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결전 전야
육손이 지른 불은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화공을 견디지 못한 전예는 결국 퇴각을 선택했다.
“다시 강을 건너라!”
병력의 수는 월등하고 질도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좋지 않은 시점에 기습을 당했다. 고작 100기를 이끌고 전선을 휘저은 장료의 칼날 아래 답돈과 견초가 전사했다. 장료 휘하의 이름 모를 부장은 용병술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결국 오환돌기는 힘들게 건너온 황하를 다시 건너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제길, 내가 무슨 낯짝으로 장공자를 다시 본다는 말인가!”
전예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보급 수레를 모두 잃었으니 오환돌기가 단독 작전을 하기는 힘들게 되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오환족의 지도자 답돈이 어처구니없이 전사했다는 것이다. 수장을 잃은 오환족이 과연 조조군 휘하에 계속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싱글벙글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장료에게 육손이 보낸 전령이 닿았다.
“적장의 지휘 솜씨가 범상치 않으니 가능하면 이 자리에서 처리하라고?”
“그렇습니다. 육 부장이 말하기를, 살려 두면 훗날 나라의 우환이 될 만한 인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사로잡아 아군으로 귀부시키거나, 또는 참살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장료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싸움은 육백언이 압도적으로 이긴 것 아닌가? 그런데도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건…….’
적장은 육손에게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인물이라도 나중에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듣기에 따라서는 과도한 자신감으로 들릴 수 있었다.
“하여튼 그 녀석도 참. 알았다. 적장을 내가 직접 추격하겠다고 전해라.”
하지만 장료는 이미 육손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그 또한 육손의 재주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안목이 있었던 것이다.
장료는 육손의 말을 듣고 퇴각하는 적의 섬멸에 나섰다. 목표는 하나, 퇴각을 지휘하고 있는 적장이었다. 중간에 포로들을 잡아 심문해 보니 적장의 이름이 전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예는 도망치지 마라!”
장료는 우렁차게 외치며 황하의 강안을 향해 말을 달렸다.
그런데 그런 장료의 앞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병주에 있어야 할 장 장군이 무슨 일로 맹진까지 와 있습니까.”
하얀 얼굴에 문관풍의 외모. 차분한 말씨. 그리고 그에 어울리지 않는 8척의 거대한 장검.
오환돌기를 지원하기 위해, 호표기를 이끌고 뒤에서 따라가던 표기장군 조인이었다.
“오호, 표기장군이구만. 조 승상이 역적질했다는 소문이 병주까지 파다하지 뭔가.”
“그렇습니까.”
장료와 조인.
원래의 역사에서, 조조 휘하 최강의 장수를 꼽으라면 첫 손에 꼽히는 두 사람이다. 후세 사람들은 둘 중 누가 우위인지 끝없이 논쟁했지만, 오늘날까지도 명쾌한 결론은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둘 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이자와 생사결을 하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
‘이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졌을 경우는 어떻게 뒷감당을 할 것인가?’
장료가 진다면, 현재 낙양 근처의 유일한 마가군 대부대인 병주군이 역으로 패주하게 될 것이다. 마가군의 차세대인 육손과 학소 또한 목숨을 장담하기 힘들다.
조인이 진다면, 오환돌기에 호표기까지 포함된 조조군의 최정예 부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을 것이다. 이 병력은 보충할 수 있는 병력이 아니다.
“표기장군의 팔척검과 나의 참마검, 어느 쪽이 위인지 겨뤄 보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우리 두 사람이 어깨에 지고 있는 게 너무 많은 것 같군요.”
조인이 말하자 장료는 피식 웃고 참마검을 거뒀다.
“어차피 조만간 큰 싸움터가 있겠지. 그때는 서로 상대하기로 약속하자고.”
“전쟁은 사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장 장군과 겨룬다는 약조는 해 드릴 수 없습니다.”
“뻣뻣하기는.”
장료는 미련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조인도 다시 황하를 건너기 시작했다.
* * *
“장군. 대승입니다.”
“으하하하! 육백언, 학백도, 수고했다.”
장료는 기분 좋게 부장 육손과 아장 학소를 치하했다.
갑작스러운 조인의 등장으로 상대 지휘관 전예의 목은 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조가 야심차게 준비한 오환돌기를 패퇴시켰다. 보급 수레를 전부 태우거나 빼앗았고, 오환 대인 답돈의 목까지 벴으니 오환족의 발을 묶어 놓을 수도 있게 되었다.
“유목민은 다들 행동 방식이 비슷하거든. 지도자가 급사하면 수많은 부족들이 모여서 차기 지도자부터 뽑지. 한인들의 싸움에 끼어들기로 한 답돈이 죽어 버렸으니, 아마 지금쯤 자기들끼리 치열한 권력 싸움을 하고 있지 않을까?”
