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서전 (2)
둥. 둥. 둥.
멀리서 북소리가 울렸다.
7만 조조군이 진군해 오는 북소리였다. 군막 안에 모인 이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원래 마초가 앉아 있어야 할 상석은 비어 있었다. 마초가 누규의 별동대를 요격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수시로 출진하는 마초 대신 마가군의 지휘를 맡고 있는 것은 가후였다. 대군이 진군해 오거나 말거나 그의 표정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방금 전령이 와서 오사진의 적을 격멸했다고 알려 왔으니, 대장군께서 곧 복귀하실 것이오. 그때까지 우리는 계획대로 진행합시다.”
온현의 곳곳에는 대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는 영채와 요새가 세워져 있었다. 이 방어 시설들을 활용해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남쪽의 원군을 기다리는 것이 이번 싸움의 전략이었다.
“우리는 이보다 더 불리한 싸움을 여러 번 치렀고, 전부 이겨냈소이다. 이번에도 반드시 이길 것이니 제장들께서는 긴장하실 필요 없소.”
가후는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자리에 모인 장수들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드러나 있었다. 가후라고 해서 긴장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휘부의 핵심인 그가 긴장을 드러내는 것은 사기에 좋지 않았다. 경험이 많은 가후에게는 이런 상황에서 일부러 평온함을 내비칠 정도의 노련미가 있었다.
‘그런데 이자는…….’
그런 가후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온현의 현령 제갈량이었다.
아마도 나이는 좌중에서 가장 적을 것이다. 그러나 이 청년의 잘생긴 얼굴에는 아무런 불안감도 보이지 않았다.
재주 있는 이들이 실패하고, 뜻 있는 이들이 추락하는 것을 지겹도록 겪은 가후다. 이제 와서 전도유망한 청년을 본다고 해서 호기심이 동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 청년만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제갈 현령은 이번이 첫 출진이 아니시오?”
“그렇습니다.”
“그런데 전혀 긴장한 기색이 없으시구려.”
“기강이 바로 선 군은 졸장이 이끌어도 지지 않으며, 기강이 없는 군은 명장이 이끌어도 이길 수 없습니다. 온현의 수비병들도, 학소 공이 이끌고 온 병주군도, 사마가의 가병들도 전부 기강이 엄정합니다. 우리가 질 이유가 없는데 어째서 긴장하겠습니까.”
제갈량이 담담하게 말했다. 듣던 가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오. 모두 들으시오. 공을 탐내지 말고 각자가 맡은 임무에 충실하시오. 굳이 적을 격멸하기 위해 애쓸 필요 없소. 대장군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루가 지날수록 우리는 더 승리에 가까워질 것이오.”
시간은 마가군의 편이다.
그러니 가후는 서두르지 않고 방어에 힘쓸 생각이었다.
예외가 있다면 단 한 번.
‘서전에서는 상대의 기세를 꺾어 둘 필요가 있겠지.’
그것이 바로 오늘이었다.
상대의 예봉을 정면으로 꺾기 위해 마초가 직접 나서서 상대의 별동대를 요격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용장이 조조군을 상대하기 위해 영채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라면 조조군의 선봉을 맞이해 강렬한 인상을 남겨 줄 것이다.
* * *
“으아아악!”
화살에 맞은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우금은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저런 걸… 저런 걸 어떻게 쏜다는 말이냐?”
마가군 영채에서 날아온 화살은 장창만 한 길이에 사람의 허리통만 한 굵기를 가지고 있었다. 화살이라기보다는 기둥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한 물건이었다. 영채에서 누군가가 그런 물건을 백 보가 넘게 날려 보내고 있었다.
부우우웅.
다시 한번 기둥뿌리만 한 화살이 날았다. 파공음이 들리자 병사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콰앙!
화살은 다시 한번 땅을 강타했다.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혼비백산하며 흩어졌다.
숱한 전장에서 공을 세워 온 조조군의 상장 우금도 처음 보는 병기였다.
조조군의 선봉을 맡은 우금은 영채를 공략하기 위해 밀집 대형으로 영채에 접근했다. 우금이 이끄는 병사들은 큼지막한 방패를 들고 있으니 화살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접근하니 영채에서 누군가가 거대한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방패로는 기둥만 한 화살의 질량을 막을 수 없었다. 평소 엄정한 기강을 자랑하는 우금의 군사들이지만 저런 물건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데는 도리가 없다. 화살이 닿는 곳마다 대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형주에 천근노를 쏘는 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금의 곁으로 다가온 부장 이전이 말했다. 연주 호족 출신으로 용맹과 지모를 겸비한 청년이었다.
“천근노라고?”
