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237화 (302/306)

237화. 정변 (1)

황궁.

천자 유협은 책을 펴 놓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읽고 있던 책은 한참 동안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폐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십니까?”

“황후.”

유협은 고개를 들어 황후 복수를 바라봤다. 자신과 동갑인 젊은 아내는 장난기 넘치는 눈을 하고 있었다.

“<전국책(戰國策)>을 읽고 있었소.”

“으흠. 하지만 읽다 말고 한참 동안 딴생각을 하시던걸요?”

“이 책을 한 번 만져 보시오.”

유협이 권하자 복수는 손을 내밀어 책장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탄성이 나왔다.

“부드럽네요.”

“부드러울 뿐만 아니라 질기고 튼튼하지. 얼마 전 대장군이 보낸 것이오. 대장군부에서 종이를 개량하고 있다고 하오.”

“어머, 그러면 지금 쓰는 종이를 다 이걸로 바꾸자고 하면 안 되나요?”

“짐의 생각도 그러하나, 대장군은 아직 종이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더군. 대장군은 더 먼 곳을 보고 있었소. 좋은 품질의 종이를 만드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하오. 종이를 지금보다 훨씬 빠르고, 싸게 만드는 방법을 찾고 있다 하오.”

“종이를 더 많이 만들 생각인가 보군요.”

“그렇소. 대장군은 나무나 쇠로 활판을 짜서 책을 대량으로 찍어낼 생각까지 하고 있소.”

유협의 말을 듣자 황후 복수의 눈이 반짝 빛났다.

“참으로 장한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온 천하에 학문이 융성해지지 않겠습니까.”

“맞소. 참으로 장한 일이지요.”

유협은 자신이 읽고 있던 <전국책>을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전국책은 전국시대의 모사들이 펼친 책략에 대해 논한 책이다. 유협이 이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제왕의 입장이 아닌, 신하의 입장에서 바라본 정치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주니까.’

천자 유협에게 조정의 정세는 복잡했다.

허도에 있는 동안은 조조가 올리는 표에 옥새만 찍는 허수아비였다. 낙양으로 환도한 다음에는 마가군이 같이 입조했다. 그러자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마초와 조조가 첨예하게 대립할 때마다 천자는 눈치를 봐야 했다.

마초가 이길 것 같으면 마초의 뜻을 지지하는 척을 하고, 조조가 우세해 보이면 조조의 뜻을 지지하는 척을 했다. 마치 자신이 영향력을 가진 것처럼 꾸며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다.

유협은 쓴웃음을 지으며 마초의 행보에 대해 생각했다.

‘종이, 인쇄술… 그리고 과거제라.’

마초는 과감했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조정에서 몇 년씩 갑론을박이 일어날 만한 일들을 거리낌 없이 밀어붙였다. 그 와중에 정치적 타협이 필요하면 그 또한 주저하지 않았다.

마초가 추진하는 인쇄술과 과거제의 도입은 세상의 모습을 바꿀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유협은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유협의 관심사는 신하 된 몸으로 가장 총명한 이들이 썼던 책략들이었다. 그래서 <전국책>을 수십 번 되풀이해 읽었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 봐도 마초와 비슷한 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장수의 책략도, 재상의 책략도 아니다. 이것은… 제왕의 백년대계가 아닌가.”

마초는 한을 뿌리부터 바꾸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단시간에 성과가 나올 수 없는 일이라도 개의치 않았다. 인쇄술이나 과거제는 앞으로 백 년, 이백 년을 내다보고 추진하는 일들이었다. 고작 몇 년간 재임할 뿐인 재상이라면 하기 힘든 일이다.

“후우.”

유협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뭐라 형언하기 힘든 복잡한 기분이었다.

“폐하, 무슨 근심이 있어 용안이 어두우십니까? 누가 근심거리라도 안겨 주었습니까?”

황후 복수가 걱정스럽게 다가와 얼굴을 바싹 붙이고 물었다.

복수는 영리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마음씨가 착한 여인이었다. 유협은 복수의 그런 면이 썩 좋았다.

“하하, 아무것도 아니오. 잠시 조정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소.”

“쉴 때는 쉬셔야 옥체가 상하지 않습니다. 조정 생각은 그만두시지요.”

“그렇게 하고 싶지만 최근 조정의 상황이 복잡하지 않소. 마음처럼 되지 않는구려.”

“으흠… 어떤 신하가 감히 천자의 심기를 어지럽힌답니까? 조 승상이죠? 맞죠?”

복수는 입을 삐죽 내밀고 조조의 험담을 했다. 유협은 그 모습을 보자 웃음이 터졌다.

“하하하, 황후의 말도 맞소.”

