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242화 (229/306)

242화. 왕좌지재(王佐之才)

고대부터 현대까지, 정변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병력의 규모가 아니라 실행의 속도다.

정변을 일으킨 조조군은 하룻밤 동안 낙양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첫날 밤, 황궁에서 천자의 조서를 받아내 정통성을 확보했다. 정변에서 조조군이 승리하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보였다.

그런데 3일이 지나도록 떨어지지 않고 있는 곳이 하나 있었다. 낙양 외곽의 대장군부였다.

“급보! 낙양의 정세를 정탐하러 간 정찰대가 전멸했습니다!”

급하게 달려온 전령이 눈물을 뿌리며 전황을 고했다.

대장군부에 모인 마가군을 지휘하고 있는 것은 전장군 서황이었다. 전령이 가져온 비보를 듣자 서황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왕자균(자균은 왕평의 자)은 어떻게 되었는가.”

“왕 교위는 적병들의 화살에 맞고 낙마, 생사가 불분명합니다!”

정찰대를 이끄는 왕평은 서황이 아끼는 후진일 뿐만 아니라, 마가군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무장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지휘하는 부대가 전멸했다는 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왕자균에게 정찰대를 맡길 때, 시세가 불리해지면 투항해서 훗날을 기약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투항할 새도 없이 전멸했다는 말인가?”

“장군, 적은 이민족 기병이었습니다. 기마술과 궁술은 선비족이나 강족 기병 못지않고, 무장 상태는 한인 철기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조조의 영역으로 편입된 하북에도 선비족이나 강족 같은 강력한 유목민 집단이 있다. 선비족과 뿌리가 같다고 알려진 오환족이다.

“그러나 오환은 본래 노략질로 먹고사는 무리들이다. 한인 철기 같은 무장 상태를 갖췄다는 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조맹덕의 아들 조앙이 오환돌기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군사를 이끄는 솜씨가 범상치 않았습니다.”

전령은 서황에게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낱낱이 고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서황의 미간에 진 주름이 점점 깊어졌다.

“조앙의 군재가 그 정도인가. 가 선생께서는 어찌 보십니까?”

서황은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듣고 있던 가후가 대답했다.

“전령의 말대로라면 조앙의 군재는 조맹덕에게 뒤지지 않습니다. 허나 아마도 그의 밑에 유능한 부장들이 붙어 있는 것이겠지요. 문제는 오환돌기입니다. 함곡관 동쪽에는 오환돌기를 상대할 만한 병력이 없습니다.”

함곡관의 서쪽, 즉 관서에는 마가군의 금철기가 있다.

그런데 지금 함곡관은 조조군이 단단히 틀어막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관동에는 오환돌기를 상대할 만한 마땅한 부대가 없다. 마가군에 붙기로 한 연주의 장막이나 서주의 장패가 나름대로 세력을 거느리고 있지만, 이민족 기병이면서 한인 기병처럼 중무장한 오환돌기를 상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서황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군요.”

“서 장군. 외람되오나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서황, 가후 그리고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얼굴이 하얀 서생이 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서 있었다. 눈먼 화살에 다리를 다쳐 정양하고 있던 나관중이었다.

“우리는 힘을 합쳐 이 난세를 끝내겠다고 잔을 나누고 맹세했습니다. 비록 조맹덕의 간교한 술수에 속아 곤궁한 처지가 되었지만, 아직 주공께서 무사하시니 희망이 있습니다.”

조조는 아직 마초를 잡지 못했다.

만약 마초를 잡았으면 그대로 투항을 종용하던가, 아니면 마초의 목을 내걸어 단번에 사기를 꺾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도 일어나지 않았다.

“왕자균이 패하고 기병을 다 잃었으니 이 대장군부에서의 농성은 열흘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주공만 무사하시다면 우리는 언제든 다시 싸워 이길 수 있으니, 최대한 많은 이들이 후퇴해서 주공과 합류해야 할 것입니다.”

후퇴할 곳은 정해져 있었다.

낙수를 장악한 감녕의 수군을 이용해 강으로 피신하고, 낙수를 따라 하내군 온현까지 간다. 온현의 신임 현령이 마가군 쪽 사람이니 그곳에 몸을 숨기는 것이다.

서황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옳은 말이오. 그러나 모두가 후퇴할 수는 없소. 일부는 남아서 적들의 주의를 끌어야 할 것이오.”

“옳으신 말씀입니다.”

“시세가 부득이해지면 투항하겠지만, 또한 최대한 오랜 시간 항전해서 적들이 주공의 행방을 수색하는 데 총력을 쏟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오. 그러다 보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소.”

누군가는 남아서 조조군을 맞이해야 한다.

서황보다 먼저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제가 남지요.”

군사장군 황권이었다. 서황은 황권의 걸걸한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남겠습니다.”

