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조조, 움직이다 (1)
“훌륭하군.”
조조는 방금 마신 술을 두고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검붉은 서역의 술이었다. 달콤한 맛과 은은한 향에 끌려 몇 잔 즐기다 보면 어느새 취기가 돌고 마음이 열렸다.
“서역에서 즐겨 마시는 포도주라 하더군요. 마땅히 조공께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가져왔소이다.”
포도주를 가져온 마초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한 숙부(진서장군 한수를 말함)를 따르던 성공영이라는 친구가 지금 돈황태수로 있소. 서북쪽 끝의 돈황, 장액, 주천 3군을 평정하고 서역 교역을 복원했다고 알려 왔소. 내가 그 친구 뒤를 좀 봐주고 있어서 이렇게 매년 선물을 보내지 뭡니까.”
“으하하, 내가 어릴 적에 이런 일이 있었지. 썩은 선비 하나가 십상시에게 포도주를 뇌물로 바치고 서량을 다스리는 양주자사 자리를 얻었어.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물건인데, 이런 게 매년 선물로 들어온다고?”
조조는 그렇게 말하며 껄껄 웃었다.
조조가 말하는 일곡양주(一斛凉州) 사건은 마초도 알고 있는 사건이었다. 당시 뇌물로 양주자사 자리를 얻었던 탐관오리 맹타는 지금 죽었다. 그 아들 맹달은 익주 내전에서 유탄을 배신하고 마가군에 붙어서 지금도 벼슬살이를 잘 하고 있었다.
“술은 훌륭하지만, 그래 봐야 술이지요. 대량으로 빚을 수도 없는 술에 무슨 큰 의미가 있겠소? 황상 폐하, 관서대도독, 그리고 조공이 나눠 가지신 것을 다 합쳐도 천하에 100병도 채 되지 않을 것이오.”
“자네는 사치가 뭔지 잘 모르는군. 100병도 되지 않으니까 가치가 있는 걸세.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면 그게 무슨 가치가 있겠나? 그건 그렇고, 서역에서 뭐 다른 물건은 들어온 게 없나?”
“있지요. 서역에서 목화를 얻었소이다. 무위 일대에 밭을 크게 만들어서 재배해 보려고 하는데, 내가 원하는 만큼 면포를 뽑으려면 시간이 몇 년 걸릴 것이라 하더군요.”
마초가 말하는 ‘서역’은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우즈베키스탄에 걸쳐 있는 수많은 나라들을 말한다. 마초는 나관중의 건의에 따라 이 지역에서 목화를 들여와 서량에서 재배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지금은 장안의 관서대도독부가 서량 사람들이 굶지 않도록 신경 쓰지만, 훗날 천하를 평정하면 결국 천하의 중심은 다시 낙양이 될 것이다. 서량 사람들이 가진 것은 무력밖에 없으니, 언젠가 다시 동탁 같은 자가 나타나 반역의 땅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이것이 마초가 가진 문제의식이었다. 마침 나관중이 서량에 목화 산업을 육성하자고 건의했다.
—어차피 식량 생산으로는 한계가 있는 땅입니다. 비단이나 소금에 버금가는 특산물을 만들어서 지역을 풍요롭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목화였다. 서역 원정에서 목화씨를 얻은 후, 서량에 대규모 목화 재배를 도입하고, 면직물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나관중이 생각하는 14세기 수준의 면직물을 생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익주의 비단에 버금가는 귀중한 특산품이 서량에도 생기는 것이다.
이런 의도를 조조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조조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당겨 앉았다.
“자네는 항상 나를 놀라게 하는군. 서량 호족들을 먼저 힘으로 눌러 놓고, 먹을거리를 줘서 회유한다? 만약 목화 재배가 성공하면 서량은 전에 없는 발전을 누릴 것이고, 항상 불안하던 정세도 안정되겠지. 자네는 정말 백 년을 내다보는 식견을 가졌군.”
“나야 그저 말 타고 칼 휘두르는 무부 아니겠소? 다행히 주변에 현명한 이들이 많은 덕분이지요.”
조조는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현명한 이들이라. 어떤 현명한 이가 있어 그런 백년대계를 낸다는 말인가?’
