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정변 (3)
천자 유협은 몸을 부르르 떨며 외쳤다.
“짐이 승상을 박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너희들이 신하 된 몸으로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유협의 앞에는 구척장신의 나이 지긋한 선비가 허리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모사 정욱이었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허나 오늘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은 전부 대장군 마초의 탓이옵니다. 청컨대 역적 마초를 토벌하라는 조서를 내려 이 혼란을 잠재워 주시옵소서.”
“닥쳐라! 너희들이 감히 짐을 겁박하려 하느냐? 일찍이 동탁과 이각의 무리들 또한 짐의 목숨을 취하지 못했다. 너희들에게 굴복할 것 같으냐!”
황궁은 조조군이 장악하고, 갑주를 입고 칼을 찬 군사들이 들이닥친 상태였다.
유협은 더 이상 천자의 위엄을 가장할 수 없었다. 발을 탕탕 구르며 있는 대로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천자가 그렇게까지 나오니 정욱도 난감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폐하.”
멀리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천자 유협, 황후 복수, 모사 정욱, 그리고 모든 이들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저벅. 저벅.
갑옷을 입고 칼을 찬 조조가 천자의 침소로 걸어 들어왔다. 천자의 10보 앞에 선 조조는 힘차게 두 손을 맞잡고 천자에게 군례를 올렸다. 그 표정이 태연했다.
유협은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
“승상은 왕망과 동탁의 길을 따를 셈인가?”
“신이 왕망이 될지, 이윤이 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요.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영락없이 한신과 팽월의 뒤를 따르지 않았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조조는 대꾸하지 않고 정욱에게 눈짓을 했다. 조조의 뜻을 눈치챈 정욱이 군사들, 그리고 황후와 환관들을 데리고 침소에서 나갔다.
“승상께서 폐하와 독대하실 수 있도록 모두 자리를 뜬다.”
“그런 것은 황실의 법도에 없소!”
환관들이 저항해 봤지만 허사였다. 정욱이 환관들을 핍박하여 나가게 하자, 드넓은 침소에는 조조와 유협만 남게 되었다.
“승상은 지금 큰 실수를 하는 것이오.”
유협은 조조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조조는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승상이 이 옥좌를 탐내는 것을 알고 있소. 그러나 이런 짓을 벌이고 무사할 것 같소? 천하가 승상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오.”
“큭.”
조조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며 입에서 웃음소리가 새 나왔다. 묘한 표정으로 유협을 바라보던 조조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하! 폐하!”
한참을 웃은 후, 조조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유협에게 물었다.
“천하란 대체 무엇입니까?”
“뭣이?”
“천하에 누가 있어 이 조조를 치겠습니까? 마초? 마초는 오늘 밤 목만 남은 시신이 될 겁니다. 마등? 그는 마초가 없으면 지방 군벌이나 할 위인입니다. 오늘 내가 마초의 목을 취한다면, 천하에 누가 있어서 나를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한참 동안 깔깔거리고 웃은 후, 조조는 유협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형주의 유표? 그자는 남쪽 땅에서 천자 흉내나 내는 역적입니다. 강동의 손익? 입에 담을 가치도 없는 애송이일 뿐입니다. 익주의 유범? 마가군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관내의 도적 떼조차 토벌하지 못하는 허수아비지요. 자, 이제 말해 보십시오. 마초만 죽인다면, 천하에 누가 있어서 나를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무엄하오! 천하에 힘 있는 자가 승상뿐이겠소? 분명히 의기 있는 자들이 있어…….”
“아아, 혹시 여남의 유비를 생각하십니까? 그는 덕이 있고 용감한 인물이지요. 그런데 폐하, 그는 유씨입니다. 왕의 자질을 갖춘 자가 유씨 성까지 가졌다는 말입니다. 폐하에게는 그자가 가장 위험한 인물입니다!”
조조는 그렇게 말한 후, 깔깔거리며 웃었다.
유협은 한동안 침묵을 지킨 후 입을 열었다.
“승상에게 이 옥새가 필요하다면 드리겠소. 이 옥새를 가져가서 위나라 천자가 되시오. 짐의 거취는 승상에게 달렸으나, 부디 먼 시골에서 목숨만은 이어갈 수 있도록 해 주시면 좋겠소.”
“저런, 폐하. 그건 곤란합니다. 정변이 실패해서 신이 죽게 되었을 경우의 일도 생각하셔야지요. 일단 한 번 제위에서 내려 오시면, 설령 나중에 복위하신다 한들 제업을 이어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한 번 퇴위한 천자가 두 번은 못 하겠습니까?”
조조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유협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승상이 원하는 건 대체 무엇이오?”
“거래를 하시지요. 신에게 조서를 내려 주십시오. 호분군과 우림군을 물리고, 역적 마초를 추포하라는 조서 말입니다.”
