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오환돌기(烏丸突騎)
해가 바뀌어 202년이 되었다.
한때 유주, 기주, 청주, 병주를 제패하고 하북을 통일했던 원소군이다. 그러나 병주는 마가군에게, 청주와 기주는 조조군에게 빼앗기고 유주의 일부분만을 영유하게 되었다.
원소의 사후, 유주로 도망친 원소군의 후계자 원상은 전열을 수습해 조조군에게 반격을 가하려 했다. 그런데 그나마도 쉽지 않았다.
“원상이 조앙 공자에게 형편없이 깨지고 도망쳤다는 소식은 들었소.”
유주 탁군의 어느 벌판.
조앙은 오환족의 대인(大人) 답돈을 만나고 있었다.
답돈은 세 갈래로 나뉘어 있던 오환족을 자신의 발아래 단결시켰다. 그 후로 북방 이민족 사이에서 흉노 묵돌선우의 재림이라 불리고 있는 인물이다. 직접 만나보니 마흔 살 정도의 관록 있어 보이는 사내였는데, 남들의 두 배에 달하는 너른 어깨와 짙은 수염이 위엄 있는 용모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답돈 대인께서도 천명(天命)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이오. 우리 한인들은 하늘의 뜻에 따라 살려 한다오. 천명이 우리에게 있는데 어찌 질 수 있겠소?”
조앙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답돈에게 예를 표했다.
듣는 답돈의 생각은 어땠을까?
‘어린놈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구나. 한인이 우리의 목초지를 빼앗고, 재물을 미끼로 분열시키는 것도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한인들의 집요한 이민족 분열 정책에 당해 온 답돈은 코웃음을 쳤다. 다행히 짙은 수염이 그의 표정을 가려 주었다.
“허허, 조앙 공자께서 이리 덕이 높으시니 참으로 조 승상과 대한의 복이오.”
원래의 역사에서는 원소의 편에 섰다가, 조조와의 싸움에 져서 전사한 답돈.
그러나 조앙으로 인해 역사가 바뀌었다. 원소는 원래의 역사보다 빠르게 죽었고, 원소군의 잔당도 빠르게 멸망하고 있었다. 오환족 대인 답돈은 원소의 편에 설 기회를 놓친 채, 새롭게 하북의 지배자가 된 조조군의 북방 책임자 조앙과 회담을 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불리한 협상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답돈 대인께서도 고민이 많으실 것이오. 이제 유목 생활만으로는 살 수 없는 시대요.”
“공자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요?”
“들어보시오. 병주의 남흉노와 서량의 강족, 저족들은 한인 협력자를 얻은 후 승승장구하고 있소. 목초지는 넓어지고, 교역도 폭넓게 하고 있지요. 유주의 오환만 뒤처질 수는 없지 않겠소?”
실제로 그랬다. 마초를 따르는 강족의 철리길, 저족의 천만, 남흉노의 표 같은 이들은 몇 차례 원정에 군사를 보태고 대신 넉넉한 재물과 식량, 교역권과 목초지 운영권을 보상으로 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계속 무리를 불리고 있었다.
답돈은 조앙을 보며 씩 웃었다.
“그 말을 하실 줄 알았소. 나 또한 조 승상을 뒷배로 두고 싶소.”
초원의 유목민에게는 족보가 없다. 지금 선비족이라 불리는 이들의 조상이 예전에는 강족이었을 수도 있고, 지금의 오환족이 과거에는 흉노의 일파였을 수도 있다. 유목민의 삶은 족보를 따지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 그러니 때마다 생존에 유리한 쪽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이다.
그런 유목민 집단의 우두머리답게, 답돈은 오환족의 생존에 유리한 쪽으로 결정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유주가 전쟁터가 되면서 한인들도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다. 이는 유사시 우리가 약탈할 곡식조차 없다는 뜻이니, 이 상황에서 겨울 한파가 닥쳐서 가축들이 죽어나가면 우리는 끝이다.’
수천 년 동안 유목민의 삶은 별로 변한 게 없다. 언제나 식량이 문제였다.
조앙은 웃으며 말했다.
