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조조, 움직이다 (2)
202년, 음력 2월.
낙양의 황궁에서는 조회가 열리고 있었다. 천자 유협이 옥좌에 앉아 있고, 문무백관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다른 신하들보다 한 단 높게 마련된 곳에 서 있는 인물들이 세 명 있었다. 승상 조조, 대장군 마초, 그리고 천자의 명을 출납하는 상서령 순욱이었다.
“조회를 파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가지 논의를 진행하겠습니다. 상서 동소는 나와서 고하시오.”
순욱의 단정한 얼굴은 표정을 읽기 힘들었다. 그러나 원래의 역사를 아는 탓일까? 마초는 그가 무표정한 얼굴 속에 복잡한 심경을 감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욱이 지명한 상서 동소가 앞으로 나왔다. 원래 하내태수 장양의 휘하에 있다가 조조의 눈에 들어 승상부로, 다시 상서로 출세 가도를 밟고 있는 인물이다. 훤칠한 키에 깨끗한 얼굴이 마치 기개 있는 선비처럼 보였다.
“황상 폐하, 신(臣) 상서 동소가 아뢰옵니다. 승상 조조는 작년 하북에 출병하여 원소를 패퇴시키고, 그 아들들을 북쪽의 변경으로 쫓아냈사옵니다. 그뿐이옵니까? 북쪽 변경을 어지럽히는 오환의 왕이 대한을 섬기도록 하였고, 과거에는 조정이 어려움에 처하자 떨쳐 일어나 폐하를 호종하여 허에 임시 수도를 마련하고 대한의 사직이 끊어지지 않도록 보필하였나이다. 이는 주공 단이 작금에 되살아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어찌 옛 사람만이 훌륭하다 하겠사옵니까?”
동소는 그 뒤로 한참 동안 조조의 위업을 찬양했다. 천자 유협이 슬슬 질릴 때가 되어서야 본론이 나왔다.
“…그러니 승상 조조를 위공(魏公)에 봉하여 새롭게 얻은 하북의 민심을 다스리게 하시고, 구석(九錫)을 하사하여 그 위업을 치하하시옵소서.”
원소의 근거지가 있던 업성 일대는 옛 위나라의 땅이다. 위공이란 이 옛 위나라 땅을 다스리는 공작이라는 뜻으로, 봉건제 대신 군국제가 정착된 지금은 쓰이지 않는 작위였다.
즉, 동소의 말은 조조를 실질적인 독립 왕국의 왕으로 만들라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옛날의 작위를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천자 유협은 말이 없었다. 대신 여기저기서 신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허허, 위공이라면 승상직을 내려놓고 위나라 땅을 다스리겠다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승상부를 업으로 옮기겠다는 거지.”
“그러면 구석은? 구석을 얻으면 이제 의전상으로는 천자나 다름없지 않은가? 결국 하북에 자기 왕국을 세우고 천자 노릇을 하겠다는…….”
“쉿, 이 사람, 말을 조심하게.”
수군거리는 소리는 점점 커지다 이내 잦아들었다. 그만큼 막중한 사안이며, 함부로 입을 놀리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화제였다.
생각을 마친 유협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승상의 공적은 짐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구석이 아니라 그 이상의 예우를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공이 되어 승상이 짐의 곁을 떠난다면, 아직 미숙한 짐이 어찌 이 산적한 국정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는 조금 더 신중하게 논의함이 옳다.”
어려서부터 눈치를 보는 것만은 누구 못지않은 유협이다. 적당한 말로 즉답을 피한 뒤 조조를 돌아보며 물었다.
“승상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당치 않은 말입니다. 폐하께서는 저 참람된 자를 물리치십시오.”
조조는 짐짓 언짢은 듯 동소를 쳐다보며 눈을 흘겼다. 마치 자기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 같은 태도였다.
그러나 조회에 출석한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조 승상이 위공이 되려 하는가.’
‘동소를 물리치면, 다음번 조회에서 또 다른 자가 위공이 되라고 건의할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쯤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가겠지.’
조조를 쳐다본 유협이 낮은 한숨을 쉬며 순욱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순욱은 그대로 조회를 파할 것을 선언했다.
* * *
대장군부.
마초의 직속 부하들, 그리고 마가군 성향의 중신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제일 먼저 발언한 것은 시어사 순유였다.