“그런 조서 따위는 옥새를 가지고 마음대로 꾸미면 되지 않는가?”
“호분군과 우림군은 폐하의 친필 서한이 아니면 옥새가 찍힌 조서도 듣지 않지요. 신이 모를 줄 알았습니까?”
호분군과 우림군은 천자가 직접 부리는 친위대다. 망해 가던 황실의 친위대라 그 숫자는 적지만, 이들의 능력과 충성심은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유협은 주먹을 꽉 쥐었다.
“호분과 우림에도 승상의 사람이 있었던가.”
“옛 호분중랑장 왕월이 승상부에 있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현 호분중랑장 동승과 우림중랑장 조운, 둘 다 여간 귀찮은 자들이 아니지요. 어쨌든 폐하께서 호분군과 우림군은 해산하라는 어찰을 써 주십시오.”
“그런 식으로 승상의 정변을 승인하라는 것인가. 하면 짐은 무엇을 얻소?”
“기회를 드리지요.”
“기회?”
“그렇습니다. 기회입니다. 폐하, 신 조조는 이 자리에서 천지신명에게 맹세하오니, 절대 용상을 넘보지 않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한의 신하로 남을 것입니다.”
방금 전까지 능글맞던 조조의 기세가 바뀌었다.
조조는 진지했다. 유협은 조조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어째서인가? 어째서…….”
“신은 황궁에 칼을 차고 쳐들어왔습니다. 이런 짓까지 저질렀으니 당대에 선양을 받을 수는 없게 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승상은 이 용상에 앉으려던 것이 아니오?”
“오, 이런. 폐하. 신에게 권력은 무엇보다 소중하지만, 용상은 별 가치가 없나이다. 몸소 술을 담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전쟁터에 나서지도 못하며, 남의 여인을 빼앗지도 못하는 것이 천자의 삶인데, 어찌 그 길을 택하겠습니까? 용상을 탐내는 건 원본초나 유현덕처럼 겉과 속이 다른 자들이지요. 이 조조는 천자가 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가만히 조조의 눈을 바라보던 유협의 얼굴에서 서서히 분노가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짐이 얻는 것은, 승상이 살아 있는 동안 천자로 있을 수 있다는 약속인가?”
“폐하. 신은 폐하에게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기회라면?”
“폐하께서는 연소하십니다. 그러니 신의 목숨이 다한 후에도 폐하는 아직 한창 나이일 테지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신이 죽을 때까지 실력을 기르십시오. 그리고 신의 아들 중 누군가가 위왕의 작위를 이어받게 됐을 때, 녀석과 한 판 승부를 벌여 보십시오. 한의 제업을 이어갈 수 있는 기회가 거기에 있습니다. 신은 폐하를 위해 후계자를 확실히 지정하지 않겠습니다. 약조드리지요.”
조조는 자신이 죽은 후의 일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역사의 평가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당연히 후계 구도의 정립이나 자식들의 미래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원래의 역사에서도 조조 사후 조조의 아들들은 서로 죽고 죽이는 권력투쟁을 벌이게 된다. 누구보다 영리한 조조는 이 또한 예상했으리라.
“승상에게는 자식 또한 장기판의 말에 불과한 것인가.”
“권력은 스스로 쟁취하는 것입니다. 신의 아들이 실권을 잃은 천자에게 선양도 받지 못할 만한 둔재라면 아비로서 뒤를 봐줄 이유도 없지요.”
“그 시기를 짐의 마지막 기회로 삼으라는 것인가? 승상, 그러나 짐에게는 대장군이 있소. 대장군과 짐은 서로를 형제와 같이 여기기로 약조한 사이로…….”
“폐하, 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시겠습니까? 훗날의 권력 투쟁에서 조앙이나 조비 따위가 상대라면, 폐하가 승리하고 황권을 다시 세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초는?”
덜컥.
유협은 가슴 속에서 뭔가 내려앉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
“폐하의 바람대로 마초가 이 조조를 죽이고 다시 한번 폐하를 구출했다고 치지요. 그렇게 되면, 폐하가 마초를 끝까지 신하로 부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조조는 다시 빙글빙글 웃는 표정으로 돌아와서 말을 이었다.
“폐하를 장안에서 빼낸 것이 누구입니까? 손책의 허도 침공을 막은 것이 누구입니까? 개봉 벌판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이 누구입니까? 민생을 보살피고 학술을 진흥한 자는 또 누구입니까? 이제 그자의 손을 빌려 이 조조까지 베고 나면, 세상이 누구를 제왕으로 여기겠습니까?”
천자 유협은 고개를 들었다. 황궁의 천장에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다.
—협아. 너는 폐주도 되지 말고, 암군도 되지 말거라. 너는 천자가 되어라. 이 형의 부탁이다.