두 번째로 나선 것은 황충이었다. 마초가 형주에서 데려온, 서황조차 처음 보는 엄청난 근육질의 사내였다.

서황은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무장으로는 내가 남을 것이오. 황한승은 온현으로 탈출하는 이들을 호위해 주시오.”

황충은 중원에서는 아직 무명이다. 그러나 실력은 확실하다.

만약 마초가 반격을 시작하면, 명성은 없으면서 실력이 뛰어난 황충은 비밀병기가 되어 줄 것이다.

남아서 항전할 군사와 무장이 결정되었다. 서황은 마지막으로 남을 만한 문관을 결정하기 위해 좌중을 둘러봤다. 그런데 먼저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제가 남겠습니다.”

처음 탈출을 제안한 나관중이었다.

“저는 다리를 다쳐서 당장 먼 길을 가기 어렵습니다. 남아서 조맹덕의 군사들을 맞이할 것입니다.”

“비서랑 선생, 허나 주공께서 가장 믿는 사람은…….”

“지금 주공에게는 벗이 아니라 군사가 필요합니다. 저는 군사가 아니라 용병을 모르니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반면 저는 시인으로 명성이 높으니, 조조도 제 목을 함부로 베지는 못하겠지요. 누가 남아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습니까?”

나관중의 눈빛에는 전에 없이 결연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예전에는 그저 겁 많은 서생인 줄 알았는데… 10년 세월에 사람이 많이 바뀌었군.’

서황은 나관중을 보며 낮은 한숨을 쉬었다.

탈출할 사람과 남을 사람이 결정되었다. 남아서 대장군부를 지키기로 한 서황, 황권, 나관중은 서로 눈을 마주 보며 결의를 다졌다.

* * *

턱.

상서령 순욱은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자신의 앞에 있는 자를 향해 말했다.

“승상께서 이 순모의 이해를 구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허, 이 사람아. 내가 자네 없이 무슨 대업을 이루겠나?”

“대업이라면 이미 이루셨지 않습니까? 승상은 하루아침에 낙양을 장악했고, 폐하의 조서도 받아내셨지요. 이제 대장군의 목이 도착하기만 하면 승상께서 바라시는 것들이 모두 이뤄지겠군요.”

순욱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승상 조조는 쓴웃음을 지었다.

“문약(순욱의 자). 자네의 동의를 구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네. 이 계획을 처음 제안한 봉효(곽가의 자) 또한 시간에 쫓겨 급박하게 제안한 일일세. 자수(조앙의 자)가 오환돌기를 이끌고 낙양으로 개선하는 시점에 맞춰서 일을 벌여야 했네. 자네가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게.”

“항상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결단하시는 것은 승상입니다. 저는 그저 조언을 드릴 뿐입니다.”

“거 사람 참.”

조조는 이번 정변에서 소외된 순욱을 살살 달래고 있었다. 순욱의 태도가 겨우 누그러졌을 때, 조조가 낮은 한숨을 쉬며 말을 꺼냈다.

“마초를 아직 찾지 못했네.”

“들었습니다. 혹시 대장군부에 틀어박혀 농성하고 있는 무리들 중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랬으면 내 귀에 들어왔겠지. 거사 첫날 밤, 누군가 황궁에 침입해서 난동을 부리고 자취를 감췄네. 그자가 마초임에 틀림없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날 전위가 죽었네. 시신을 본 검객들이 하나같이 천하제일인의 솜씨라고 하더군.”

후룩.

순욱은 말없이 뜨거운 차를 한 잔 더 마셨다. 조조는 그런 순욱을 향해 말했다.

“문약, 내 자네에게 궁금한 게 있네.”

“하문하시지요.”

“자네는 한실이 존속될 수 있다고 보는가.”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요?”

순욱이 단정한 아미를 찌푸렸다.

조조는 순욱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남의 인물됨을 귀신같이 파악하는 자네가 이 조조의 흉중을 알지 못했을 리 없어. 하지만 천자를 허도로 모셔온 후부터, 자네는 마치 한의 충신인 것처럼 굴었지. 문약, 일이 이렇게 됐으니 솔직히 말하겠네. 자네가 지키려 하는 한의 사직은 그 수명을 다했네.”

“승상.”

“사직이란 결국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 천하를 위해서라면 한의 사직을 무너뜨리고 새 사직을 세워야 하네.”

“그리 생각하십니까.”

“문약. 자네가 없었으면 나는 이 자리에 있지 못했겠지. 위기 때마다 자네가 결정적인 조언으로 나를 구해낸 것이 몇 번이고, 내가 외정을 나가 있을 때마다 내부의 혼란을 잘 수습한 것이 몇 번인가. 자네는 내가 꿈꾸는 새로운 천하에 꼭 필요한 사람일세.”