“구석은 미끼입니다. 조 승상이 노리는 것은 위공입니다.”
듣고 있던 알자복야 황보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 역적 왕망이 받은 게 구석입니다. 조 승상이 진짜로 구석을 받을 생각은 없을 것입니다. 구석은 물리치고, 위공의 작위는 마지못해 수락하는 형태로 모양새 좋게 목적을 이루려 할 것입니다.”
구석은 천자와 같은 의전을 할 수 있는 권한이다. 천자처럼 용포와 면류관을 쓰고, 천자의 제기로 제사를 지내며, 천자의 수레를 탈 수 있는 것이다.
역사상 왕망, 조조, 손권, 사마소, 양견 같은 인물들이 구석을 받았다. 보통 찬탈이 기정사실화되어 천자 이상의 권위를 가진 권신들이 구석을 받았다. 예외적으로 손권의 경우, 조정이 통제 불가능한 거물급 지방 군벌이라 회유하기 위해 수여된 경우다.
“위공, 위공이라.”
마초는 인상을 쓰며 생각에 잠겼다.
‘지난 생에서도 조조는 위공이 되고, 곧이어 위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질적으로 천자나 다름없게 됐을 때의 일이었다. 지금은… 너무 빠르지 않은가?’
원래의 역사에서 조조는 위공이 되고, 위왕이 되며 위의 수도 업성에 머물렀다. 승상부가 그곳에 있었기에 실질적인 한의 수도는 업성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조가 업으로 이주한 다음부터 유협이 다스리는 허도의 조정은 무력화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우리 마가군이 없었지. 지금 조맹덕이 업성으로 가 버리면, 조정은 우리 마가군이 완전히 장악하는 것 아닌가?’
마초의 눈빛을 읽은 순유가 다시 한번 말했다.
“아무래도 조 승상이 관중의 상황을 탐지한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전쟁 준비가 끝난 것을 눈치챈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 천자의 조서만 받으면 조 승상을 칠 수 있으니까요. 어차피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하북으로 옮겨서 전쟁 준비를 할 생각일 것입니다.”
순유의 헤아림은 좀처럼 틀리는 법이 없었다. 그런 순유가 말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장군 황권이 뒤이어 나섰다.
“하북 쪽에서 들어온 소식으로, 조 승상의 아들 조앙이 업성에 큰 대를 쌓고 있다고 합니다. 왕궁에 버금가는 규모라고 하니, 조 승상 또한 일전을 치를 생각인 것 같습니다.”
하북에는 마가군의 협력자들이 있다. 이제 상산상이 된 하후란과 그를 따르는 의종의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말 장사를 하며 얻은 귀한 정보들을 보내 주었다.
이번에는 대장군부 종사 서서가 발언했다.
“승상부 내부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습니다. 실권을 조 승상이 쥐고 있기는 하지만 마가군의 감시를 받는 모양새고, 아군에 대한 황상 폐하의 지지도 굳건합니다. 게다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던 명사들도 아군 쪽으로 많이 돌아섰지요. 정쟁은 결국 우리 마가군의 승리로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서서의 동문들 몇몇이 승상부에 있다. 서서는 그들로부터 중요한 정보들을 얻고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마초가 입을 열었다.
“조조가 정쟁에서 밀린 것을 인정하고 낙양을 떠나겠다는 건가. 하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초는 그렇게 말하며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같은 쪽을 향했다.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향하게 된 곳에는 가후가 있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논의의 막판에 가장 중요한 의견을 제시하는 역할은 보통 그에게 돌아갔다. 가후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줘 버리지요.”
“예?”
“구…구석을요?”
가후가 말하자 좌중이 술렁거렸다. 다만 순유와 서서, 황권은 뭔가 알아챈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구석이든, 위공이든 줘 버리자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계획대로 싸우면 됩니다.”
관중의 양식, 황하의 수로, 익주 방면의 교통로.
이 정보를 탐지한 조조는 마가군이 관중의 군사들을 동원해서 낙양을 점령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가후의 계획은 따로 있었다.
‘마침 잘된 일이다. 조 승상이 업성으로 들어가면 연주와 서주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이미 연주의 장막, 서주의 장패 같은 지방 군벌들을 규합해 둔 상태였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연주와 서주에서는 대규모의 동원을 하기 어렵다.
