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인일기두이습유(人日寄杜二拾遺)
기주 한단현.
춘추전국시대 조나라의 수도이자, 지금은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한단현의 남쪽에는 업성이 있다. 위왕이 된 조조가 위나라의 새로운 수도로 지정한 업성은 아직 개발이 완료되지 않아 도시의 규모가 작았다. 한단은 그런 업성에 양식을 공급하는 곡창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한단 벌판을 아군이 장악하면 업성은 보급이 끊어지지. 이제 조금만 있으면 업성에 주둔하고 있는 대군이 못 참고 뛰쳐나오겠군.”
장료는 전황을 둘러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대승이었다.
마초의 서신을 받은 장료의 1만 병주군은 바로 업성 방면으로 접근했다. 유사시 업성을 먼저 공략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전투가 발발했다. 마가군의 깃발을 보자 조조군이 선제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뭔가 심상치 않다. 설마 조조가 먼저 싸움을 시작하려는 것인가?’
뭔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장료는 그대로 업성 공략에 들어갔다. 기세 좋게 선공을 취한 조조군이었지만 장료가 이끄는 병주군에게 글자 그대로 격멸당하고, 업성으로 들어가 농성하고 있었다.
“성을 공략하려면 보급을 끊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기주의 양식은 한단에 모였다가 업성으로 수송되니, 한단을 먼저 쳐서 보급을 끊으십시오.”
“꼭 내 생각과 같다!”
장료는 부장 육손이 조언하는 대로 말머리를 돌려 북쪽으로 진군했다. 조조군의 보급기지가 된 한단현을 공략하려는 목적이었다.
육손이 마가군의 강병들을 지휘하고, 장료가 선봉에 선다. 조조군이 당해낼 수 없었다. 한단 벌판에 모인 조조군은 한나절도 되지 않아 전멸하고, 한단의 군량고는 마가군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번 전투에서도 가장 큰 전공을 세운 것은 육손이었다. 장료는 그를 치하하려 했지만, 육손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만에 찾아내 보니, 육손은 점령한 군량고에 남아 있는 군량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었다.
“육백언이, 뭐가 그렇게 바쁜가?”
“장군. 뭔가 이상합니다.”
“응? 뭐가?”
“업성에 주둔하고 있는 조조군은 1만이 넘을 텐데, 군량의 양이 지나치게 적습니다. 게다가 최근 오환 기병까지 얻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말먹이풀의 비중이 너무 적습니다.”
“으흠. 그래?”
육손의 말을 들은 장료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는 건 이미 군량의 대부분을 업성으로 옮겼거나, 아니면…….”
“업성 주둔군이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지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육손은 즉시 조조군의 군관들을 모아 놓고 확인에 들어갔다.
확인의 절차는 간단했다. 한 명씩 불러서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치아를 하나씩 망가뜨리는 것이다.
“으허허헉, 으헉!”
“끄어어…….”
여윈 몸에 파리한 안색을 한 육손은 직접 집게와 망치를 들고 끔찍한 고문을 시작했다. 서량 출신의 억센 군관들이 차마 지켜보지 못하고 눈을 돌릴 정도였다.
육손이 정보를 알아내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환돌기 1만이 낙양으로 이동했다고?”
업성 주둔군의 주력인 1만 오환돌기가 낙양으로 이동했다. 한단현에 군량과 말먹이풀이 모자란 것은 오환돌기가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휘익.
옆에서 육손이 심문하는 것을 지켜보던 장료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낙양 팔관 안에는 마땅한 목초지가 없지. 그런 곳으로 이민족 기병이 1만이나 들어갔다. 이건 무슨 뜻일까?”
“장군. 아무래도 낙양에 변고가 일어날 것 같습니다. 조맹덕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내 생각도 그래. 자, 그래서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육손은 파리한 얼굴로 장료를 마주 보며 대답했다.
“업성을 쳐서 작은 공을 다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당장 낙양으로 가야 합니다.”
“이것 참, 적당히 공을 세워서 식읍이나 많이 받으려 했는데 그럴 수 없게 됐군. 죽거나, 영웅이 되거나. 둘 중의 하나인가.”
장료는 여전히 긴장감 없는 얼굴을 한 채, 육손을 바라보다 픽 웃었다. 그리고 휘적휘적 걸어가 부하들에게 출진의 신호를 보냈다.
* * *
낙양, 승상부.
조조는 한쪽 턱을 괸 채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젊은 여인이 앉아서 칠현금을 타고 있었다.
