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4화. 대이아(大耳兒)
제갈량이 온현의 현령으로 있는 것은 마가군에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감녕은 마초의 가족을 비롯해 수많은 마가군 쪽 인사들을 낙수를 통해 탈출시켰다. 그렇게 낙수를 따라 백 리쯤 이동하면 온현에 닿는데, 이 온현의 현령인 제갈량이 이들을 구해서 은신시킨 것이다.
게다가 제갈량은 천하제일의 부자라는 하내의 사마가까지 마가군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사마가의 가병은 천여 명일 것이라는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삼천에 육박했다. 가히 중원 최대의 대호족다운 규모였다.
“그리고 제갈공명, 그대는 대장군이 위기에 처했을 때 엄청난 공을 세우게 됐지. 이제 대장군은 그대를 무겁게 쓸 수밖에 없겠는걸.”
사마의는 제갈량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갈량은 사나운 눈매를 누그러뜨리고 그저 잔잔히 웃고 있었다.
“사마중달, 그대야말로 가문을 멸문에서 구해냈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 전쟁에서 이기면 온현을 다스리는 온후(溫侯)가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다운 일 아니겠습니까.”
본래 온후의 작위는 여포가 가지고 있었다. 여포는 온현에 어떤 연고도 없었으니, 이는 그저 많은 재물과 큰 권위를 상징하는 작위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작위를 사마의가 받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마가는 이미 온현을 중심으로 하내군과 중원 전체에 영향력을 가진 대호족이다. 작위까지 받는다면 온현의 왕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다.
사마의는 가만히 제갈량을 쳐다봤다.
그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만은 알 수 없는 강한 끌림을 느꼈다.
‘이 사내와의 인연은… 이걸로 끝나지 않겠군.’
제갈량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사마의는 제갈량에게 답례하고 등을 돌렸다.
그런데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사마의는 그대로 고개만 돌려 등 뒤의 제갈량에게 물었다.
“제갈공명. 형님과는 언제 친분을 쌓았나? 그런 내밀한 이야기를 서신으로 나눌 정도라면 보통 사이가 아닐 텐데.”
“사마백달과는 일면식도 없습니다.”
펄럭.
제갈량은 깃털 부채를 들어 표정을 가렸다.
“서신 같은 건 없습니다. 중달, 그대를 끌어들이기 위해 거짓을 말한 것입니다.”
제갈량은 길게 말하지 않고 그대로 사라져 갔다.
한참 동안 서 있던 사마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완전히 속은 그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 * *
예주 여남군.
예주자사 유비는 오랜만에 그를 찾아온 손님을 만나고 있었다.
“조운이 유 사군을 뵙습니다.”
“이 친구야, 이게 얼마 만인가?”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다. 공손찬이 유주에서 큰 세력을 거느리고 있을 때, 조운은 공손찬의 부하 장수였고 유비는 객장이었다.
마초가 천자의 조서를 받아내 조운을 천자의 곁으로 부르지 않았으면, 지금쯤 조운은 유비의 밑에서 상장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유비와 조운뿐만이 아니었다. 관우, 장비, 간옹 등 예전부터 유비를 따랐던 인물들이 조운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서주에서 유비군에 합류한 노숙, 미축, 손건도 조운에게 예를 표했다.
“그런데 이분은 누구신가?”
“대장군부 종사 서서, 자는 원직입니다. 조 중랑장과 함께 대장군의 뜻을 전하러 왔습니다.”
“그 얘기는 잠시 후에 하세. 대장군부에는 언제부터 있었나?”
유비는 날카로운 눈빛을 한 서서라는 청년을 보며 진지하게 이것저것을 물었다.
유비는 사람을 잘 알아봤다. 그것을 두고 누군가는 안목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통찰력이라 불렀다. 최측근인 관우나 장비가 보기에, 그것은 동물의 후각에 가까웠다.
유비는 한참 동안 서서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서서가 이미 마초의 수하로서 충성심이 단단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그제야 아쉬운 듯 웃었다.