마초가 가후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 선생의 말이 옳소. 병사는 충분하겠지만 양식이 모자라겠지요.”
“맞습니다, 주공.”
가후가 한 번 의견을 제시하면 마초는 대체로 이렇게 대답한다. 이날도 어김없었다.
“가 선생의 의견을 채택하겠소.”
드디어 조조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자리에 모인 마가군의 장수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 조맹덕이 얌전히 하북의 군사를 모아 쳐들어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지.”
마초는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그의 의중을 읽은 나관중이 고개를 끄덕이며 월길 쪽을 돌아봤다.
“월길 두령은 병주로 사람을 보내십시오.”
“으흠, 드디어 시작이군요. 알겠습니다.”
월길이 마초와 나관중을 번갈아 보며 씩 웃었다.
병주에는 마초와 나관중이 따로 준비해 놓은 패가 하나 있었다.
* * *
휘이이잉.
육손은 차가운 모래바람을 맞으며 태원 벌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고향이라면 벌써 낮의 햇살이 따가웠겠지만, 병주는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았다. 생전 겪어보지 못했던 추위를 견디며 보낸 겨울이 한 번 지났다.
마초는 그가 군문에 들고 싶다고 하자 바로 이곳 병주로 보냈다.
‘싸움을 익히려면 실전을 치르는 게 가장 좋지. 병주에 가면 실컷 싸울 수 있으니까 많이 배우고 오라고.’
병주에는 유독 거친 자들이 많았다. 반면 육손은 남방 출신이며, 심지어 귀족 출신이었다. 어린 나이에 깡마른 체격, 파리한 안색도 불리한 조건이었다. 대번에 병주 방면 총대장의 부장으로 부임한 그를 길들이려는 군관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육손이 첫 전투를 치르자 그런 이들은 전부 사라졌다. 육손의 용병술은 섬세하고 치밀했다. 육손의 말을 따르면 살아남는다는 것을 깨닫자 거친 병주병들은 육손을 따르기 시작했다.
펄럭.
옷자락이 강풍에 휘날리며 여윈 몸의 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육손은 그 상태로 전장을 한눈에 담으며 머릿속으로 모의전을 치르고 있었다.
“야, 임마! 거기서 뭐 하고 있어!”
그때 우렁찬 목소리로 누군가 육손을 불렀다. 부장인 자신을 이렇게 부를 수 있는 인물은 병주에 단 한 명뿐이었다.
“장군.”
육손은 등을 돌려 상관에게 군례를 취했다. 기분이 좋은지 실눈을 반달 모양으로 뜬 탕구장군 장료가 육손의 어깨를 툭 쳤다.
“대장군이 닭을 보냈다. 내가 푹 삶아서 죽을 쒔으니까 빨리 와서 먹으라고. 자식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장료는 장군이 된 이후로도 항상 먹고 사는 것을 중시했다. 잘 먹이고 매번 이기니 병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남방 출신인 육손이 힘을 내도록 이따금 쌀밥을 지어 주는 세심한 면도 있었다.
그리고 요리도 썩 잘했다. 이렇게 특식이 있는 날은 보통 장료가 직접 무쇠솥을 걸고 음식을 만들었다. 육손이 닭을 먹는 것을 보고 장료는 씩 웃으며 말했다.
“변방에서 고생한다고 닭을 삼천 마리나 보내다니, 우리 대장군도 참 대단하지 않아?”
“대장군은 병법의 달인입니다. 그런 분이 사기를 중히 여기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요.”
“녀석도 참. 육백언이, 너 군문에서 공을 세워 출세하고 싶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네가 복이 있구나. 이제 곧 큰 공을 세울 기회가 온다.”
장료는 여전히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대장군에게 서신이 왔다. 이제 곧 조조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임무를 해야겠지.”
탕구장군 장료가 거느린 1만 군사의 임무.
여포 사후, 끊이지 않는 병주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 이민족들의 약탈을 막아내는 것.
그리고 유사시 하북의 조조군 거점을 직접 타격하는 것이다.
“우리는 업성을 친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전투가 될 테니 잘 먹고 잘 준비해라.”
육손은 묵묵히 장료에게 군례를 올렸다. 장료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닭을 뜯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마가군에서 가장 큰 임무는 서황이나 방덕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임무가 장료에게 돌아갔다. 앞으로 사선을 넘나들어야 하는 장료는 무슨 생각인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