거기까지 말하자 조조도 입이 말랐다. 조조는 식어 가는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말을 이었다.

“그만하면 자네도 할 만큼 했네. 꼭, 한의 상서령으로 남아야겠나. 위의 국상이 되어 새 왕조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떤가. 내 부탁함세.”

“승상. 저에게는 그만한 재주가 없습니다.”

“헛소리. 나는 위나라의 중심을 잡고, 한으로부터 부드럽게 정권을 이양받아, 건국 초의 혼란을 수습할 만한 인물이 필요하네. 자네 말고 누가 있어 그런 역할을 하겠나?”

“승상, 그것은…….”

“이 조조는 그대가 없어도 패업을 이룰 자신이 있네. 그러니 이는 나를 위해 청하는 것이 아닐세. 천하 만민을, 억만창생을 위해 청하는 것일세.”

조조는 타는 듯한 눈으로 순욱을 쏘아보며 말했다.

정작 순욱은 묵묵부답이었다. 한참 시간을 보내던 순욱이 입을 열었다.

“승상께서 폐하를 설득하셨다 들었습니다.”

“자네도 짐작하고 있을 걸세. 천자가 천자로 있기 위해서 가장 위험한 인물은 내가 아니라 마초일세. 그가 황위를 탐낸다면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나? 한실을 지키기 위해 마초의 호의에 기대는 대신, 내 목숨이 다하는 날을 기다려 스스로의 힘으로 기회를 노려보라 하였지.”

“참으로 승상답습니다.”

조조는 한참 순욱을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내 목숨이 다했을 때, 자네도 천자와 함께 한실 부흥을 노려볼 셈인가.”

“저는 이미 승상의 대업을 도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제 삶을 부정하는 것은 당치 않은 일입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망설이는가?”

휘릭.

순욱은 옷깃을 떨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조조를 향해 두 손을 모았다.

“저는 앞으로도 승상의 대업을 도울 것입니다. 그러나 위국의 국상이 되라는 말씀은 거둬 주십시오. 한의 상서령으로 승상을 돕겠습니다.”

“문약. 그것은… 나를 버리지 않겠다는 것인가?”

“제가 어찌 승상을 저버리겠습니까? 다만 승상과 함께 새로운 천하를 만드는 일에는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저… 한과 위 사이에 많은 피가 흐르지 않도록 중재하는 역할을 하겠습니다. 그 정도면 하찮은 재주로 세상을 위한 쓰임을 다 한 셈이니, 바라건대 승상께서는 더 이상 순모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마십시오.”

“허허, 이 사람아. 자네의 재주라면 새 왕조의 재상이 어울리지 않겠나.”

“승상. 한실은 이제 끝났습니다. 그것을 제가 모를 거라 여기십니까.”

한은 이제 수명을 다했다.

그러나 순욱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그 사실이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저는 상서령으로서, 조용히 한실과 함께 명을 다하겠습니다. 황명을 출납하는 상서령이지만 언제나 승상의 편에 서겠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역할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순욱은 요지부동이었다.

한참 순욱을 설득하던 조조는 결국 눈물까지 뿌렸다. 그러나 변함없는 순욱의 태도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알겠네, 문약. 내 오늘은 그냥 물러가겠네. 하지만 내가 한 말을 잘 생각해 보게. 적당한 때가 오면 다시 이야기하세.”

조조는 그렇게 순욱의 집을 나섰다.

승상부로 돌아오는 수레 안, 조조는 자리에 깊게 몸을 묻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

“갔던 일은 잘되었습니까.”

마부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곽가가 조조를 돌아보며 물었다.

조조는 언제 눈물을 흘렸냐는 듯, 씩 웃으며 대답했다.

“어쨌든 배신은 막았지. 순문약은 고지식한 데가 있어서 말이야.”

“참으로 잘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순령군은…….”

“앞으로도 계속 상서령으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천자가 아닌 우리의 편에 서겠지.”

조조와 곽가는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조조는 곽가에게도 내심을 다 비치지 않은 채, 순욱의 일을 계속 생각했다.

‘재주로 따지면 누구도 순문약에 비할 수 없지. 천자와의 연결고리로 쓰기도 그만한 인물이 없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적당한 시기에 제거해야겠지.’

끈끈했던 조조와 순욱의 관계는 이제 파국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한편, 조조를 떠나보내고 저택에 남은 순욱은 후원을 거닐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변은 성공했다. 한은 이제 멸망의 길로 갈 것이다.

그리고 조조는 용상에 앉지 않을 뿐, 실질적인 천자로 앞으로 천하의 일을 좌우할 것이다. 조조라면 최근 후한의 천자들보다 훨씬 좋은 통치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한과 함께 죽는 신하가… 한 명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순욱은 쓸쓸하게 혼잣말을 했다. 마치 그 말을 지우려는 것처럼, 후원에는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