“누자백이 데려온 형주 출신 군사들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형주자사부에 천 근의 강노를 당겨서 천 량의 화살을 날릴 수 있는 군관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형주자사부를 사직하고 마초를 따라나섰다고 하더군요.”
우금은 이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천하는 넓으니 그런 용력을 가진 자도 있겠지. 마초는 유독 용맹한 자를 선봉에 세우는 경우가 많으니, 형주에서 그런 자를 발탁해서 선봉으로 삼았을 수도 있겠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개인의 용력으로 전쟁을 하는 시대는 끝났다. 저만한 화살이라면 몇 개 가지고 있지 않을 터. 만성(이전의 자),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소장의 생각도 같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힘자랑이 멈출 것입니다. 그때 들이치지요.”
우금이 맡은 부대는 항상 엄정한 군기를 유지했다. 사기는 높고 무장 상태도 좋았다. 지휘관인 우금의 전술은 항상 상대보다 한 수 위에 있었다.
우금은 이런 것들이 전쟁의 승패를 가른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실제로도 그런 방식으로 계속 이겨서,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왔다.
예상은 들어맞았다. 건축자재로 쓰일 법한 통나무를 깎아 만든 천근노의 화살은 십여 발을 쏘자 떨어졌다. 재료도 쉽게 구할 수 없고, 가공에도 많은 품이 들어가는 물건을 그렇게 많이 비축하고 있을 리 없었다.
“궁수대, 위치로!”
우금이 눈짓을 하자 이전이 호령했다.
저만한 용장이 영채 안에서 천근노 열 발만 쏘고 가만히 있을 리 없다. 틀림없이 밖으로 나와서 자신의 용력을 증명하려 할 것이다.
끼이이익.
예상대로, 영채 안에서 온통 검은 칠을 한 수레가 한 대 나왔다. 수레의 전면과 윗면에 대형 방패 여러 개를 이어 붙여 단단히 방어하고 있었다.
“쏴라!”
이전이 외치자 궁수들이 화살을 당겼다. 수레에는 순식간에 수십 발의 화살이 꽂혔다.
퍽! 퍽! 퍽!
수레는 계속 전진했다. 그러나 우금과 이전은 당황하지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사격을 가했다.
“저만한 수레라면 말 서너 마리가 끌고 있을 터. 말이 화살에 맞지 않게 하려고 방패로 가려 놓은 건가. 하지만 말은 눈이 보이지 않으면 겁을 먹지.”
“계속 일제사격을 가하면 말들이 먼저 놀라서 후퇴할 것입니다.”
퍽! 퍽! 퍽! 퍽!
수레는 순식간에 고슴도치처럼 변했다.
그런데 마땅히 일어나야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수레는 처음과 다름없는 속도로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이전은 당혹했다. 우금도 가만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수레가 가까이 다가오니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말이…….”
“없다고?”
수레에는 말이 없었다. 사람 한 명이 끌고 있었던 것이다.
척.
어느새 적진에 접근한 수레에서 방패 한 개가 움직이더니, 수레를 끌고 온 사람이 나타났다. 병졸들과 같은 갑옷을 입고 있는, 엄청난 거한이었다.
“과연 조조군은 좀 다르군. 남쪽 군사들보다 훨씬 잘 쏘는데?”
적진 바로 앞까지 단신으로 방패 수레를 끌고 온 황충이 씩 웃었다. 왼손에는 몸을 다 가릴 만한 거대한 방패를 들었다.
좀처럼 병장기를 쓰지 않고 천근노와 방패로 문제를 해결하는 황충이다. 하지만 오늘은 오른손에 아주 가끔씩 쓰는 병장기를 들고 있었다. 끝으로 갈수록 굵어지는 쇠몽둥이에 여러 개의 돌기를 만들어 놓은 무기, 낭아봉이었다.
퍽!
옆에서 보고 있던 군사들이 황충을 향해 창을 찔렀다. 황충은 말없이 방패를 세워 막으며 팔뚝에 힘을 줬다.
“어억?”
먼저 창을 내지른 병사 하나가 뒤로 튕겨 나갔다. 방패 너머의 황충이 꿈쩍도 하지 않으니, 자신이 창을 쓰는 힘이 그대로 반동이 된 것이다.
주변의 병사들이 경악하는 것을 보며, 황충은 오른손의 낭아봉을 옆으로 쓸었다.
펑!
쇠몽둥이가 갑옷 입은 병사를 때리는 소리다. 하지만 금속성의 파열음보다 폭음이 더 컸다.
