하!”
마초는 크게 웃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웃음을 그칠 수 있었다.
“실로 그다운 발언이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조조.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이대로 밤을 새워도 모자라다. 마초는 잠시 조조에 대한 감상에 젖었다.
“조맹덕은 우리 시대의 영웅이었지.”
“맞습니다.”
“그런데, 순령군은 어째서 그런 영웅을 제대로 돕지 않은 것이오?”
마초의 눈빛이 장난기를 띠었다.
순욱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는 한의 신하입니다. 조 승상이 천하를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할 때는 최선을 다해 그분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조 승상이 성상을 향해 칼을 뽑은 이상…….”
“내 앞에서 거짓을 고할 셈인가.”
마초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잠시 동안의 침묵 후, 순욱이 대답했다.
“저는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대의 말은 거짓이오.”
마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석을 향해 걸어가 순욱과 거리를 둔 후, 벽에 기대 팔짱을 낀 채로 말을 이었다.
“나 또한 그대가 한의 충신임은 전혀 의심하지 않소. 하지만 한의 안위만을 생각했다면 다른 길이 많았지. 나와 조맹덕이 조정에 같이 있었던 게 3년이 넘소. 순령군, 그대가 조조를 버리고, 다른 근황파들을 따라 내 편으로 돌아설 수 있는 시간이 3년이나 주어졌지만, 그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조조의 곁에 남아 있었소.”
순욱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말을 하는 건 마초인데 어째서 순욱의 입이 마르는 것인가?
“그대는 한을, 이 나라를 진심으로 사랑했소. 그러나 그대가 사랑한 것은 한만이 아니었지.”
순욱의 인생은 모순덩어리다.
원래의 역사에서, 순욱은 조조를 헌신적으로 도와 북중국의 지배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조조의 찬탈 행보가 구체화되었을 때를 전후해 조조의 눈 밖에 났고, 얼마 안 가서 죽는다. 어떤 기록은 그의 죽음을 병사라고 말하고, 어떤 기록은 조조가 빈 찬합을 보내 자결을 종용했다고 말한다.
왕좌지재라 불릴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던 그다. 그는 그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왜 실패했을까.
아니,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길에 자신의 인생을 바쳤을까.
‘나도 정확한 내막은 모른다. 하지만 짐작 가는 바는 있지.’
동시대의 사람인 마초도 순욱의 죽음에 얽힌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기록으로 이 시대를 접한 나관중은 오히려 순욱의 죽음에 대해 독창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던 마초였지만, 순욱과 직접 대화를 해 볼수록 나관중의 해석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초는 순욱을 향해 물었다.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길로 갔소?”
원래의 역사에서 순욱은 실패했다.
바뀐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번에는 조조가 정변에서 순욱을 배제하며,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있었을 뿐이다.
탁.
순욱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길게 한숨을 쉰 후, 입을 열었다.
“조 승상은 환관의 손자입니다. 수십 년간 이 나라의 주인이었던 환관, 그리고 이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장본인인 환관 말입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권세를 누렸던 중상시 조등의 손자지요. 그는 이 나라의 모순으로 인해 귀한 몸으로 태어났으면서, 이 나라의 모순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나 또한 알고 있소. 나이 스물에 십상시와 맞서고, 나이 서른에는 동탁과 맞섰지.”
“저는 선비입니다. 그리고 선비라는 자들은 강대한 적을 만나면 대개 회피합니다. 한의 모순을 본 선비는 그것에 눈을 감고 부귀영화를 좇거나, 아니면 죽을 생각으로 무모하게 저항해서 진짜로 죽어버리지요.”
“맞소. 질 줄 알면서 싸우는 것도 회피하는 방법일 뿐이오.”
“하지만 환관의 손자 조조는 달랐습니다. 그는 십상시나 동탁이 상징하는 이 나라의 모순과 끊임없이 맞서 싸웠습니다. 패하고 죽을 생각으로 싸웠던 청류파들과는 다릅니다. 싸움 자체를 명분으로 이용해 자기 세력을 쌓으려던 원본초와도 다릅니다. 그는 정말로 이길 생각으로 싸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누구보다 지독하게 싸웠습니다. 저는…….”
순욱의 말이 끊어졌다.
말을 쏟아내던 순욱은 우두커니 먼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초는 순욱을 재촉하지 않았다. 하나부터 스물까지 셀 수 있는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순욱의 말이 이어졌다.
“저는 그저, 그 사람이 좋았습니다.”
순욱의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마초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쉬었다.
‘정확히 들어맞았군.’
순욱이 마지막까지 한과 조조 중에서 하나를 택하지 못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던 이유.
본인의 입을 통해 확인한 진짜 이유는, 나관중이 예상한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사람은 명분이나 실리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 감정, 곧 사랑과 미움이다.