키가 작고 얼굴은 동그랗고, 콧대도 높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단한 미인이었다. 조조는 여인의 큰 눈을 꽉 채우는 까만 눈동자와 단아한 이목구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조조의 마음을 더욱 흔드는 것은 목소리였다. 여인은 높고, 또렷하고, 소리가 풍부한 음성으로 시를 읊기 시작했다. 손으로는 칠현금 가락으로 반주를 넣고 있었다.
인일이라 시 지어 초당에 부치네(人日題詩寄草堂).
멀리 있는 옛 친구도 고향 그릴까 안쓰러워(遙憐故人思故鄕).
버들가지 하늘거리는 모습 차마 볼 수 없고(柳條弄色不忍見).
매화꽃 가득 피어도 공연히 애만 끊어진다(梅花滿枝空斷腸).
변방에 매인 몸은 어찌할 길 없는데(身在南蕃無所預).
마음속에 백 가지 근심, 천 가지 걱정이라(心懷百憂復千慮).
금년 인일에 부질없이 서로 그리워하니(今年人日空相憶).
내년 인일에는 어디에 있을지 알까(明年人日知何處).
한 번 동산에 누워 삼십 년 흐르니(一臥東山三十春).
책과 칼이 풍진 속에 늙을 줄 알았으랴(豈知書劒老風塵).
초라한 몸이 도리어 2천 석의 녹을 받으니(龍鍾還忝二千石).
정처 없이 떠도는 그대에게 부끄럽노라(愧爾東西南北人).
“허허허.”
시를 들은 조조는 낮게 웃었다.
그 또한 이 시대 최고의 시인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러니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지금 들은 시는 천 년을 갈 만한 작품이었다.
조조는 자신에게 시를 들려준 채염을 향해 물었다.
“절창이로군. 소희(채염의 자), 그대의 문장인가?”
“아닙니다. 지아비인 비서랑 나관중의 문장입니다.”
채염은 정말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니었다. 나관중이 전생하기 전부터 외우고 있던 당나라 시인 고적(高適)의 시, 인일기두이습유(人日寄杜二拾遺)였다.
그런 사정을 조조가 알 리 없다. 조조는 흥미롭게 채염을 내려다봤다.
채염이 대학자 채옹의 딸이라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누가 봐도 수긍할 만한 미인이라는 것에도 큰 흥미가 없다.
하지만 지아비가 있다는 것은 다르다. 그것만은 마음을 동하게 했다.
조조는 주변을 물리쳤다. 넓은 대전에 채염과 단둘이 남게 되자, 귀한 구온춘을 한 잔 따라 채염에게 권했다.
“한 잔 들게.”
“그러지요.”
채염은 사양하지 않고 구온춘 한 잔을 비웠다. 조조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계집과 어떻게 놀아야 할까?’
젊은 시절에는 더 아름다운 여인과 더 많은 방사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만으로는 충족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을 빼앗기 시작했다.
지아비가 있는 여인이 자신에게 흠뻑 빠지게 만들었을 때, 사내로서 강렬한 충족감을 느꼈다. 자신의 힘에 굴복해 살기 위해 몸을 바치거나, 자신의 권세를 탐내 곁에 있고 싶어 하는 여자들은 재미가 없었다.
지아비가 있는 여인을 일부러 끌고 온다. 조조의 명이니 본인도, 그 지아비도 거절할 수 없다.
처음에는 여인의 눈에서 슬픔과 분노가 보인다. 권력이나 재물로는 녹일 수 없다.
그러나 조조는 당대 최고의 시인이고, 아직도 창술에 능한 무사이며, 풍부한 경험과 여유를 갖춘 장년이 아닌가?
사내로서의 매력으로 최선을 다해 여인을 홀린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여인의 눈에는 뛰어난 사내의 곁에 있다는 황홀감이 들어선다. 그리고 이따금 지아비에 대한 죄책감이 같이 보인다.
조조는 그 상태를 즐겼다. 그러다 보니 유부녀 편력이 생겼다.
‘그런데 이 계집은 좀 어렵군.’
오늘 데려온 채염은 비서랑 나관중의 아내다. 정변이 성공한 후, 마가군 핵심 인물의 가족들이 수없이 조조에게 붙잡혔다. 감녕이 목숨을 걸고 탈출시킨 마초의 가족들만 빼고 대부분을 잡을 수 있었다.
조조는 그들 중 나관중의 아내 채염에게 관심을 보였다. 나관중, 서황, 황권은 마지막까지 대장군부에서 저항하다 붙들려 포로가 되어 있었다.
