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극염(極焰)
맹진.
낙양성의 북쪽에 있는 포구다.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치기 위해 거병했을 때, 천하의 제후들이 모여서 회맹을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조앙이 이끄는 1만 오환돌기는 이 맹진 포구를 통해 황하를 건너고 있었다.
“국양(전예의 자), 자네는 온현에 마초가 숨어 있을 것이라 보는가?”
“아마 그렇지 않겠습니까.”
조앙이 묻자 전예는 특유의 태평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마초 혼자라면 어디로든 도망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사라진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가후, 조운, 감녕… 이렇게 많은 자들이 없어졌다는 건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뜻이지요. 저 또한 일찍부터 온현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곽 선생이 말하기를, 온현의 현령이 본래 서주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건 몰랐습니다. 그보다는 온현의 대호족 사마가가 수상했지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천하제일의 대부호인데 정치에는 부득부득 끼어들지 않는 것도 그렇고, 장자인 사마백달이 정전제 같은 허황된 주장을 하는 것도 그렇고 말이지요.”
전예는 군사를 지휘하는 일에만 뛰어난 인물이 아니다. 모사들 못지않은 식견도 갖추고 있었다.
조앙은 그런 전예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또 다른 부장 견초가 다가와 군례를 올렸다.
“절반 정도 도하가 끝났습니다. 답돈 대인이 먼저 건너가서 도하를 지휘하고 있습니다.”
“답돈이 지휘하는 모습은 어떻던가?”
“실로 영웅입니다. 거친 오환족들을 말 한마디로 일사불란하게 통솔합니다. 묵돌선우의 재림이라는 말이 허튼소리가 아닌 걸로 보입니다.”
“그런가. 그자도 어지간히 공을 탐내고 있겠군.”
답돈은 조앙과 손을 잡기로 결정한 자리에서, 꼭 마초를 상대하게 해 달라고 청했던 바 있다.
만약 마초가 정말로 온현에 은거하고 있다면 그의 희망이 곧 이뤄지게 될 것이다.
“운이 좋군. 금철기를 이끄는 마초가 아니라, 정변으로 쫓겨나서 은거하고 있는 마초를 상대하게 되다니.”
이미 패왕 항우의 재림이라는 명성을 얻은 마초다. 답돈이 마초를 잡으면 그때는 모두가 답돈을 묵돌선우의 재림이라고 여기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때, 전예의 표정이 굳었다.
“장공자. 보이십니까?”
조앙은 전예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뿌연 흙먼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 * *
“설마 오환족에게 금철기의 무장을 입힐 줄은 몰랐는데.”
“조조는 좋은 건 뭐든지 받아들인다고 하더군요.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는 원소 같은 이들보다 훨씬 무서운 인물입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
장료는 부장 육손에게 물었다.
“오환돌기가 황하를 건너고 있군. 백언, 어찌할 테냐?”
“공격해야 합니다. 비록 아군의 숫자가 적고 먼 길을 와서 피로하지만, 적은 지금 강을 반쯤 건너고 있으니 적이 더 불리합니다. 게다가 상대가 중장갑을 입은 기병대라면 더욱 강을 건너는 중에 쳐야 합니다.”
1만 병주군 중, 지금 장료와 육손이 이끌고 온 선봉대는 기병 2천이었다. 반면 상대인 오환돌기의 수는 어림잡아 1만을 헤아리니, 5배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육손은 단호했다. 장료는 그런 육손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이길 자신은 있고?”
“있습니다.”
“좋아, 해 보자. 네가 부대를 지휘해라.”
장료는 약관의 육손에게 부대 지휘를 통째로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칼을 꺼내 들었다.
과거에 그가 들고 다니던 장검과 모양이 조금 달랐다. 원래 쓰던 폭이 넓은 장검에 창처럼 긴 자루를 끼워서 만든 참마검(斬馬劍)이었다.
참마검은 본래 보병들이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쓰는 장병기다. 장료는 이 참마검을 개량해서 마상에서 쓰기 위한 무기로 만들었다. 4년 전, 여포와의 대결에서 간신히 살아남으며 많은 것을 느낀 후 마상 전투를 위해 준비한 것이다.