가후는 모사다. 순유는 정치가다. 황보력은 그저 명사일 뿐이다. 법정이나 황권 같은 젊은 인재들이 있지만, 그들은 군문의 일을 맡아 보는 군사다.
그때, 조조의 머리에 한 명이 떠올랐다. 벌써 몇 번이나 결정적인 계책을 내서 마초를 위기에서 구했다는 인물, 지금은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자네의 장자방이 낸 계책인가?”
“으하하, 나를 항우와 비교하는 말은 들어 봤어도 내 수하를 장자방과 비교하는 말은 처음 듣는군요. 누구를 말씀하시오?”
“비서랑 나관중 말일세.”
“맞소. 그런데 나관중이가 장자방이라니, 헛된 이름이 퍼졌군요.”
이제까지 전면에 나서지 않고, 마초의 뒤에 숨어 있던 나관중이다.
그러나 최근 나관중의 명성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나관중이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두보나 소동파의 시들은 낙양의 귀족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당대 최고라고 불리던 시인들이 전부 충격을 받고 나관중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 했다.
“내가 바로 그런 시인들 중의 하나지. 조만간 연회 자리를 한 번 만들어 보세. 천하제일 시인과 술 한 잔 나눠야겠네.”
“하하, 그리하지요.”
“뿐만이 아닐세. 과거제를 제안한 것도 나관중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아, 그건 사실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했소이다. 그 친구는 그저 여러 사람 중 하나였을 뿐이오.”
마초는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나관중을 보호하려는 목적이었다.
‘태학생들, 그 중에서도 가문의 배경이 없는 젊은 선비들은 과거제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지만, 그만큼 기존 명문 귀족들이 고깝게 보는 시선도 커지고 있지. 여기서 관중이 전면에 나서는 건 좋을 게 없어.’
그런 정치적 부담을 질 수 있는 건 마초 자신이나 마등 뿐인데, 마초는 글공부가 대단치 않았고 마등은 아예 병서만 읽은 전형적인 무장이었다. 이런 자들이 과거제를 만들었다고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으흠, 그런가? 아무래도 너무 급진적이라는 생각은 들었지.”
“이건 이십 년 후, 삼십 년 후를 보고 하는 정책이올시다. 다만 나라에는 확실히 도움이 될 것 같으니, 혹시나 내가 전쟁터에서 죽어 버리면 조공께서 잘 이어 주시오.”
마초는 그렇게 능청을 떨며 술잔을 비웠다. 벌써 포도주 한 병이 바닥을 드러냈다.
작년에 마초는 형주로, 조조는 하북으로 원정을 떠난 후 처음으로 독대하는 자리다. 작년의 원정에서 마초는 형주를 동맹으로 끌어들였고, 조조는 원소군의 세력을 거의 꺾어 놓고 기주를 손에 넣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니 우리 두 사람의 승패를 가리기는 어렵게 됐군.”
“뭐가 어찌 됐든 난세만 끝나면 되는 거지요. 난세를 내가 끝내든, 조공이 끝내든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겠소?”
달칵.
마초는 다 마신 포도주잔을 상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조가 두 번째 포도주병을 따려고 하는 것을 손사래를 치며 제지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승상. 내달 조회에서 뵙지요.”
“살펴 가시오, 대장군. 즐거웠소이다.”
* * *
그리고 잠시 후.
승상부의 후원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30대 초반의 문관이었다.
“승상을 뵙습니다.”
“봉효 왔는가.”
곽가는 조조에게 길게 읍을 한 뒤 마주 앉았다.
곽가의 태도는 예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항상 흐트러져 있던 매무새는 단정했다. 조조에게 올리는 인사도 단정한 선비의 그것이었다.
조조는 곽가의 옷 위로 드러난 몸의 선이 탄탄한 것을 보고 씩 웃으며 물었다.
“요즘 무공이라도 배우나 보군.”
“전 교위에게 청하여 가끔 단련하고 있습니다.”
“오호, 창을 쥐고 전장에 나가려고?”