“기주 중산국에 교역소를 설치할 계획이니 모피를 듬뿍 가져오시오. 비단이 필요하면 비단을, 양식이 필요하면 양식을 드리겠소.”
“공자는 말이 좀 통하는군.”
답돈은 크게 기뻐하며 조앙을 자신의 군막으로 초청했다. 술잔을 나누며 동맹의 의식을 치르기 위함이었다.
술기운이 어느 정도 올라왔을 때, 답돈은 궁금한 것을 물었다.
“내가 알기로 조 승상은 북방 유목민에 대해 강경한 인물이라 들었소. 이렇게 우리의 편의를 봐줄 때는 뭔가 원하는 바가 있을 터.”
“하하하.”
“공자께서는 시간을 끌 필요 없소. 조 승상이 원하는 게 무엇이오?”
답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조앙도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곧 전쟁이 있을 것이오.”
한인이 유목민에게 원하는 것은 딱 두 가지.
하나는 한인들의 농토를 약탈하지 않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한인들끼리의 싸움에 용병으로 참전하는 것이다.
“전쟁이라. 그럴 줄 알았소. 상대는… 마초인가?”
“그렇소.”
벌컥. 벌컥.
답돈은 마유주를 들이켰다. 한 부대를 다 비우자 씩 웃으며 조앙을 쳐다봤다.
“한인들은 마초를 패왕 항우의 재림이라 부른다지.”
“어디에나 말을 지어내기 좋아하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아무려면 마초가 항우 정도의 수준이겠소?”
“설령 진짜 항우면 또 어떤가. 나 또한 묵돌선우의 재림이라 불리는 몸, 재미있는 승부가 되지 않겠소?”
400년 전, 패왕 항우는 결국 고조 유방에게 패해 죽음을 맞았다.
반면 묵돌은 유방의 군사들을 대패시키고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묵돌이 이끄는 흉노가 형이 되고, 유방이 세운 한이 아우가 되는 맹약이었다.
답돈은 마초를 겁내지 않았다. 조앙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답돈 대인. 훗날 승상께서 마초 토벌의 군사를 일으키시면 선봉에 서 주시오.”
“그것은 어렵지 않소. 단, 남흉노나 강족 따위를 상대하게 하려거든 부르지 마시오. 나는 오환족의 명운을 걸고 참전할 것이고, 승리한 후에는 왕작을 요구할 것이오. 그러니 그에 걸맞는…….”
“걱정하지 마시오. 대인께서는 마초의 금철기를 상대하게 될 것이오.”
조앙이 답돈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전예를 시켜 마구 한 습을 가져오게 했다.
“서량 금철기가 사용하는 마구요. 대인 휘하의 오환돌기(烏丸突騎)들을 이 마구로 무장시키시오.”
“오호.”
답돈이 씩 웃었다.
조앙이 가져온 것은 단단한 등자, 고정식 안장, 긴 창, 그리고 마갑이었다.
전통적인 궁기병으로 이뤄진 유목민 기병대에 앞선 마구를 통해 충격기병을 더한다. 마가군 또한 궁기병 위주의 편성에 금철기라는 충격기병을 더해서 강한 군사력을 완성했다.
동일한 개념으로 강한 기병을 육성해서 마가군과의 싸움에 대비한다. 그것이 조조와 조앙의 생각이었다.
“마구와 장비, 양식은 우리가 얼마든지 보급해 드리겠소. 대인께서는 최대한 많은 수의 오환돌기를 준비하시오. 언젠가 오환돌기가 마초를 치는 칼이 될 것이니, 그때는 목숨을 아끼지 마시오.”
조앙이 단호하게 말했다. 답돈은 이를 드러내며 한껏 웃음을 지었다.
* * *
낙양의 황궁에서는 과거 시험이 열리고 있었다.
시험을 봐서 관리를 뽑는 과거제는 수나라 때 도입된 이후 1500년간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한국에서 존속했다. 청나라 때는 미국의 공무원 시험제도에 영향을 주었고, 이후 동양으로 역수입되어 여전히 관리 선발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후한대에도 간단한 형태의 시험은 존재했다. 효렴으로 뽑힌 유생 출신들에게 경전의 해석에 대한 시험을 봐서 등급과 전문 분야를 나눈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 자체였고, 이는 여전히 추천제로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과거 제도의 취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번 과거 시험도 완전한 형태는 아닙니다. 태학생과 그들의 추천을 받은 자들만 시험을 보는 구조니까요. 그러나 일단 시작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여러 번의 보완을 거치면, 이 과거제가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이 될 것입니다.”
