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형주의 인재들
“…이는 형주와 관서가 같이 사는 길이니, 유 대인께서도 잘 생각하십시오.”
양양성, 형주목의 치소.
형주목 유표는 그를 찾아온 손님과 독대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다시 찾아온 마초였다.
유표는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마가군과의 동맹이라. 이 늙은이에게는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군요. 굳이 형주까지 직접 오신 진짜 목적이 이거였습니까?”
“하하, 두 집안의 동맹을 위한 목적이 절반쯤 됩니다.”
“하면 나머지 절반은 무엇입니까?”
“나머지 절반은…….”
마초는 유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결국 두 누이동생의 혼담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이 목적은 절반만 달성했지요. 다행히 큰 녀석은 왕중선(중선은 왕찬의 자)과 혼례를 치르기로 하고 날을 잡았지만, 작은 녀석은 장공염(공염은 장완의 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떼를 쓰지 뭡니까.”
큰 누이동생 마수가 선택한 사내는, 추한 외모로 유명한 명문장가 왕찬이었다. 마수는 왕찬의 재능에 푹 빠졌는지 그의 앞에 서면 얼굴을 붉히고 말을 더듬을 정도였다.
반면 자타공인 요조숙녀로 불리던 작은 누이동생 마화는 상당히 까다로웠다. 적절한 인품과 적절한 능력을 겸비한 장완에게 사정없이 퇴짜를 놓았다. 그 외에도 몇 명을 추천해 봤지만 마화는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조금 더…….”
“조금 더?”
“잘생긴 사람은 없나요?”
결국 마초가 추천하는 적절한 신랑감들은 마화의 확고한 결혼관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제갈량 같은 미남이라면 마화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제갈량에게는 이미 정혼자가 있었다. 마초는 마화의 혼례를 포기하고 낙양에서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했다.
유표는 마초의 이야기를 듣자 껄껄 웃었다.
“허허허, 영매께서 마 태부를 닮아 심지가 굳은가 봅니다.”
그렇게 한참을 웃으며 한담을 나누던 유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눈빛이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대장군. 내 나이 올해 육십입니다. 반면 대장군은…….”
“올해 스물아홉이 됩니다.”
“그러니 시간은 대장군의 편이지요. 지금은 나도 형주 땅의 험한 지세에 의지하여 대장군에게 대적할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대장군은 천하의 어떤 군웅보다도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겠지요.”
마초는 유표의 말을 듣고 씩 웃었다.
“글쎄요. 그렇게 좋은 때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먼저 움직여서 원하는 것을 얻어낼 것입니다.”
“젊은이다운 패기로군요. 하지만 대장군, 늙은이는 꾀가 많습니다.”
유표는 예의 그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마초를 바라봤다.
“십 년쯤 지나면 나는 죽거나, 또는 거동이 불편해져 병상에 눕게 되겠지요. 그렇게 형주를 지킬 인물이 없어지면 내 자식들은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들 테니, 나도 지금부터 후사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이 마모도 그 말씀을 드리려 했습니다. 마가군과 동맹하십시오. 다른 약속은 못 하겠지만, 유 대인께서 돌아가신 후 자제분들의 미래는 내가 확실히 책임지겠습니다.”
유표는 가만히 마초를 바라보다 씩 웃었다.
“그런데, 내게 만약 형주를 지켜낼 방법이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하하하, 유 대인.”
마초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여유 있는 얼굴이었다.
“유 예주는 유 대인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남의 밑에 있을 위인이 아닙니다. 만약 그를 끌어들였다 유 대인이 돌아가시면, 형주는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유표의 말은 여남에 주둔하는 예주자사 유비를 끌어들여 형주를 지키는 칼로 삼고, 아들의 후견인으로 세운다는 것이었다.
유비는 수많은 군사적 업적을 가진 명장이다. 또한 인덕이 있어 따르는 이들이 많다. 겉으로 보면 실로 적임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표도, 마초도 알고 있었다.
‘유비를 끌어들였다가는 유비가 형주를 먹어 치울 것이다.’
마초는 지난 생의 경험으로 당연히 알고 있었다. 유표도 맨몸으로 군웅이 된 만큼 사리 분별이 빠른 인물이었다.
허세가 통하지 않자 유표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허허허, 대장군은 못 속이겠군요. 좋습니다. 마가군 편에 서지요. 그래야 내 아들들이 살아남을 것 같으니 말입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유 대인.”
“단, 이 늙은이에게도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이제 황조도 죽었고, 장사를 합병할 길도 묘연해졌습니다. 우리 형주는 더 이상 외정(外征)을 하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대장군, 형주의 전쟁 위협도 제거해 주십시오.”
“전쟁 위협이라면?”