“흥, 그럴 줄 알았어요. 얼마 전에는 결국 위왕이 되지 않았습니까? 고조께서 유씨가 아닌 이들은 제후왕이 될 수 없다고 정하셨는데, 나쁜 사람… 법도를 어기고 왕작을 받는 자가 제후왕으로 만족하겠습니까?”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운 유방은 지방 군벌의 탄생을 억제하기 위해 황족 이외에는 왕작을 주지 않기로 정했었다.

그의 사후 400년간 이 원칙은 어지간하면 지켜져 왔다. 물론 어지간하지 않을 때에는 여지없이 지방 군벌들과 제후왕이 탄생하기도 했다.

“황후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승상이 위왕에 즉위한 것은 황위를 탐내서가 아니오. 아니, 물론 황위는 탐내고 있겠지. 그러나 지나치게 높은 관직을 탐한다는 건 조 승상의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고 있다는 뜻이오.”

“신하 된 몸으로 왕작까지 받았으면 더 이상 귀해질 수 없는 건데, 무슨 말씀이십니까?”

“승상은 대장군과의 권력투쟁서 패했소. 대장군이 입조하고 나서 2년, 조정에는 대장군을 따르는 이들이 꾸준히 늘어났소이다. 승상의 군대가 하북을 얻은 것은 큰 업적이지만, 대장군 또한 남방을 안정시키며 그에 못지않은 업적을 이뤘소.”

“그래도 승상은 북방의 큰 땅을 얻었고, 대장군은 기껏해야 유 형주하고 사이좋게 지내기로 약속하고 돌아왔을 뿐이지 않습니까?”

“그동안 사대부들은 대장군을 의심해 왔소. 서북방에서 많은 무공을 쌓았지만 지나치게 성정이 거칠어서 자멸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오. 그런데 그런 대장군이 태학을 다시 세우고, 종이나 인쇄술 같은 기술을 개발해서 학문을 중흥시키더니, 이번에는 외교적 수완까지 보여 준 것이오. 이제 조 승상보다 대장군에게 줄을 서는 사대부들이 더 많다고 하오.”

마초는 서량 군벌 출신이다. 명사들이나 귀족들이 그에게 우호적일 리 없다.

그러나 마초는 꾸준히 사대부들에게 유화적인 행보를 보여 왔다. 선비를 잘 대접하고, 학문 진흥에도 의지를 보이면서 실제로 태학의 부활이나 종이의 개량 같은 성과도 냈다. 반면 서량 호족들처럼 무력을 가진 지방 세력들은 여지없이 강하게 제압했다.

그러다 보니 사대부들의 태도도 바뀌었다. 명문 사족들은 명문 사족들대로, 과거제에 희망을 품은 가난한 선비들은 또 그들대로 마초를 지지했다.

“조 승상이 위왕을 칭하며 업으로 떠나기로 한 것은 패배를 시인한 것이오. 이대로라면 계속 대장군과의 경쟁에서 밀릴 것이라 판단하고, 업에 가서 하북의 군사들을 모아 대장군과 한 판 큰 싸움을 벌일 생각일 것이오.”

“어머, 그럼 기껏 재건한 낙양이 다시 폐허가 되겠네요!”

“대장군이 져서 낙양이 떨어진다면 그리되겠지요. 허나 대장군은 싸움에 지는 법이 없지 않소?”

유협은 웃는 얼굴로 책을 덮었다.

실권 없는 천자가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다. 그저 아내와 오붓한 시간이나 보내고 싶었다.

그때.

별안간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냐?”

“폐, 폐하! 성상 폐하!”

유협이 찾자 수염 없는 내관 하나가 숨이 턱에 차서 뛰어 들어왔다.

내관은 절대 황궁 안에서 뛰지 않는다. 그런데 이 내관에게는 뭔가 분초를 다투는 화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냐?”

“큰일 났습니다, 폐하!”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느냐.”

“정변입니다! 역도들이 황궁에 침입하여…….”

휘청.

천자 유협은 환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황후 복수가 화들짝 놀라 옆에서 그런 유협을 부축했다.

바깥의 소리가 점점 커졌다. 황궁에 침입한 이들이 천자의 침소를 향해 다가오는 소리였다.

* * *

“이야아압!”

깡!

마초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5척 장도를 여유롭게 쳐냈다. 제법 틀이 잡혀 있는 일격이었지만 마초의 몸에 닿기에는 너무 느렸다.

“하하,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은 솜씨다. 제법 열심히 연마했구나.”

마초와 비무를 하고 있는 것은 큰 누이동생 마수다. 어릴 때부터 무예에 깊은 관심을 보이다 어느 순간 검을 놓고 세상 모든 일에 흥미를 잃은 바 있다. 다행히 최근에는 좋아하는 사내와 혼인하여 행복한 신혼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한 번 더 겨뤄요!”

