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마초, 구출하다
“이것 참 곤란하게 됐군.”
왕월은 인상을 찌푸리며 칼을 들었다.
지금 자신의 옆에서 싸우고 있는 동문 사제 사아는 어지간한 맹장들 이상으로 검술이 뛰어난 인물이다. 일기당천이라 불리는 무장들, 이를테면 마가군의 감녕, 서황, 장료, 방덕 같은 이들이 아니면 사아를 당해내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체불명의 소녀에게 밀리고 있었다.
‘마가군의 장료가 신안을 가졌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천하에 신안을 가진 자가 또 있을 줄이야.’
그런 재능이 그렇게 흔할 리 없다. 게다가 소녀는 자신의 이름이 마화라고 밝혔다.
왕월은 소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마초의 누이동생인가. 조자룡, 그대와 정이라도 통하던 사이였나 보군. 어쨌든 나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얼른 그대를 베고 저 계집의 목숨도 취할 것이다.”
“그게 가능할 것 같은가.”
조운이 평온한 말투로 대답하자 왕월의 미간에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건방 떨지 마라. 이곳은 네놈이 말 달리던 전쟁터가 아니다.”
조운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몸에는 아직도 부러진 화살이 두 대나 꽂혀 있었고, 방금 전 입은 두 개의 검상도 얕지 않았다.
왕월은 승리를 확신했다. 발을 두 번 구르며 검을 흔들어 허초를 내보였다. 그리고 허초에 반응한 조운이 움찔거리는 틈을 타서 일직선으로 검을 찔렀다.
깡!
조운은 어깨가 잘리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왕월의 검을 쳐냈다.
그러나 왕월의 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며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공격을 가해 왔다. 방금 전 상대했던 사아의 검보다 훨씬 정교하고 강한 공격이었다.
깡! 깡! 깡!
조운은 이어지는 왕월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냈다. 그리고 왕월이 떨어지자 깊은 기침을 했다.
“쿨럭.”
기침하자 상처에서 다시 피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도저히 계속 싸울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할 수 없군.”
조운은 검집을 든 왼손을 앞으로 내밀고, 검을 든 오른손을 뒤로 뺐다.
상대의 공격을 받아 흘리며 찌르는 절기, 일신시담의 자세였다.
“흥, 아까 한 번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군. 그 초식은 통하지 않는다.”
“두고 보지.”
“두고 보면 뭐가 달라질 것 같으냐?”
왕월이 조운을 보며 이죽거렸다.
상대의 공격 방향대로 팽이처럼 돌며 상대를 찌른다. 조운의 절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저잣거리의 소년들도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낙양 제일의 검술 고수를 자부하던 왕월은 당연히 오랫동안 연구해 왔고, 대처법도 숙지하고 있었다.
‘내 공격이 들어가는 순간 찌르기가 들어온다. 한 박자로 이루어지는 게 무서울 뿐, 이 사실을 알고만 있으면 대처할 수 있지. 찌르기만 피하면 되니까.’
왕월은 승리를 확신했다.
신중하게 보법을 밟으며 조운의 빈틈을 노렸다. 조운의 반응이 약간 느리다고 생각되는 순간, 왕월의 칼끝이 조운을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끼이익!
조운은 유려한 동작으로 왕월의 공격을 받아냈다. 왕월이 내지른 칼날은 조운의 검집을 타고 아래로 흘렀다.
이제 찌르기가 들어올 차례였다.
“…아니?”
그런데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순간 당황한 왕월은 얼른 칼을 들어 조운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조운이 더 빨랐다. 왕월을 찌르는 대신 칼을 높이 들어 올린 조운은 그 힘 그대로 칼을 내리치며 왕월의 몸을 벴다.
퍽!
방금 전까지 중상을 입고 비틀거리던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는, 강맹한 베기였다.
찌르기가 아닌 베기 공격에 당한 왕월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가슴을 깊게 베인 채 눈을 부릅뜨고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크윽, 이놈… 속임수를…….”
“알면 막을 수 있는 초식을 절기라 부르겠나.”
조운은 비틀거리며 왕월에게 다가갔다. 왕월이 이를 악물고 조운을 찌르려 했지만, 창술을 응용한 조운의 찌르기가 먼저 닿았다.
펑!
폭음과 함께 왕월의 가슴께가 터져 나갔다. 검으로 발출한 상산창술 절기 애각이었다.
왕월은 절명했다. 시신이 천천히 제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이런 제기랄! 사형!”
옆에서 마화와 겨루던 사아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슈욱!
마화는 그 틈을 노리지 않고 사아의 옆구리를 벴다. 단번에 쓰러뜨릴 만한 힘은 없었지만, 칼날을 결대로 쳐서 깊은 상처를 남기는 훌륭한 일격이었다.
“컥…….”
사아가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런 사아의 눈에 칼을 들어 올리는 마화가 들어왔다.
‘아직은 반격할 수 있겠군. 하지만…….’
마화의 뒤에는 조운이 있다. 사아는 그대로 전의를 상실했다.