“대장군은 참 복이 많은 인물이군. 그래, 자룡과 원직은 오늘 어쩐 일로 왔는가?”
“사군. 낙양에 변고가 일어났습니다.”
조운은 먼저 낙양에서 조조가 일으킨 정변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예주 여남까지는 아직 소식이 닿지 않고 있었다. 마초가 협상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 보낸 전령들에게 대략의 소식을 들은 것이 전부였다.
이야기를 다 들은 유비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조조는 이제 황실의 역적이 되었군. 그리고 마맹기는…….”
“낙양 인근에 숨어서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습니다. 대장군 휘하의 장수들은 대부분 건재합니다. 장안의 마가군이 함곡관을 치고 있을 때 사군께서 조조군의 뒤를 찌르시면, 때맞춰 대장군이 궐기할 것입니다.”
“마맹기는 이번에도 화려한 싸움을 벌일 생각인가. 그런데, 내가 나섰다가 패하면?”
“사군께는 뛰어난 만 명을 상대할 수 있는 천하 용장이 두 명이나 있고, 사군 본인도 뛰어난 무장이십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봐, 전쟁은 그런 걸로 되지 않는다고. 자네들 말만 들으면 조조를 낙양 팔관 안에 가둬 놓고 두들겨 팰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하북과 연주 쪽에서 조조의 원군이 오지 않겠나?”
“그 또한 방법을 강구해 둔 상태입니다. 하북의 구원군은 마가군의 병주 방면군이 차단할 것입니다. 연주 쪽에는 이미 저희 사람들이 내분을 일으키기로 약조가 되어 있습니다.”
상대의 본대를 고립시키고, 고립시킨 본대를 모루에 얹어 놓은 후, 망치로 내려친다.
전투의 기본이 되는 전술이다. 이번에는 전술이 아니라 전략의 수준으로 규모가 커졌다. 함곡관을 통해 동진하는 마가군 본대가 거대한 모루가 되고, 참전하는 유비군이 큼지막한 망치가 될 것이다.
유비는 이런 이치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되면 대장군은 또 한 번, 아주 멋진 싸움을 하게 되겠군.”
그런데 어째 유비의 눈치가 이상했다. 시원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집안에 문제가 좀 있으니 오늘은 빨리 퇴청하겠네. 원직, 자룡, 이 문제는 내일 다시 이야기하세.”
“사군, 이는 촌각을 다투는 일입니다. 역적 조조를 주멸해 천하를 평안케 할 수 있는 일인데,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마누라가 둘이나 되면 천하를 평안케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지. 하여튼 내일 다시 보세.”
탁군의 협객 유비.
하북에서 성정이 가장 불같은 사내로 알려져 있었다. 젊은 시절의 유비는 어떤 상대를 만나서도 힘의 크기를 재지 않았다. 황건적도, 원소도, 조조도 마찬가지였다. 안희현 현위 시절, 독우를 두들겨 패고 벼슬을 내던진 적도 있었다.
조운이 기억하는 건 그런 유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유 사군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구나.’
마흔이 넘은 유비는 조운이 알던 모습과 사뭇 달랐다. 시원하게 속내를 터놓지 않았다.
조운과 서서가 그런 의문을 안고 숙소로 돌아간 후.
유비는 서서가 예물로 가져온 증류식 소주를 한 병 열어 자리에 모인 이들의 잔을 채웠다. 그대로 군의를 시작할 참이었다.
“운장의 생각은 어떠냐?”
유비는 먼저 관우를 보며 물었다. 관우는 수염을 쓸며 대답했다.
“마땅히 도와야 합니다.”
“이유는?”
“조조는 크게는 황실을 능멸하는 역적이며, 작게는 서주 사람들의 원수이기도 합니다. 또한 마 대장군은 우리가 여남에 공업을 쌓을 수 있도록 해 준 은인입니다. 어찌 망설이겠습니까.”
“옳은 말이다.”
유비는 씩 웃고 나서 장비 쪽을 돌아봤다.