포로가 된 당대 최고 시인 나관중의 아내를 취하는 것이다. 조조는 흐뭇함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오늘 채소희와 둘이 술잔을 나눌 수 있게 됐군. 기쁘게 생각하네.”
그런데 채염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할 거면 빨리하십시오.”
“뭘 말인가?”
“제 몸을 탐내시는 것 아닙니까. 가만히 있을 테니 빨리하십시오.”
채염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조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채소희는 어째서 망측한 말을 하는가?”
“승상께서는 천하가 다 아는 색골이시고, 제 지아비는 승상에게 포로로 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살려 주십시오. 그 대가로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미색밖에 없으니, 필요하면 알아서 가지십시오.”
조조는 가만히 채염의 눈을 응시했다.
채염의 눈에는 슬픔도,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천하제일의 권력자가 자신을 탐낸다면 적어도 호기심이 생겨야 하는데, 채염은 조조에게 아무런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
조조는 그런 채염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 피식 웃었다.
“재미없는 계집이군. 나가 보라.”
몸밖에 취할 수 없는 여인에게는 흥미가 떨어진 지 오래다. 조조는 채염을 외면한 채 비스듬히 돌아앉았다.
“하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채염은 무심하게 인사를 올리고 일어났다.
조조는 그대로 턱을 괸 채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생각이 정리되자 사람을 시켜 곽가를 들게 했다.
곽가가 들어오자 조조는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비서랑 나관중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승상부의 별실에 유폐되어 있습니다. 대우는 불편함이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풀어 주라.”
“예?”
“집으로 돌아가게 하라는 말이다.”
“하오나 승상, 그자는 마초의 최측근입니다. 그런 자를 풀어 주려면 뭔가 명분이…….”
“그냥 풀어 주라고 하였다.”
조조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확실하게 의사표시를 했다.
‘채소희처럼 뻣뻣한 계집은 처음 보는군. 하지만 부부간의 신의가 흔들리면 혹시나 모를 일이지.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 봐야겠군.’
채염이 승상부에 다녀간 후, 별안간 나관중이 석방되었다. 진실은 그것뿐이다.
남편이 의심하고, 아내가 원망하는 구도가 되면 다시 한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것이 조조의 목적이었다.
조조는 그렇게 개인적인 용무를 정리하고, 곽가가 어제 올린 보고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온현이 수상하다 하였나?”
“그렇습니다, 승상. 마초와 그 수하들이 낙수를 따라 도망친 것까지는 확인이 됐는데, 이후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만약 온현에 은신해 있다고 하면 앞뒤가 맞습니다. 게다가 온현의 현령 제갈량이라는 자 또한 수상합니다.”
“제갈량이라면 지난 과거의 장원급제자 아닌가. 그가 수상하다니?”
“그자가 형주 남양 출신이라 하였지요. 그런데 뒷조사를 조금 해 보니 원래 형주 사람이 아닙니다.”
“하면?”
“그자는 서주 피난민 출신입니다. 허튼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십 년 전, 서주에 난리가 일어나서 수많은 피난민들이 천하 곳곳으로 흩어졌다.
서주로 쳐들어간 조조가 수십만 단위의 대학살을 벌인 것이다. 제갈량은 그 서주대학살의 생존자였다.
‘나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있을 수도 있겠군.’
거기에 생각이 미친 조조는 곽가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셈인가?”
“오환돌기를 보내시지요.”
“오환돌기를?”
“예, 얼마 전 연주에 작은 도적떼가 하나 일어났습니다.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오환돌기를 보내면서, 온현에서 보급을 받도록 하십시오.”
만약 온현에 마초가 숨어 있다면, 오환돌기의 힘으로 온현과 마가군 잔당을 짓밟는다.
조조는 곽가의 계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온현으로 오환돌기를 보내지.”
오환돌기의 수는 1만에 달한다. 유목민의 기마술과 한인의 장비를 갖춘 최정예 기병이다.
오환족 대인 답돈은 북방에서 묵돌선우의 환생이라는 소리까지 듣는 유목민의 영웅이고, 오환돌기를 이끄는 조앙과 전예, 견초는 조조군의 젊은이들 중 가장 유망한 무장들이다.
“하지만 진짜 마초가 숨어 있다면 그 정도 포진으로도 부족할 수 있지.”
“승상, 그 말씀은…….”
“조자효에게 호표기 일부를 줘서 뒤따르게 하라.”
조조는 자신 휘하의 최고 무장, 조인에게 조앙의 뒤를 봐주도록 했다. 만에 하나라도 실패할 가능성을 없애기 위한 인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