소제 유변.
옳은 자질을 갖고, 옳지 못한 시기에 태어나서 스러져간 형의 얼굴이었다.
주르륵.
유협의 한쪽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어쩌면 신이 패하더라도 폐하께서는 제업을 이어가실 수도 있겠지요. 단, 그것은 온전히 마초의 결심에 달려 있는 일입니다. 신이 승리하더라도 폐하께서 제업을 이어가는 데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단, 이 경우에는 폐하께서 스스로의 힘으로 상황을 바꿀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황실의 운명을 마초의 손에 맡기시겠습니까? 아니면 스스로 기회를 잡아 보시겠습니까.”
“알았다.”
휙.
유협은 조조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대로 옷깃을 떨치며 등을 돌렸다.
“호분군과 우림군을 물리겠다. 옥새를 내 줄 터이니 대장군을 탄핵하는 조서는 그대가 알아서 만들라.”
“폐하. 참으로 옳은 결정을 하셨습니다.”
“승상 조조. 지금 이 방에서 있었던 대화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대가 진다면, 나는 그대와의 약조를 잊고 다시 마초를 불러들일 테니까.”
조조는 유협의 등을 보며 입꼬리를 한껏 올리고 웃었다.
* * *
우림중랑장 조운은 눈앞에 보이는 적병을 향해 발을 구르며 창을 찔렀다. 상산창술 절기 애각이었다.
퍽!
굉음과 함께 적병의 몸에서 피가 튀었다. 조운은 그대로 창을 빼냈다.
원래대로라면 적병의 몸에는 큼지막한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그러나 한 시진이나 계속된 싸움을 치르며 철창이 휘어져서 경력이 깨끗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조 중랑장. 어찰을 보지 못했는가? 창을 내려놓고 황명에 따라라.”
한 장수가 창을 들어 조운을 겨누며 말했다. 키가 작달막한 사내, 악진이었다.
조운은 정변을 감지한 후 바로 황궁으로 달려왔다. 단신으로 황궁의 외성을 뚫고 들어온 그를 기다리는 것은 천자가 직접 쓴 어찰이었다. 우림군을 해산하고 승상 조조의 명에 따르라는 내용이었다.
조운이 말이 없자 악진의 옆에 있던 건장한 사내가 나섰다.
“상처가 무거우니 그만 창을 내려놓고 투항하시오. 조 중랑장 또한 충의를 지키려는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이니, 오늘 군사들을 상하게 한 일은 불문에 붙이겠소.”
전위였다. 마초의 자택을 습격했던 전위는 마초가 없는 것을 확인하자 바로 황궁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지금은 단신으로 황궁에 쳐들어와 천자에게 다가가려는 조운을 막아서고 있었다.
“용기와 절개를 자랑하는 것은 그만하면 되지 않았나.”
뒤이어 낮고 침착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장군 조인이었다.
뚝. 뚝.
조운의 몸에서 흐른 피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벌써 다섯 대나 되는 화살이 몸 여기저기에 박혀 있었다.
눈앞에는 악진과 전위와 조인이 있다. 자신의 몸은 중상을 입었다. 창은 망가졌다. 천자는 우림군을 해산하라는 어찰을 내린 상태다.
조운은 잠시 생각한 후 결단했다.
탕.
조운은 철창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몸을 돌려 애마 백룡의 등 위에 올라탔다.
이히힝!
백룡에 탄 조운은 항복하는 대신 황궁의 구석진 곳을 향해 달렸다. 눈살을 찌푸리고 조운을 따라나서려는 악진을 조인이 붙잡았다.
“장군. 지금 그를 붙잡아서 후환을 없애야 합니다.”
“저자가 붙잡힐 뜻이 없으니 애꿎은 병사들만 숱하게 상할 것이다.”
조인이 악진을 말렸다. 그러자 악진 대신 전위가 나섰다.
“조자룡이 어디로 향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붙잡힌 호분군 몇몇이 실토했습니다. 그곳으로 도부수들을 보내 방심한 조자룡을 도모하겠습니다.”
“뜻대로 하라. 단, 어디까지나 병사들을 잃지 않는 게 최우선이라는 걸 잊지 말도록.”
천자를 호위하는 호분군과 우림군.
그 중 호분군은 이미 제압되었다. 호분중랑장 동승은 천자 유협의 어찰을 받자 눈물을 뿌리며 병장기를 놓고 항복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우림중랑장 조운이었다. 그러나 이미 중상을 입은 몸이다. 황궁은 조조군이 포위했으니 도망칠 곳도 마땅치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악진은 조운이 어디로 도망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고 하니, 곧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남은 것은 마초뿐인가.”
오늘 밤, 마초의 목만 취하면 정변은 성공한다.
조인은 마초가 어디 있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