“익덕의 생각은 어떠냐?”
“운장 형의 말이 옳기는 한데, 더 생각해 볼 부분이 있소.”
“어떤 부분 말이냐?”
“만약 우리가 도와주지 않아서 마가군이 패하고, 조조의 천하가 됐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게 우리에게 꼭 나쁜 일이겠소?”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입을 연 것은 유비가 아니라 관우였다.
“익덕 아우는 말을 가려서 하게.”
은은한 노기가 서린 음성이었다. 장비는 어깨를 으쓱한 뒤 관우를 보며 대답했다.
“운장 형은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하지만 형도 알지 않소? 조조는 이제 찬탈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몸이오. 그런데, 마초가 죽어 버리면 이제 북방에는 누구도 조조의 찬탈을 막을 사람이 없지. 그런데 우리 대형은…….”
“익덕!”
“…유씨가 아니오?”
관우가 제지하려 했지만, 장비는 결국 말해 버렸다.
한실을 무너뜨리려는 조조가, 만약 북중국을 제패한다면?
그런 조조를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
한실 부흥의 명분을 내걸 수 있는 인물.
그리고 고조 유방의 후손으로서, 여차하면 스스로 천자로 즉위할 수 있는 인물.
유비를 중심으로 천하의 반 조조 세력이 집결하게 될 것이다. 조조가 마초를 꺾고 천하의 1인자가 된다면, 그 대척점에 있는 유비는 가파른 속도로 성장해서 천하의 2인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좌중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장비는 씩 웃으며 말했다.
“내 말은 그런 방법도 있다는 것이오. 결단하는 것은 대형의 몫이오.”
관우와 장비의 말을 들으며, 유비는 계속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초가 조조의 손에 죽는다면, 가장 곤란해지는 것은 최근에 마가군과 동맹을 맺은 형주의 유표다. 그는 늙었고, 조조의 남하에 맞설 만한 무력도 없다.’
유표가 조조에게 맞서려면 유비를 불러들일 수밖에 없다.
‘형주에서 험한 장강에 기대 조조와 한 번 싸움을 벌이고, 만약 그 싸움에서 이긴다면… 대업을 꿈꿀 수 있겠지. 천하의 북쪽은 조조에게 주고, 나는 형주를 중심으로 천하의 남쪽을 차지하면 되니까.’
유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천자가 되고 싶었다. 남자로 태어났으니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여기서 눈을 딱 감으면 된다.’
협객으로서의 삶은 청산하기로 마음먹었다. 과거의 은원은 잊고, 협객이 아닌 정치인으로 선택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로 좋은 것일까?
결단이 빠른 유비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운장, 익덕.”
마침내 결심이 선 것일까.
유비가 두 아우를 불렀다.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씀하십시오.”
“행장을 꾸려라.”
펄럭.
유비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옷깃이 휘날렸다.
“출병할 것이다. 지금 후방에는 마땅한 위협이 없다. 본거지는 내가 지킬 테니, 너희들은 낙양으로 가라.”
“존명!”
관우는 그대로 두 손을 모으고 낮게 대답했다.
“내 그럴 줄 알았소.”
장비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다는 표정이었다.
유비는 미련을 떨쳐내듯,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우리가 아직 쪽팔리게 살 만큼 늙지는 않았다. 가라. 가서 대승을 거둬라. 지지도 말고, 죽지도 마라. 마초에게 공을 빼앗기지도 마라. 그리고 조맹덕의 목을 가져와라.”
올해로 마흔둘.
살아온 세월이 얼굴에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나이다. 거친 삶을 산 대가인지 깊은 주름이 패었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단정하고 묘한 귀티가 흘렀다.
“내가 서주목으로 있을 때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조조의 목으로 제사를 지낼 것이다.”
유비는 그대로 옷깃을 떨치며 자리를 떴다. 관우, 장비, 그리고 자리에 모인 모든 중신들이 일제히 유비의 뒷모습을 향해 군례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