“익주나 예주 방면에서의 침공이 없도록 힘써 달라는 말입니다.”
마초는 유표의 말을 듣자 빙그레 웃었다.
“익주자사 유범과 예주자사 유비는 전부 유 대인과 같은 황실의 종친들입니다. 어찌 종친끼리 피를 흘릴까 걱정하십니까?”
“피차 솔직하게 얘기하십시다. 난세에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하지만 익주자사와 예주자사가 대장군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지요. 익주와 예주에 지금의 정권을 세운 게 대장군이니까요. 아니 그렇습니까?”
유표는 그렇게 말하며 마초의 안색을 살폈다. 마초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약조하지요. 익주와 예주에서 형주에 싸움을 거는 일이 없도록 단속하겠습니다.”
이로써 마가군과 형주군의 동맹이 성사되었다.
마가군은 유범이 다스리는 익주, 유비가 다스리는 예주, 유표가 다스리는 형주에서 전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남방에서 마초에게 대항하는 세력은 강동군만 남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형주 방면으로 힘을 쏟지 못하게 된 예주자사 유비가 강동을 노리겠지. 강동군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싸움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이제 남방의 질서는 마초가 원하는 대로 재편되었다.
원래의 역사에서 유표가 죽는 건 앞으로 7년 후. 그때까지는 남방의 정세가 안정되어 있을 것이다.
‘그 안에 조조와 결판을 낼 것이다.’
마초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 * *
유표와의 회담을 끝내고 숙소에 돌아와 있던 마초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황한승이 아닌가? 어서 오시오.”
황충은 덤덤한 태도로 손을 모아 인사했다. 시원하게 박박 민 머리는 여전했다.
“황충이 대장군을 뵙습니다.”
다행히 황충은 병장기가 아니라 술병을 들고 있었다. 마초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황충을 후원으로 안내했다.
두 사람은 나무 그늘 밑에 탁자를 놓고 마주 앉았다. 태양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그늘에 들어오니 선선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사람을 질리게 하는 형주의 여름 무더위도 한풀 꺾이고, 가을로 접어드는 201년의 어느 날이었다.
“황한승이 혹시 병장기를 가져오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소.”
마초가 농담을 던지자 황충이 씩 웃었다.
“대장군께서는 결국 장사 사람들도 살리고, 우리 군사들도 살렸습니다. 소장이 왜 그리하겠습니까?”
두 사람은 황충이 가져온 황주를 따뜻하게 데워서 나눠 마셨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마초는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그대의 재주라면 형주군의 상장으로 그 이름이 천하를 진동시켰을 것이오. 굳이 무명의 군관으로 만족하고 있는 이유가 있소?”
“소장은 전쟁이 싫습니다. 그저 무공을 좋아할 뿐이지요. 지금도 좋아하는 무공을 마음껏 닦을 수 있고, 적지 않은 봉록으로 가족들을 건사할 수 있는데 어째서 명성을 탐하겠습니까.”
군사 이론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는 말을 남겼다. 동양의 손자병법에도 비슷한 내용이 여러 번 기술되어 있다.
황충은 정치가 싫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대의나 명분을 적당히 갖다 붙여서 평범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난세의 정치는 더욱 싫었다. 그런 정치의 수단으로 쓰이는 전쟁도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그대가 지닌 무공은 전쟁터에서 쓸모가 많지. 주변에서 그대를 가만히 두지 않았겠군.”
“맞습니다. 군관 생활을 계속하려면 어쨌든 전쟁에도 나서야 했으니까요.”
딱히 유표에게 충성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세상을 바꾼다거나, 바로잡는다거나 하는 거창한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황충에게 전쟁은 그저 생활이었다.
“우리 마가군에도 전쟁을 그저 일로 받아들이는 무장이 한 명 있소. 매번 봉록 올려달라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녀석이지.”
“누굽니까?”
“장문원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탕구장군이 되어 병주에 나가 있소이다.”
마초는 장료의 이야기를 하며 피식 웃었다. 장료와 황충이 전쟁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한 데가 있었다.
‘그저 일이었나. 그것도 괜찮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때가 됐다. 마초와 황충은 서로 마주 봤다.
“그러나 이 난세에 그만한 힘을 가지고 혼자서만 즐겁게 사는 것도 썩 좋은 길은 아닐 것이오. 황한승이 나를 찾아온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소.”
“대장군께 궁금한 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말씀하시오.”
“대장군은 난세를 끝낼 수 있습니까?”
“물론. 앞으로 십 년 안에 천하를 평정하고 굵직한 전쟁은 모두 끝낼 것이오. 내가 지난날 관중을 재건했듯이, 그때가 되면 천하를 재건할 것이오.”
황충은 흔들림 없는 마초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길에 소장이 쓰임새가 있습니까?”