역사 속의 순욱은 명분도 실리도 취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조조를 인간적으로 사랑했다면, 그 마음만은 충분히 표현하지 않았을까.
조조의 이야기를 하는 순욱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턱 끝에 눈물방울이 맺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순욱은 울음소리를 전혀 내지 않았다.
마초는 잠시 순욱에게 시간을 줬다.
잠시 후, 순욱이 마음을 가라앉히자 마초가 입을 열었다.
“조맹덕의 장남 조앙이 죽었지만, 다른 아들들은 살아 있소.”
“역적의 자식이 되었으니 오래 살지는 못하겠지요.”
“청주에 적당한 땅을 마련해 놓았소. 조맹덕의 삼남 조창을 그곳으로 보내 집안의 제사가 이어지도록 할 것이고, 다른 자식들은 각자 먼 곳으로 이주해서 살게 할 것이오. 조만간 내가 성상께 탄원할 테니, 순령군도 동조해 주시오.”
순욱은 어안이 벙벙했다.
“대장군, 진심이십니까?”
“순령군.”
마초는 순욱을 향해 웃었다. 순욱은 마초의 웃는 표정이 어딘가 슬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천하나 대의보다 가족이 더 중요하오.”
“그렇게 들었습니다.”
“내 가족이 소중하니, 남의 가족도 해하고 싶지 않소. 조맹덕과 나 사이의 일은 정치하는 자들끼리 있었던 일이오. 둘 사이의 일은 둘이 끝낼 것이오.”
묵묵히 있던 순욱은 마초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대장군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또 하나. 오늘 순령군을 보자고 한 것은 드릴 말씀이 있기 때문이오.”
“무엇입니까?”
“곧 삼공의 자리에 오르실 것이오. 사도(司徒)로 영전하실 테니, 상서령은 내 사람으로 채우겠소.”
사도는 학술과 의례를 비롯한 국정 전반의 일을 총괄하는 재상의 자리다.
하지만 마가군이 장악한 조정에서는 명예직에 가까운 자리가 될 것이 자명했다. 그에 비하면 상서령은 막강한 실권직이다.
순욱의 지위를 올려서 조조의 편에 섰었던 귀족들을 포용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실권은 마가군이 가져가겠다는 뜻인 것이다.
마초가 조정으로 복귀하며 누구나 예상했던 행보다. 순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 * *
순욱이 나간 후.
마초는 순욱의 후임으로 상서령으로 삼으려는 인물을 만나고 있었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꼭 제가 해야 합니까?”
좀처럼 표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는 가후지만, 이번에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가 선생만 한 적임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대장군에 녹상서사(錄尙書事)를 겸직하며 정치적 부담은 다 안고 갈 테니, 가 선생께서는 그저 일에만 신경 써 주시면 됩니다.”
“저는 동탁과 이각을 섬겼던 몸입니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대장군부에서 주공에게 조언하는 역할이 가장 잘 어울립니다.”
“가 선생, 상서대는 최고의 귀족 가문 출신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상서로 오래 계셨으니 잘 아시지 않습니까? 어설픈 인물을 올렸다가는 상서들에게 이용당하거나, 아니면 상서들과 한통속이 되어 귀족들의 이익만 대변하게 되기 쉽지요. 상서들을 완벽하게 장악할 수 있으면서도 내가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가 선생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마초는 그렇게 가후를 설득했다.
그렇게 몇 번을 옥신각신한 끝에 가후는 결국 조건을 달아서 받아들였다.
“길게 재임하지는 않겠습니다. 지금 젊은 선비들 중에 총명한 이들이 많으니, 적당한 인물을 키워서 삼사 년 후에 상서령으로 세우십시오. 한 명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으니, 두 명을 키워서 그중의 한 명을 선택하면 좋겠습니다.”
“하하, 좋습니다. 그렇다면 예비 상서령 후보로는 누가 좋겠습니까?”
마초는 넌지시 가후의 뜻을 물었다.
사람의 보는 눈이 그렇게 다를 리 없다. 가후는 마초가 예상하는 그 이름을 말했다.
“제갈공명은 천하의 기재입니다. 중앙 관직을 경험시켜 주면 삼사 년 후에는 상서령을 맡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내 생각도 그렇습니다.”
역시 제갈량의 이름이 첫 번째로 나왔다.
하지만 한 사람만 내정해 두고 움직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른 요직에서 제갈량이 더 필요할 수도 있고, 상서령에 더 적합한 인물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제갈공명을 가장 크게 쓰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더 관찰해봐야 합니다. 상서대보다는 지방관이나 사공부 쪽이 더 맞을 수도 있지요.”
“가 선생의 마음이 꼭 내 마음과 같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후보로는 누가 좋겠습니까?”
“두 번째 후보로는…….”
가후는 평소 눈여겨보고 있던 젊은 관리의 이름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