낭아봉에 맞은 병사의 몸이 터져 나가며 사방으로 피를 흩뿌렸다. 황충은 낭아봉을 몇 번 잡아 돌려서 주변의 병사들을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몸을 낮추고 방패를 위로 들었다.
퍼퍼퍽!
궁수들이 쏜 화살이 황충의 방패를 맞고 튕겨 나갔다. 조직이 치밀한 남방의 나무에 철판까지 둘렀으니 어지간한 화살로는 뚫을 방법이 없었다.
황충의 눈에 수레가 하나 들어왔다. 영채를 공략할 수 있도록, 분해해 둔 정란을 실은 수레였다.
황충은 그대로 수레 옆으로 다가갔다. 발로 수레의 옆면을 밀면서 차자 수천 근에 달하는 수레가 기우뚱거리며 옆으로 넘어졌다.
우당탕!
수레는 발차기 한 방에 옆으로 넘어갔다. 황충은 곧이어 낭아봉으로 정란을 짓이기기 시작했다. 힘들게 끌고 온 정란은 황충의 손에 부서졌다.
우금은 짧게 감상을 말했다.
“대단하군.”
전쟁터의 상식을 깰 수 있는 무장을 천하 용장이라 부른다. 네 명의 천하 용장이 전부 있었던 개봉대전에 우금 또한 참전했었다. 그들 중 한 명인 장비와는 직접 창을 맞대 보기도 했다. 그들은 다른 장수들과는 격이 다른 무위를 갖고 있었고, 그만큼 큰 명성도 갖고 있었다. 여포, 관우, 장비, 그리고 마초의 이름을 말하면 누구라도 알아들을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은 남방에서 온 무명의 무사가 그들에게 거의 근접하는 무용을 뽐내고 있었다. 황충은 장비보다 크고 관우보다 굵은 몸으로 터무니없는 괴력을 발휘했다. 그가 휘두르는 낭아봉에 조조군의 대열이 뭉개지고 있었다.
“장군. 호표기를 내보내 저자를 저지하겠습니다.”
이전이 나섰다.
우금은 흘긋 고개를 돌려 마가군 진영 쪽을 바라봤다. 황충이 단신으로 돌격해 온 틈을 타 마가군 병사들이 전진하고 있었다. 여기서 황충을 저지하지 못하면 첫날의 전투는 패배로 돌아갈 것이 자명했다.
“알았다. 단,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전은 즉시 오십 기의 호표기를 소집했다.
하나하나가 선봉장이라고 불리는 호표기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우금의 부대에도 오십 기가 편제되어 있었다. 이들의 임무는 난전이 벌어졌을 때 지휘관을 지키는 것, 패전하게 됐을 때 지휘관의 퇴로를 여는 것, 그리고 상대 맹장이 나타났을 때 제압하는 것이었다.
이전은 호표기를 이끌고 황충을 향해 돌진했다.
“산양의 이전이다! 적장은 도전을 피하지 말라!”
“아아, 조조군 장수인가? 아직 젊은 친구로군. 나는 남양의…….”
황충은 이전을 보며 자신을 소개하려 했다.
그러나 이전은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대로 말을 달려 황충을 지나쳐 가며 칼을 뽑아 들었다. 산양 이가에 가전으로 내려오는 5척 장도였다.
‘반드시 벤다.’
개봉대전에서 장비의 손에 큰 부상을 입고 무장으로서의 생명이 끝난 사촌 형, 이정이 떠올랐다. 앞으로는 어떤 용장이 상대라도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었다. 이전은 이를 악물고 황충의 머리를 베고 지나갔다.
깡!
황충의 투구가 이전의 칼에 맞아 하늘로 날았다.
황충은 고개를 젖힌 채 비스듬히 서 있었다. 간신히 머리가 날아가는 것은 피했지만, 말을 타고 달려오는 상대의 칼을 투구로 받아냈다. 보통 사람이라면 운이 나쁘면 목 골절, 운이 좋아도 뇌진탕 증세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황충은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우두둑.
황충은 남들보다 두 배는 굵은 목을 몇 번 꺾었다. 그리고 별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훌륭한 일격이군. 좀 더 수련하면 이름을 꽤나 떨치겠는걸.”
“호표기, 쳐라!”
이전은 여전히 황충과 대화를 할 생각이 없었다. 이전이 지시하자 호표기 오십 기가 황충을 둘러싸고 넓게 산개했다. 그중의 십여 기가 먼저 황충을 향해 돌진했다.
붕. 붕. 붕.
황충은 달려오는 호표기를 응시하며 손목을 써서 오른손에 든 낭아봉을 돌렸다. 무게만 삼십 근에 달하는 육중한 쇠몽둥이가 황충의 손안에서 마치 돌팔매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