‘내가 가장 자신 있는 건 검술이지만, 짧은 검으로는 주공이나 온후 같은 무공을 세울 수 없어. 혼자 전장을 휩쓸기 위해서는 장병기가 필요하다.’
장료는 참마검을 들어 몇 번 허공에 돌린 뒤 긴 자루를 옆구리에 비스듬히 끼웠다. 그리고 육손을 돌아보며 한마디를 던졌다.
“마음껏 싸워라. 네가 이길 수 있도록, 내가 전황을 바꿀 테니.”
두두두두.
장료는 그 말과 함께 기병 100기만을 이끌고 달려 나갔다.
육손은 달리는 장료의 등을 보며 잠시 손을 모아 군례를 올렸다. 그리고 깃발을 들어 부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군 전진. 적이 완전히 강을 건너기 전에 들이친다.”
맹진 포구의 북쪽은 너른 벌판이다. 육손의 지휘를 따라 2천 기병대가 넓게 퍼지는 데는 아무 장애물도 없었다.
한편, 오환돌기의 선봉에 서서 가장 먼저 황하를 건넌 답돈은 팔짱을 낀 채 북쪽에서 접근하는 기병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가군의 병주 방면군인가. 우리가 기주에서 빠져나와 낙양으로 들어온 것을 눈치채고 따라왔나 보군.”
“답돈 대인. 마가군 기병대는 귀속군 못지않게 빠르고, 활을 쏘면 빗나가는 법이 없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일단 신중하게 방어해야 합니다.”
흙먼지가 이는 것을 보고 급히 강을 건너온 전예가 답돈에게 말했다. 그러나 답돈은 코웃음을 쳤다.
“마가군 기병이라면 강족이나 흉노 같은 어중이떠중이들이 잔뜩 섞여 있겠지. 이때야말로 우리 오환이 천하에 이름을 떨칠 때요. 전 장군은 구경이나 하시오.”
답돈은 휘하의 기병대를 이끌고 정면으로 달려 들어갔다. 전예는 그 모습을 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하는 수 없지. 답돈 대인의 무용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답돈이라면 일부 희생을 치르더라도 적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마가군 기병들이 접근하는 속도가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전예가 불길한 예감을 느꼈을 때, 마가군 궁기병들의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다. 화살이 순식간에 시꺼멓게 하늘을 뒤덮었다.
휘우우웅.
퍽!
나관중이 14세기 양식의 단단한 등자를 처음 개발한 지 10년이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마가군의 전원이 등자를 사용한 기마에 익숙해져 있었다. 발을 단단히 디딜 수 있으니 돌격의 파괴력은 더 강해지고, 화살의 사거리도 더 길어졌다.
육손이 이끄는 마가군 기병대는 강렬한 첫 공격을 가했다. 범용한 장수라면 당황해서 한 번에 대열이 흐트러질 수도 있는 공격이었다.
그러나 전예는 아직 침착했다.
“수레를 펼치고 그 뒤로 숨어라! 적의 공격을 막아내면 우리의 승리다!”
전예의 호령에 따라 오환돌기가 수레 뒤로 숨기 시작했다.
수레 뒤에 숨어서 화살을 막는 것은 정주민 군대가 유목민 궁기병을 상대하는 오래된 전술이다. 이번에는 유목민 출신인 오환돌기가 방어하고, 구성은 다양할지언정 어쨌든 한인 군대인 마가군이 공격한다는 점이 특이할 뿐이다.
‘적은 먼 거리를 달려왔고, 한 사람이 지닐 수 있는 화살의 수는 한정되어 있다. 반면 우리는 보급수레와 함께 움직이고 있으니 화살을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다. 이대로 오랫동안 공방전을 벌이면 적의 화살이 먼저 떨어질 것이다.’
게다가 체력도 문제다. 활을 쏘고 물러나는 궁기병의 전술은 사람과 말의 체력소모가 극심했다. 보급수레 뒤에 숨어서 큰 피해를 입지 않고 교전하고 있으면, 적의 화살이 떨어질 때쯤 발도 같이 느려지며 반격의 기회가 올 것이다.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육손은 전예의 단단한 수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조군에 인물이 있군.”