장료는 북방 병주 사람이라 유목민의 행동 방식에 정통해 있었다.
육손이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포로들의 말을 들어보니 조조는 대장군께서 온현에 있을 거라 짐작하고 오환돌기를 온현으로 보내는 길이었다고 합니다.”
“온현이라. 그것도 그럴싸하군. 왜, 과거에 장원급제한 그 친구가 온현 현령으로 갔다고 했잖아. 이름이 아마… 제갈공이었나? 아니면 제갈명이던가?”
“제갈량입니다.”
“아아, 그래, 제갈량. 하여튼 그 친구가 우리 쪽 사람이잖아. 낙양에 정변이 일어났는데 주요 인사들이 대부분 탈출했다고 하니 아마 감흥패가 낙수를 통해서 뱃길로 탈출시켰을 테고, 뱃길에서 가까운 온현 같은 곳에 현령의 비호를 받으며 숨어 있다면 지금까지 잡히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가지.”
“하면, 이제 온현으로 가실 겁니까?”
“네 생각은 어떠냐?”
장료는 장난기 있는 표정으로 육손의 생각을 물었다. 군략을 말할 때가 되자 육손의 눈이 번쩍 빛났다.
“주공께서 기다리실 테니 마땅히 가야겠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더 좋은 방법이라면?”
“일만 군사를 둘로 쪼개십시오. 칠천은 학백도가 이끌고 온현으로 가서 대장군에게 합류합니다. 이때, 장 장군의 군기를 올려서 장 장군이 온현의 대장군에게 합류한 것처럼 꾸미는 겁니다.”
“그러면 너와 나, 그리고 나머지 삼천 병력은?”
“우리는 황하를 건너서 북망산에 숨는 겁니다.”
“그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대장군이 살아있으니, 조조는 이제 전력으로 동쪽의 온현을 칠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서쪽이 비지 않겠습니까.”
낙양의 서쪽에 함곡관이 있다. 삼하와 관중을 가르는 경계선이 되는 관문이다.
조조의 정변이 일어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이제 곧 서쪽에서 마가군 본대가 함곡관으로 들이닥칠 것이다.
“그때 함곡관을 뒤에서 치자는 건가.”
“그렇습니다. 대장군이 아무리 강용하시다 한들, 일만 남짓한 군사로 조조군의 주력을 깨뜨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대장군이 일만의 군사를 손에 쥔다면 조조에게 잡히지 않고 시간을 끄는 것은 쉬운 일이지요.”
동쪽의 마초가 시간을 끌고 있는 동안, 서쪽에서 진격해 오는 마가군 본대가 거대한 쐐기가 되어 함곡관을 뚫고 낙양을 친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작전이다. 문제는 함곡관이 서쪽으로부터의 대규모 침공을 막는 데 최적화된 요새라는 점이다.
“그때, 팔관 안쪽에서 정예병 삼천이 나타나 함곡관을 뒤에서 협공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낙양이 위치한 삼하 지방은 곳곳이 산맥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사이사이의 통로에는 여덟 개의 큰 관문을 설치해서 둘러쌌는데, 이를 낙양 팔관이라 한다. 팔관을 다 막으면 거대한 닫힌 세계가 되는 구조인 것이다. 함곡관은 팔관 중에서도 가장 튼튼한 관문이었다.
그런데 튼튼하게 보호받고 있는 함곡관을 안에서 같이 들이친다면?
장료는 감았던 실눈 한쪽을 떴다. 그리고 육손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너도 어지간히 제정신이 아닌 놈이군. 좋아, 우리는 북망산에 숨는다. 그리고 마가군 본대가 함곡관에 들이닥치는 날 하산하여, 조조군을 뒤에서 칠 것이다.”
동쪽 온현의 마초가 조조군을 맞아 시간을 끄는 사이, 서쪽의 함곡관을 먼저 뚫어서 싸움을 끝낸다.
장료는 육손이 낸 대담한 계책을 흔쾌히 채택했다. 그 정도의 전공이 아니면 만족할 수 없었다.
* * *
낙양, 조조의 자택.
평복 차림의 조조가 장남 조앙과 마주하고 있었다.
평소 누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았던 조앙이다. 그러나 지금은 긴장을 감출 수 없었다.
“자수.”
조조는 낮은 목소리로 조앙의 자를 불렀다. 그리고 조앙이 대답하기도 전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네가 원본초의 며느리를 첩으로 삼아 세간의 눈총을 받았을 때는 그냥 넘어갔다. 원하는 것을 반드시 얻어내는 집념도 패자의 자질이라 생각했느니라.”
