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이진이장
여인.
상복을 입은 젊은 여인이다. 나이는 스무 살 정도. 바닥에 앉아 중년 여성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대들은…….”
조앙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미인이었다. 아니, 미인이라는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검소한 상복 차림, 얼굴에 깃든 피로감과 슬픔은 오히려 여인을 더욱 청초하게 보이게 했다.
젊은 여인을 안고 있는 중년 여인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조앙을 향해 말했다.
“승상의 아들인가요?”
조앙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얼른 두 손을 들어 중년 여인에게 인사했다.
“조앙, 자는 자수. 조 승상의 장자입니다. 승상께서는 원공과 오랜 교분이 있으셨으니, 부인을 모시는 데 한 치도 예에 어긋남이 없게 하라 이르셨습니다.”
중년 여인은 원소의 처 유 부인이었다. 조앙은 숙모를 뵙는 예로 유 부인에게 인사를 올렸다. 유 부인은 웃는 낯으로 인사를 받았다.
“세상사가 참 덧없지 않습니까. 원 대장군이 이리 허무하게 돌아가시고, 처와 며느리는 이렇게 옛 친구의 아들에게 칼을 받아 죽게 되었으니 말이지요.”
“부인, 저는 결코 부인을…….”
“됐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기로 마음을 정했으니 두말하지 마십시오. 다만 돌아가신 분의 장례는 엄수해야 하기에, 공자께 약간의 시간을 청합니다.”
“돌아가신 원공께서는 일세의 영걸이십니다. 마땅히 제후의 예로 장례를 치를 것입니다. 또한 유족들께도 제후의 대우를 하여, 부족함이 없도록…….”
거기까지 말하던 조앙은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 부인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안겨 있는 둘째 며느리를 향해 말했다.
“이리될 줄 알았느니라. 늙은 나는 죽어서 더 이상 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으나, 너는 굳이 죽음을 고집할 필요 없다.”
“어머님!”
“이제 와 절개 따위가 뭐가 중요하겠느냐? 너의 뜻대로 하여라.”
유 부인은 그렇게 말하고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유 부인에게 안겨 있던 젊은 여인은 둘째 며느리 견복. 둘째 아들 원희의 아내였다. 원희가 후계자 원상과 함께 유주로 도망친 이후, 업성에 남아 최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전예는 상황을 파악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조앙의 곁에 다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장 공자, 잘 생각하십시오. 하북의 민심을 얻으려면 원소의 유족들을 극진히 대우해야 합니다. 순간의 정념에 빠져 일을 그르치지 마십시오.”
“아아, 그래.”
조앙은 꿈에서 깨어난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런데 그때, 견복이 머리를 들고 조앙을 빤히 올려다봤다.
‘희다.’
승장으로서 원가의 처분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 조앙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정치나 전쟁이 아니라 견복의 흰 피부였다. 흰 얼굴 가운데 있는 콧날은 딱 아름다울 만큼만 높았다. 그 위의 눈매는 딱 아름다울 만큼만 크고 길었다. 서역의 석공들도 이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빚을 수는 없을 것처럼 보였다.
‘나는… 혼례를 치렀다. 그러니 이제 첩밖에 들일 수 없다.’
조조의 아들이, 원소의 아들의 처를 빼앗아 첩으로 들인다면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할 것인가.
그때, 조앙을 바라보던 견복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자신의 처연한 신세를 한탄하는 것일까?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아니면, 조앙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낸 것일까?
미색에 눈이 먼 사내들이 늘 그렇듯이, 조앙은 눈물의 의미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석했다.
“…겠다.”
“예?”
“내가 취해야겠다.”
결심이 섰다. 조앙은 성큼성큼 걸어 다가갔다. 그리고 견복의 앞에 쭈그려 앉은 후, 두 손가락으로 견복의 턱을 들어 올렸다.
“아.”
견복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조앙에게는 그것 또한 은근한 유혹의 목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소첩은 지아비가 있는 몸입니다.”
“유부녀라.”
조앙은 그렇게 되뇌며 견복의 얼굴을 마주 봤다.
“그 또한 좋지 않은가.”
“장 공자.”
전예는 또렷한 목소리로 조앙을 불렀다.