“물론. 그대는 마가군의 선봉장이 될 것이오.”
방덕, 서황, 장료는 이제 독립된 일군을 이끌고 있다. 앞으로의 싸움에서 선두에 서서 적진을 뚫는 선봉장 역할로는 감녕과 황충을 활용하려는 게 마초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황충은 아직도 궁금한 게 남아 있었다.
“십 년 후, 큰 전쟁이 전부 끝나면 낙향해도 되겠습니까?”
“으하하하! 부귀영화는 그때부터 시작인데, 하여튼 그대도 대단하군. 마음대로 하시오. 공신이 알아서 먼저 낙향한다고 하면 다들 좋아할 거요.”
“그렇다면…….”
황충은 매무새를 고치고 마초에게 군례를 올렸다.
“황충이 주공을 뵙습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주공의 대업에 동참하겠습니다.”
“황한승, 그대가 대업에 동참하기로 했으니 참으로 기쁜 일이오. 나 또한 더욱 절차탁마하여 난세를 끝낼 것을 약속하오.”
마초와 황충은 결의하는 의미로 다시 한 잔의 술을 나눴다.
“이번에 형주에서 새롭게 마가군에 합류한 인물들이 한두 명이 아니오. 우리와 뜻을 같이할 사람들이 내실에 모여 있소.”
마초는 황충을 데리고 내실로 들어왔다.
낙양으로 일찍 돌아간 가후를 제외하고 모두가 모여 있었다. 이번 형주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수행한 서서가 모임을 주재하고 있었다.
왼쪽으로는 나관중, 감녕, 마대를 비롯한 기존 인사들이 앉아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이번 형주행에서 새롭게 얻은 인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마초는 먼저 오른쪽 맨 끝에 있는 소년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장완, 자는 공염. 올해 열아홉입니다.”
“유파, 자는 자초. 올해 열여섯입니다.”
서글서글한 태도의 장완, 신경질적인 인상의 유파. 둘 다 남형주에서 데려온 소년들이었다.
이 두 사람은 원래의 역사에서 관료로 많은 업적을 쌓았다. 앞으로 수년 안으로 마가군의 동량이 될 것이다. 마초는 장완과 유파를 격려한 후 또 한 명의 소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량, 자는 계상입니다. 올해 열다섯이 됩니다.”
양양 명문가의 넷째 아들, 마량이었다. 기품 있는 외모에 의젓한 태도를 하고 있었다.
마량의 별명인 백미(白眉)는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그 별명답게 흰 눈썹이 유독 눈에 띄었다.
장완, 유파, 마량에 이어 왕찬이 인사를 올렸다. 마수와 혼례를 치르며 마초의 매제가 된 인물이었다. 문장에 뛰어난 명사 왕찬이 인척이 된 것은 마가군에 무형의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명, 장사 전투가 끝나고 마가군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사람이 있었다.
“이 곽준, 성심을 다하여 대장군을 모시겠습니다.”
곽씨 형제의 아우 곽준이었다. 곽독은 장사에 남아 묵가 제자들을 통솔하고, 곽준은 따르는 무리 몇몇을 이끌고 마가군에 합류하기로 했다. 원래의 역사에서 뛰어난 수문장이었던 그는 군사적으로 마가군에 기여할 것이다.
무장으로 황충과 곽준, 문사로 왕찬, 그리고 미래의 중신이 될 장완, 유파, 마량까지.
이번 원정에서 얻은 인물들은 면면이 묵직했다. 그러나 진짜 묵직한 인물들은 따로 있었다. 마초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비대한 몸집의 청년을 바라봤다.
“수경장 최고의 기재를 이렇게 모시게 되었군. 수경장에서 그대를 가리켜 어린 봉황이라고 한다지.”
방통, 자는 사원.
제갈량의 맞수이자, 촉한 최고의 모사로 불리는 인물이 마가군에 합류했다. 젊은 인재를 찾고 있던 가후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고,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하던 법정에게는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것이다.
마초는 마지막으로 또 한 명의 젊은 청년에게 시선을 향했다. 청년은 마른 체구에 무기력한 인상, 정맥이 비쳐 보일 만큼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사실 이번 형주 원정의 계획에는 없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일이 묘하게 흘러가며 장강 하류에 있는 그를 데려올 수 있게 되었다.
“육손, 자는 백언입니다. 몸은 약하지만, 병법을 조금 익혔습니다. 앞으로 군무를 맡겨 주시면 미관말직이라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삼국지> 후반부 최고의 사령관, 육손.
뒤바뀐 역사에서는 대장군부의 종사, 즉 마초의 참모로 관직을 시작하게 되었다.
형주에 와서 얻은 인물들은 면면이 화려했다. 마초는 이들과 일일이 술잔을 나누며 격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