찰나의 순간이 흐른 뒤.
퍽!
칼날이 목뼈를 자르는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사아의 머리가 하늘로 날았다. 태어나서 처음 사람을 벤 마화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검을 고쳐 잡았다.
왕월과 사아.
낙양 최고라 불리던 두 검객이 순식간에 죽었다. 두 사람이 쓰러진 것을 확인한 조운은 그제야 비틀거리며 제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조 장군! 괜찮으세요?”
마화가 얼른 다가가 조운을 부축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이 가깝게 붙었다. 조운의 용모를 가까이에서 보자 마화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장안의 이야기꾼들이 하는 말이 마냥 허튼 게 아니었구나. 참으로…….’
“잘생겼구나.”
“음? 뭐라고 하셨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신도 모르게 본심을 내뱉은 마화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한편, 전위는 그때까지도 팔짱을 낀 채 왕월과 사아가 죽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처리했어야 할 자들이다. 상산의 조자룡에게 중상을 입히고 죽었다면 최선의 결말이지.’
한때 이름난 검객이었지만, 이제는 살수나 다름없이 타락한 자들이다. 전위는 무심하게 왕월과 사아의 시신을 내려다본 후 입을 열었다.
“조 중랑장. 내가 드린 마지막 기회를 거부하셨으니 후회는 없으리라 믿소.”
“전위.”
조운은 고개를 들어 전위를 봤다. 팔 척의 큼지막한 뼈대에 근육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 자는 조조군 최고의 무사. 지금 상태에서는 이길 수 없다.’
지금 낙양에서 가장 강한 자가 누구인가?
호사가들은 당연히 대장군 마초를 첫손으로 꼽았다. 그다음은 의견이 분분했다. 절충장군 감녕, 전장군 서황, 거기장군 조인, 사례교위 하후연 등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이름 두 개가 있었다. 바로 우림중랑장 조운과 승상부 교위 전위였다.
전위는 변방의 무사들에게서 가끔 볼 수 있는, 감정이 전혀 없는 눈을 한 채 말했다.
“평상시라면 좋은 승부가 되었겠지만, 지금은 열 합을 넘기기 어렵겠군요. 나 또한 내가 모시는 분에게 충성하는 것이니 조 중랑장은 나를 너무 원망하지 마시오.”
“오너라.”
조운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여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마화를 가리기 위함이었다.
‘마 소저가 무공이 있지만, 저자를 당해내는 건 무리다. 마 소저를 지키려면 내가 저자와 동귀어진하는 수밖에 없겠군.’
함께 찌르고 같이 죽는다.
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조운은 흐려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심호흡을 했다.
철컹.
전위는 양손에 무거운 철극을 하나씩 들고 조운에게 다가왔다. 조운은 전위가 다섯 발짝을 내디딜 때 출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앞으로 한 발짝.’
조운이 칼자루를 쥐었을 때였다.
“전위.”
가깝지는 않지만,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전위의 등 뒤, 지하 통로의 입구가 있는 부분이었다.
전위는 눈을 부릅뜨며 몸을 돌렸다. 지하 통로 밖으로 한 사내가 나와 있었다.
퍽!
사내는 손에 쥔 5척 장도를 크게 휘둘렀다. 칼날이 지나가는 곳마다 막아서는 군사들의 팔다리가 하늘로 날고 피가 튀었다. 그렇게 많은 피를 뿌리면서도 어찌 된 영문인지 길고 검은 머리카락에는 피가 묻지 않았다.
“…대장군.”
전위는 조운에게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쌍철극을 강하게 쥐었다. 그리고 지하 통로를 통해 황궁 서고로 잠입한 마초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마초는 푸른 눈을 번쩍 빛냈다.
“네놈이 감히 내 형제를 죽이려 했느냐.”
“나라를 위한 일입니다.”
전위는 그대로 오른쪽 철극을 치켜들어 마초를 찍으려 했다. 마초는 여전히 칼을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덜컥!
그때, 전위의 팔이 멎었다.
마초를 따라온 마충이 전위의 뒤로 돌아가 그물을 던진 것이다. 마충은 그물에 걸린 전위와 힘 싸움을 벌이며 휘파람을 불었다.
“힘이 대단하군. 이 친구도 투기장에 가면 100승을 노려볼 만하겠는데.”
로마의 투기장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들은 접근전 최강의 무기가 그물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로마의 수많은 검투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물에 걸린 전위는 무공에서 가장 중요한 보법을 봉쇄당했다.
퍽!
“컥…….”
발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 전위의 등을 마충의 삼지창이 파고들었다. 전위의 입에서 피거품이 일었다.
마초는 그대로 전위의 옆을 지나쳤다. 동시에 마초를 따라 지하 통로를 넘어온 월길과 강족 기병들이 활을 들었다.
“쏴라!”
월길이 호령하자 강족 기병들이 전위를 향해 일제히 활을 당겼다.
퍼퍼퍼퍽!
거리는 짧고, 과녁은 크고, 사수의 실력은 좋다. 화살이 빗나갈 리 만무했다.