그리고 조앙이 옆을 돌아본 순간, 전예의 눈이 커졌다.
‘승상…….’
수년간 보여줬던 올곧은 모습은 전부 연기였을까?
정념에 사로잡혀 솔직해진 조앙은, 조조와 똑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 * *
예주 진국.
이곳을 다스리는 진왕 유총은 마가군에 우호적인 인물이었다.
원술이 진국을 치러 왔을 때 원술군을 무너뜨리고 원술을 사로잡은 것도 마초고, 손책이 허도를 향해 진격할 때 진국에서 큰 싸움을 벌여 손책을 패주시킨 것도 마초였기 때문이다.
마가군의 모사가 진왕부를 잠시 빌리겠다고 청했을 때, 흔쾌히 응한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먼 곳까지 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진 대인.”
가후는 진왕부의 구석에 마련된 별실에서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만나고 있었다. 50대의 가후보다 십여 세는 더 많아 보이는 백발의 노인이었다.
“허허허.”
가후를 찾아온 노인, 진규는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연신 차를 홀짝였다.
“차가 좋군요.”
“남중에서 보내온 차입니다. 남중에 호만교위를 두도록 상표한 게 대장군이니, 이에 호만교위가 매년 좋은 차를 보내고 있지요.”
마초는 서량의 군관 아들로 유년기를 보낸 젊은이다. 그런데 마치 부귀영화를 다 누려본 중년 사내처럼 이상하게 고급스러운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마초가 굳이 남중에서 차를 가져다 먹는 것에 대해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았다.
하지만 남중에서는 차만 가지고 오는 게 아니다. 맹획의 부하들이 차와 함께 가져오는 익주의 정보가 핵심이었다.
서주 호족 진규 또한 비슷한 상황이었다. 겉으로는 선물인지, 뇌물인지 모를 물건들을 바친다는 핑계로 매번 귀한 식재료들을 들고 찾아왔다.
가후는 진규가 가져온 말린 해삼을 열어보고 한쪽으로 밀었다.
마초는 내륙 출신이라 해삼을 먹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해삼이 아니라, 해삼과 함께 진규가 가져온 정보인 것이다.
“장선고(선고는 장패의 자)가 우리의 편에 서기로 했습니다.”
진규가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자 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선고는 무력을 가진 인물이지요. 다른 호족들과는 그 무게가 다릅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서주는 명목상 조조의 영역이다.
그러나 서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기는 어려웠다. 조조는 서주 사람 수십만을 학살하여 인심을 잃었다. 반면 그런 상황에서 서주를 지키며 조조에게 저항했던 전임 서주목 유비에게는 열광적인 추종자들이 붙어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서주는 여전히 호족들의 세력이 강했다. 가후는 그런 호족들을 뒤에서 움직여 하나둘씩 마가군의 편으로 포섭하고 있었다.
“전부 가 선생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선생의 말대로 하여 여지껏 실패했던 적이 없습니다.”
서주 호족 진규는 가장 적극적인 협력자였다. 손책의 침공으로 인해 유비가 서주를 잃고 방랑하게 되었을 때, 진규의 아들 진등이 손책군의 상장 주유에게 죽었다.
그 사건의 배후에 조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진규는 흔쾌히 마가군의 편에 섰다. 그리고 지금까지 서주에서 친 마가군 세력을 늘리며 뒷공작을 해 왔다. 그리고 끝내, 서주에서 공작을 시작하며 최종 목표로 삼았던 독립 군벌 장패의 포섭에 성공한 것이다.
“이번에 포섭한 장선고는 본래 유협의 우두머리 출신이라 싸움에 능합니다. 거느린 군사도 오천이 넘지요.”
“이 가모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날 황하에서 원소와 큰 싸움을 벌일 때, 장선고가 거느린 군사로 원소의 후방을 공격해서 큰 이득을 보았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훗날 가 선생과 마 대장군이 큰 싸움을 벌일 때, 그때처럼 장선고가 뒤를 찌르면 조맹덕은 큰 곤경에 처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절대 티가 나서는 아니 됩니다. 일단 조맹덕이 내린 낭야상의 관직을 잘 수행하라 이르십시오. 언젠가 좋은 날이 오면 장선고와 진 대인, 그리고 이 가모가 모여서 술잔을 나눌 수 있겠지요.”