원래의 역사에서 전예는 수십 년에 걸친 북방 이민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병법에 능한 자라면 누구나 전예의 뛰어난 지휘 능력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상대는 육손이 아닌가?
“날이 건조하구나.”
육손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음력 4월, 아직 장마가 시작되기 전이다. 황하의 물도 많이 줄어들어 있었다. 지금 그들이 싸우는 전장은 바람이 불 때마다 흙먼지가 폐부를 찌르는 건조한 황토 지대였다.
기주에서 낙양으로 달릴 때부터, 육손은 이 날씨에 이런 장소에서 싸우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화시(火矢)를 준비하라.”
육손의 명이 떨어지자 한쪽에서 군사들이 불을 피웠다. 그리고 불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첫발은 들판 곳곳에 떨어졌다. 여기저기 불길이 올랐고, 늦봄의 건조한 날씨가 불을 키웠다. 불이 제대로 붙지 않는 곳에는 군사들이 달려가서 직접 불을 놓았다.
“이런 빌어먹을!”
전예는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 전예가 화살을 막는 방벽으로 쓰고 있는 군용 수레는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천과 가죽으로 지붕을 덮은 물건이다. 군량이 비에 젖지 않게 하기 위해 기름도 잔뜩 먹였다.
즉, 거대한 인화물질로 방벽을 친 꼴이 된 것이다.
화르르.
건조한 바람을 타고 불꽃이 번지기 시작했다. 들판을 태우는 불꽃을 바라보며 전예는 이를 갈았다.
“수레를 뒤로 물려라! 물을 길어서 불이 번지는 것을 끊어내라!”
“전 장군, 하오나 지금 수레를 물리면 적의 화살이…….”
“불화살에 전부 타 죽고 싶은 것이냐!”
수레를 물리다 화살에 맞는 것은 병력의 손실로 끝난다. 그러나 수레에 불이 붙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보급물자가 타 버리면 오환돌기가 작전 능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러니 전예는 다소의 희생을 감수하며 병력을 물릴 생각이었다.
“적장에게 완전히 당했구나. 마가군의 병주 방면군이면 적장은… 장료인가? 다음에는 절대 지지 않을 것이다.”
장료 대신 지휘하고 있는 육손의 존재에 대해 전예가 알 리 없다. 전예는 적장에게 설욕을 다짐하며 퇴각하려 했다.
그런데 육손은 전예가 퇴각하도록 두지 않았다.
“돌격해서 적의 수레에 불을 붙여라.”
육손이 지시하자 마가군 2천 궁기병이 그대로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과감한 돌격이었다. 궁기병들은 벌판을 크게 가로지르며 불씨를 던지고 수레에 불화살을 쐈다.
고도로 훈련된 마가군 기병이기에 가능한, 정교한 움직임이었다.
퍽! 퍽! 퍽!
기름을 먹은 수레에 연이어 불화살이 꽂히며 시커먼 연기가 올랐다.
전예가 적장에게 완전히 밀리는 것을 보자 전장에 있는 모두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앞에서는 뛰쳐나갔던 답돈이 돌아오고, 뒤에서는 견초가 다시 강을 건너서 불을 끄려 했다.
그리고 그때.
“좋아. 이제 다 모였군.”
100기를 이끌고 사라졌던 장료가 전장을 크게 우회해서 측면에 나타났다.
척.
참마검을 뽑아 적진과의 거리를 가늠해 보니, 한 번 돌격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장료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을 따르는 100기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 전부 잘 들어라. 우리들 100명이서 적 1만을 이길 수는 없다. 다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니 무리하지 말고, 딱 두 가지만 하고 빠지자. 첫째, 놈들의 수레를 전부 다 태운다. 그리고 둘째.”
번쩍.
장료가 실눈을 뜨자 뱀처럼 날카로운 눈동자가 드러났다.
“오환족의 대인 답돈을 참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