“이제 와서 조금 익힌 무공으로 무슨 전쟁을 하겠습니까? 다만 적당히 몸을 움직이면 정신이 또렷해지기에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전위가 스승이라면 적당히 몸을 움직이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곽가는 익주의 공작이 실패하여 실각한 후 완전히 사람이 달라졌다. 흐트러진 태도를 고치고, 아무도 책잡을 수 없는 선비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술과 기생을 멀리하고, 체력을 늘리기 위해 무공까지 익혀 가며 자신을 단련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서 승상이 대업을 이루도록 만들 것이다.’
가만히 곽가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조조는 크게 웃으며 곽가의 등을 두드렸다.
“으하하, 이 친구야. 다 좋은데 눈빛을 숨기라고. 그런 눈을 하고 있으면 자네가 뭘 하는지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 않겠나.”
곽가는 공식적으로는 승상부에서 병법서를 연구하고 있다. 누가 봐도 한직(閑職)이다.
그러나 곽가가 실제로 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오늘은 그것을 보고하기 위해 온 것이다.
“마가군의 동향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 녀석들은 항상 심상치 않지. 이번엔 뭔가?”
“관중에 양식이 쌓이고 있습니다. 삼보윤 두기가 곳곳에 지어 놓은 곡창에 비축된 양식이 벌써 오십만 석이 넘습니다.”
“관중은 일전의 대기근 때문에 일부러 비축량을 많이 가져간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너무 많군.”
“게다가 익주로 통하는 가도를 짓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비단 교역을 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군량 수송로가 틀림없습니다.”
“으흠.”
“홍농태수 장기가 낙양으로 통하는 황하의 협곡도 정비하고 있습니다.”
“그건 꽤 심각해 보이는군. 황하를 통해 군량을 나를 수 있으니.”
“심각한 정도가 아닙니다. 승상, 마가군은 전쟁 준비가 사실상 끝났습니다. 내일 전쟁이 벌어지면 바로 관중에 비축된 오십만 석을 황하를 통해 중원 쪽으로 투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텅 빈 관중의 곡창은 익주의 곡식을 실어 날라서 메우겠지. 허허, 참.”
오십만 석이면 십만대군이 2년간 전투만 할 수 있는 양이다.
조조는 곽가의 보고를 듣자 쓴웃음을 지었다.
“마초는 항상 나를 놀라게 한단 말이야. 전쟁 준비가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네.”
“마가군이 곧 싸움을 걸어 올 것입니다.”
“자네는 그 시기를 언제로 보는가.”
“아마도 내년, 늦으면 내후년, 그리고 빠르면…….”
“올해가 될 수도 있겠군. 나는 올해라고 보네.”
“어째서입니까?”
“내년이 되면 하북의 소출이 우리에게 들어온다. 마초는 그걸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승상, 아무쪼록 빌미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빌미, 빌미라.”
“천자를 대할 때 유의하시라는 말입니다. 마초가 결심한다면, 뭔가 천자의 심기가 불편한 것을 트집 잡아 조서를 받아낼 것입니다. 천자에게 빌미를 주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툭. 툭.
조조는 가만히 손가락으로 상을 두들겼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승상.”
“십상시에게 맞서고, 동탁과 싸우고, 원소를 막아내서, 내가 구한 나라다. 관리들의 녹봉도 주지 못하는 조정을 허도로 옮겨서, 내가 살려낸 나라다.”
“…….”
“내가 죽어가는 나라를 구할 동안, 천자는 무엇을 했는가?”
말을 거듭할수록 조조의 눈동자에 타오르는 불꽃이 더욱 강해졌다.
최선을 다했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권신이 되어 국정을 좌우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일은 조조의 생각대로 풀리지 않았다. 국정의 권한은 마초와 둘로 쪼개서 갖고 있었다. 마초는 천자의 신임을 기반으로, 자신의 영지에서 대놓고 전쟁 준비를 하며 조조를 압박하고 있었다.
“내가 지켜낸 나라다. 유씨 성 가지고 태어난 자에게 주지 않겠다. 서량의 애송이에게도 주지 않겠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준비해라, 봉효. 내가 먼저 움직일 것이다.”
조조는 그 말을 남기고 옷깃을 떨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