“허허, 이를 말이겠습니까. 그저 이 늙은이가 죽기 전에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군요.”
겉으로는 마음씨 좋은 노인으로만 보이는 진규다. 그러나 허허 웃으면서 던지는 말에는 조조에 대한 강렬한 복수심이 들어차 있었다.
가후는 진규를 극진히 대접해서 돌려보냈다. 그에게는 만나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는 밤이 이슥해진 후에야 찾아왔다.
“진모가 가 선생을 뵙습니다.”
“기다렸습니다, 진 대인.”
이번 사람도 진규와 같은 진씨였다.
그는 당당한 풍채의 중년 사내였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적당히 위엄 있어 보일 정도로 체중이 있었다. 각진 얼굴과 굳게 다문 입술에서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이렇게 찾아오신 걸 보면, 뭔가 성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장 진류가 우리의 편에 서기로 했습니다.”
사내가 말하는 인물은 진류태수 장막. 조조와 원소의 오랜 친구이며, 거병 초기부터 조조군을 후원한 인물이기도 하다.
“장 진류는 원본초와 특히 사이가 나쁘고, 조맹덕과 가까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편에 서기로 했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조맹덕이 잔혹한 일을 벌인 것이 한두 해가 아닙니다. 예전 연주에 메뚜기떼가 창궐했을 때는 유 사군과 싸운다고 가혹하게 징발했고, 흉년이 들었을 때도 원본초와 싸운다고 심하게 수탈했지요. 그 수탈을 견디다 못해 사족 집안에서 딸을 파는 일까지 있었을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백성들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후는 눈앞에 있는 사내, 진궁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공대(공대는 진궁의 자)는 조조에 대한 반감이 심한 자다. 일단은 믿을 수 있다.’
진궁은 연주 호족 출신으로 본래 조조를 따르던 모사다. 그러나 조조의 잔혹한 행동에 불만을 품고 조조를 배신하고자 했다.
원래의 역사에서는 조조가 연주를 잠시 비운 사이, 진궁이 여포를 끌어들여 연주를 탈취하게 만들며 반란을 일으킨다.
그런데 마초가 개입하며 역사가 틀어졌다. 여포는 연주에 오지 않았고, 반란의 중심이 되어줄 만한 인물이 없으니 연주의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연주 호족들은 불만이 가득 쌓인 채로 조조 휘하에 계속 있었던 것이다.
황하 전쟁이 끝나자 진궁은 병을 핑계로 조조군을 사직했다. 그리고 연주 동군에 있는 자택에 머무르며 하릴없이 세월을 보내는 척 위장하고 있었다. 동군은 이곳 진국에서 멀지 않으니, 굳이 진규처럼 위장하지 않아도 몰래 다녀갈 수 있었다. 그러면서 뒤로는 연주 호족들을 마가군 쪽으로 포섭하고 있었다.
“장 진류 또한 거느린 군사들이 수천에 달하는 인물이지요. 훗날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가후는 그렇게 말하며 향기로운 남중의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서주에는 낭야의 장패, 연주에는 진류의 장막인가.’
마가군에 합류하자마자 가후가 한 일은 특기인 모략이었다. 조조군 내부의 적을 만들기 위해 서주와 연주에서 배신시킬 만한 인물들을 찾았다. 그 과정에서 공작원으로 활용할 만한 인물들은 마초와 나관중이 점찍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마초와 나관중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물들의 성향을 정확히 진단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진규와 진궁에게 접촉하자 어렵지 않게 일이 풀렸다. 서주의 장패와 연주의 장막이 마가군의 편에 서기로 한 것이다.
“승상으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세를 자랑하지만, 사실 조조의 실체는 연주 군벌. 연주에서 내부의 적이 일어나고, 서주에서 후방을 교란한다면 어찌 이기지 못하겠는가.”
진궁이 돌아간 후, 가후는 허공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어둠 속에 숨어서 모략을 쓰는 것은 그의 특기다. 동탁과 이각의 휘하에서 이 특기로 수많은 충신과 지사들을 제거했던 바 있다.
“그리고 이번에는, 충신이 아니라 역적을 제거하게 되겠군.”
가후는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