“송구합니다.”
“그런데 지금 네 꼴이 어떠냐? 수만금을 들여서 육성한 오환돌기를 절반이나 잃었다. 오환 대인 답돈이 전쟁터에서 목이 날아갔으니, 오환족들은 자신들끼리 새 대인을 뽑겠다고 북쪽으로 돌아가겠지. 하북 귀족들의 손가락질을 받은 것도 모자라서, 이제 북방의 이민족들에게까지 믿을 수 없는 자로 낙인찍힐 셈이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승상.”
조조에게는 아들이 많다.
십여 명의 첩에게서 그 이상의 아들을 얻었다. 서자라고 큰 흠은 되지 않는다. 조앙 또한 본래 서자였으나, 생모가 죽은 후 정실인 정 부인의 양자로 입적하여 적자의 신분을 얻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앙 바로 밑의 세 아우, 애첩 변씨 소생의 조비, 조창, 조식은 각각 만만치 않은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후계자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이 실패를 만회해야 한다.’
조앙은 부복하여 표정을 숨겼다. 그리고 조조의 말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이제 어떻게 할 셈이냐?”
“이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나겠습니다.”
“기세는 좋구나. 복안이 있느냐?”
“곧 온현을 공격하실 것으로 압니다. 살아남은 오환돌기를 이끌고 참전하여 반드시 공을 세우겠습니다.”
“오환 대인이 죽었는데, 무슨 수로 오환돌기를 계속 참전시킨다는 말이냐?”
“오환족은 본래 오환산으로 들어온 선비족들을 가리키는 바, 단일한 민족이 아닙니다. 강족이든, 흉노든, 한인이든 실력만 있으면 그들의 대인이 될 수 있습니다. 소자의 주변에 오환 대인으로 세울 만한 적당한 인물이 있습니다.”
오환족을 이끄는 우두머리는 경험보다 실력이 우선이다. 무엇보다 강인한 무사여야 한다. 묵돌선우의 환생이라고까지 불리던 답돈 이상의 힘을 갖춘 인물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조조 휘하의 무장이 아니라 조앙의 측근으로 있다는 말인가?
조조의 얼굴에 흥미로운 기색이 떠올랐다.
“대담한 발상이다. 그자의 이름을 말해 보거라.”
조조조차 모르는 인재를 조앙이 먼저 알아보고 발탁했다면, 그 또한 훌륭한 후계자의 자질일 것이다.
그런데 조앙의 입에서는 의외의 이름이 나왔다.
“자문(子文)입니다.”
“뭣이?”
조창, 자는 자문.
조조의 셋째 아들이자 조앙의 아우다. 그의 이름이 나오자 천하의 조조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자수, 네가 이 아비를 능멸하려는 것이냐?”
“자문의 나이 벌써 열여섯입니다. 승상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자문은 하늘이 내린 용력을 타고나 벌써부터 영웅의 기상이 있습니다. 자문이라면 오환족을 통솔할 수 있습니다.”
조창은 10대의 나이에 이미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다고 전해진다.
원래의 역사에서 조창은 많은 무공을 세우지 못했다.
조창은 너무 늦게 태어났다. 그가 성년이 되었을 때는 이미 여러 번의 큰 전쟁들이 끝난 다음이었다. 또한 후계다툼에서 밀려난 왕자라는 제약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창은 몇 번 되지 않는 북방 이민족과의 전투 기회에서 압도적인 무용을 선보였다.
조조는 조앙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자문에게 재주가 있다면 쓰는 것이 당연하겠지. 그러나 자문이 큰 공을 세운다면 너는 어쩔 셈이냐? 열여섯의 나이로 오환 대인이 될 만한 능력을 가진 자문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오환돌기까지 얻게 되는 것이다. 자수, 나는 아직 후계자를 확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승상께서 염려하실 일이 아닌 줄로 압니다.”
조앙은 단호했다.
조앙에게는 조창을 통제할 자신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여차하면 조창을 죽여서라도 권력을 잡겠다는 의지의 표현일까.
조조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마. 네 뜻대로 자문과 함께 온현 공략에 종군하라. 이번에는 반드시 공을 세워서 과를 씻어야 할 것이다.”
조조는 조앙의 청을 흔쾌히 승낙했다.
조앙이 아우에게 충성을 받아낼 생각인지, 나중에 아우를 제거할 생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이든, 그걸 해낸다면 권력자의 자질을 증명하는 것이다.
‘만약 자수가 둘 다 실패한다면, 그때는 자문에게 자질이 있다는 소리겠지.’
조조는 그렇게 생각하며 풍성한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는 후계자가 장남이 되든, 삼남이 되든 큰 관심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