나관중은 과거 시험장을 보며 감개무량했다. 과거 제도의 도입을 주장한 게 그였기 때문이다.
마초는 기뻐하는 나관중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무 기대하지는 말라고. 자네가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도입했지만, 진짜 저런 걸로 관리의 대부분을 선발했다가는 호족들 등쌀을 버틸 수 없을 걸세. 그리고 실질적인 문제도 있어. 과거 시험으로는 경학에 능한 이들밖에 못 뽑지 않나.”
과거제가 전면적으로 도입된 것은 천하가 안정되고 천자가 절대 권력을 갖게 된 이후다. 난세가 끝나지 않은 지금 시대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한 관리들은 호족들을 견제해 줄 것이다. 학식만 있고 가문의 힘은 없는 많은 사대부들이 과거제와 과거제 도입을 주장한 마초를 지지할 것이다. 마초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나관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여러 부작용도 나올 것입니다. 이를테면 제가 살던 시대에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남방 출신들의 학문이 북방 출신들을 압도해서, 이름을 가리고 채점하면 남방 출신만 관리가 되는 상황이 벌어졌지요. 그러자 조정에서는 지역별 안배를 도입해서, 북방 출신과 남방 출신을 일정 비율로 뽑기 시작했습니다.”
“으음, 그럴 수도 있겠군. 학문이 융성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이 있으니.”
마초는 나관중의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다.
“관중, 자네 고향은 병주 태원… 그러니까 북방이잖아?”
“그, 그야…….”
“그러면 자네도 지역별 안배의 덕을 봤을 테고?”
“주공, 그것은…….”
“그런데 그렇게 안배를 받고도 시험에서 떨어졌다는 거지?”
마초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나관중을 쳐다봤다. 나관중은 새빨개진 얼굴로 항변했다.
“주공, 과거가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아십니까? 떨어지는 건 전혀 이상한 게 아닙니다!”
“그래, 그래. 그렇겠지.”
과거 시험의 경쟁률은 항상 100대 1이 넘는다. 평범한 시골 선비들에게 과거 급제란 사실 비현실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과거제가 없는 시대를 살았던 인간인 마초는 이런 이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여튼 그런 부작용들이 있는데,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속도를 조절해서 천천히 도입할 예정이니까요.”
과거를 주관하는 것은 형식상 천자 유협이었다. 유협은 시험장에 친림하여 응시자들을 격려했다.
그 옆에는 태학이나 승상부에서 학술을 담당하는 백관들이 서 있었다. 마가군 측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순유, 종요, 황보력 같은 이들이 있고, 조조군 측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순욱, 동소, 그리고 조조 본인이 있었다.
누가 장원급제할 것인가?
그것은 태학생을 직접 가르친 태학의 박사들도 예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현대의 시험도 변수가 많은데, 채점자의 주관이 개입되는 고대의 과거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마초와 나관중은 장원급제자가 누구일지 예상할 수 있었다.
응시자들이 작성한 답안은 당일 밤을 새서 채점이 이뤄졌다. 그리고 다음 날, 응시자들은 다시 시험장에 모였다.
위기, 유이, 최림, 고유.
원래의 역사에서는 전부 존경받는 고관이 되는 인물들이다. 정사 <삼국지>를 외우고 있는 나관중의 기억에 따라, 마가군이 태학으로 미리 끌어들여서 친 마가군 성향으로 키워낸 젊은이들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이들은 전부 급제의 영광을 안았다.
그리고 심사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선택한 장원급제자가 천자를 배알하기 위해 단을 올랐다. 8척 장신의 썩 잘생긴 청년이었다.
“제갈량, 자는 공명. 황상 폐하를 뵙습니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오랫동안 방황하던 천재가, 1회 과거의 장원이 되어 조정에 출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