순식간에 전위의 온몸에 수십 대의 화살이 꽂혔다. 전위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초는 전위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조운과 마화에게 다가갔다.
“오라버니!”
“맹기.”
“자룡. 아화. 무사해서 다행이다.”
마초는 손에 들고 있는 치란을 바닥에 꽂고 조운과 마화를 동시에 끌어안았다.
“나를 따라 성 밖으로 나가자. 지금은 잠시 몸을 피할 때다.”
“피한다면, 어디로 말인가?”
“온현의 현령이 우리 쪽 사람이다. 온현으로 가서 잠시 화를 피한 뒤…….”
말이 거듭될수록 마초의 푸른 눈동자가 타는 듯한 안광을 뿜었다.
“조맹덕에게 이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월길이 이끄는 강족 기병대는 그냥 이민족 기병이 아니었다. 십 년간 마초의 곁에서 천하의 이름난 전장을 주유한 궁기병대였으니, 가려 뽑은 조조군 병사들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강족 기병들이 쏘는 화살에 순식간에 조조군 병사들이 쓰러져 갔다. 어쩌다 접근한 자는 만도의 칼날에 목이 잘렸다.
“흥, 역시 대장이 무력화되니 별것 아니군. 이제 죽었나?”
월길은 그렇게 말하며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박혀 있는 전위를 흘끔거리기 시작했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화살이 박혀 있었다. 바닥에 흐른 피의 양을 보면 사람 한 명의 몸에 들어있는 피를 다 뽑은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전위의 무릎이 조금씩 들렸다.
뚜둑.
무릎 관절이 기묘한 소리를 냈다. 전위는 여전히 감정이 없는 눈을 한 채 일어났다. 오른손으로 철극을 치켜들고 있었다.
“아니!”
“뭐, 뭐 이런 놈이!”
산전수전 다 겪은 마충과 월길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처를 입고 일어나는 무사는 서역에도 없었고, 유목민 중에도 없었다.
저벅. 저벅.
전위는 마충과 월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저 마초만을 노리고 다가갔다.
“이놈이!”
월길이 만도를 뽑아 들고 뒤에서 전위를 내리치려 했다.
퍽!
그러나 전위가 철극을 휘두르는 게 더 빨랐다. 월길은 내리치던 만도를 재빨리 세워서 전위의 철극을 막았다.
그러나 전위의 철극에 실린 힘까지는 어쩔 방법이 없었다. 칼몸에 얼굴을 맞은 월길이 코와 입에서 피를 쏟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흡!”
뒤이어 마충이 삼지창을 찔러 갔다.
깡!
전위는 오른손의 철극을 휘둘러 삼지창을 쳐냈다. 그리고 마충을 향해 몸을 부딪쳤다.
퍽!
전위에게 부딪힌 마충은 그대로 튕기듯 뒤로 날아가서 바닥에 미끄러졌다.
순식간에 월길과 마충을 밀어낸 전위가 마초를 향해 다가갔다.
마초는 땅에 박힌 치란을 뽑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푸른 눈으로 전위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네가 곽사보다 낫구나.”
마초는 별 감흥 없는 말투로 전위를 예전에 겨뤘던 상대와 비교했다.
표기장군 곽사. 믿을 수 없는 용력으로 일찍이 마초를 고전시킨 상대였다. 전위는 곽사만큼 강하고, 곽사보다 더 빠른 속도로 한껏 치켜든 철극을 내려찍었다.
텅.
마초는 왼팔을 들어 철극을 막았다.
그런데 팔과 철극이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생각보다 작았다. 청경의 수법으로 전위의 힘을 흘린 것이다.
전위가 휘두른 철극은 마초의 왼팔을 타고 허공에서 한 바퀴 돌았다.
“허저에게도 뒤지지 않겠구나.”
휘릭.
마초는 그렇게 말하며 허공에 뜬 철극을 오른손으로 낚아챘다. 전위는 다른 한쪽의 극을 치켜들고 마초를 향해 겨누고 있었다.
전위와 마초는 철극을 들어 서로의 어깨를 노렸다. 서로의 어깨를 같이 찍고, 둘 다 치명상을 입을 것처럼 보이는 그림이었다.
콰직!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마초가 휘두른 철극이 조금 일찍 전위의 어깨에 닿았다. 경력이 잔뜩 실린 철극이 닿자 전위의 어깨가 터져 나가고, 굵직한 몸이 세로로 갈라졌다.
전위가 내리치려던 철극은 마초에게 닿지 못했다. 몸통이 쪼개지자 몸통에 달린 팔도, 팔로 쥔 철극도 허공을 가른 것이다.
“하지만 여포보다는 못하군.”
마초는 무심한 말투로 상대에 대해 평하고 철극을 옆으로 던졌다.
후두두둑.
전위의 몸에서 튀어서 하늘 높이 솟구쳤던 피가 그제야 땅바닥에 떨어졌다. 조조군 최고라고 불리던 무사의 몸은 세로로 두 쪽으로 나뉜 채 무참하게 바닥에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