“녀석도 참. 그래, 네가 지칠 때까지 상대해 줄 테니 보채지 마라.”

마초는 지금 마수와 왕찬이 꾸린 신혼집에 와 있었다. 원래 왕찬의 관직 생활과 관련해 간단히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간 것이지만, 갑작스레 안주인인 마수가 오랜만에 연무를 하겠다며 대련을 청하는 바람에 무예 상대를 해 주고 있었다.

쨍!

마수는 칼날에 천을 감은 대련용 도검으로 마초를 몰아붙였다. 마수의 신체적 한계로 칼이 빠르거나 무겁지는 않았지만, 그 초식이 제법 변화무쌍하여 마초도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혼자서 깨우칠 수 있는 경지는 아니구나. 아버지에게 배웠느냐?”

“흥, 아버지는 한 수도 가르쳐 주지 않으셨어요.”

“그래? 그럼 철인가?”

“셋째 오라버니 실력으로는 별 도움이 안 됐을걸요.”

“하긴 그건 그렇지.”

마수가 대단한 고수는 아니다. 평범한 군관들과 겨루면 승패를 주고받을 만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기본은 부족하지만, 초식의 운용을 보면 대단한 고수에게 사사한 게 분명하다. 나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닌데, 대체 누가?’

마초의 풀리지 않은 의문을 뒤로한 채, 두 사람의 대련은 마수가 팔이 올라가지 않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인 마수는 개운한 얼굴로 자리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하하, 네가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즉 상대해줄 걸 그랬다. 그런데 도법은 누구에게 배웠느냐?”

“어려서 같이 칼 휘두르던 아이들 중에 꽤 잘하는 녀석이 있었어요. 그보다 어서 남편이나 만나 보세요.”

마초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칼을 집어넣고 내실로 들어갔다. 매제 왕찬이 간단한 주안상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누이가 보통 아낙들하고는 좀 다르지. 자네가 저런 모습을 좋아해 줘서 다행일세.”

“제가 체격이 비루하여 격검 상대를 해 주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그런데 화는 집에 없나?”

“처제는 워낙 서책을 좋아하지 않습니까. 얼마 전 황궁 서고에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얻어서 밤새 서책을 읽다 오는 게 일상입니다.”

작은 누이 마화는 장안으로 돌아가기 싫다며 낙양에 신혼집을 차린 언니 마수와 함께 살고 있었다. 얼마 전, 천자 유협이 황궁 서고를 일반에 개방한 후로는 그곳에서 기거하다시피 하며 서책에 푹 빠져 살고 있다고 했다.

마초는 미간에 깊게 주름을 잡으며 마화의 행적을 추측했다.

“황궁 비서랑 중에 잘생긴 사내라도 있나 보군.”

어려서부터 좋은 신부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아 온 마화다. 그런데 막상 혼기가 차자 묘하게 구설수에 오를 만한 행동들을 하고 있었다. 항상 청지기와 호위병들이 붙어 있으니 무슨 탈이 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보통의 귀족 처녀라면 집안에서 강하게 제재했을 것이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좀 그러다 말겠지.’

하지만 마초는 그런 누이들을 말리려 하지 않았다. 지난 생에서 불의의 사고로 두 누이를 잃었던 아픈 기억 때문일 것이다.

“하실 말씀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왕찬이 묻자 마초는 본론을 꺼냈다.

“아무래도 자네가 장안으로 가 있는 게 좋겠네. 태학에 박사 자리를 만들어 줄 테니 당분간 학생들도 가르치고, 학문도 닦으며 지내는 게 어떤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곧 전쟁이 시작될 걸세.”

위왕이 된 조조와 곧 일전이 벌어질 것이다.

마초는 왕찬과 마수 부부를 어떻게든 전쟁터에서 멀리 떼 놓고 싶었다. 가족 중 누구도 전쟁터 가까이 두고 싶지 않았다. 지난 생에서 가족을 모두 잃었으니, 처음 회귀한 9년 전부터 이런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 한중 천사도의 습격으로 장안성이 공격받은 후, 가족의 안전에 대한 집착은 더욱 심해졌다.

“낙양에서 업까지는 겨우 팔백 리 길일세. 전쟁이란 본래 승패를 장담하기 어려우니, 혹시 내가 패하고 낙양이 전쟁터가 되더라도 장안에 가 있으면 안전…….”

쿵!

마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나무와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였다.

“무슨 일이지?”

“나가 보고 오겠습니다.”

쿵!

다시 한번 같은 소리가 울렸다. 두 번 들으니 알 것 같았다.

통나무로 대문을 찍어서 열어젖히는 소리였다.

누군가 마수와 왕찬의 집에 침입한 것이다. 곧이어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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