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230화 (295/306)

230화. 와룡봉추

수경장.

양양 외곽에 있는 이 저택의 주인, 수경선생 사마휘는 자신을 찾아온 옛 제자와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관서 마가군에서 우리 수경장을 탈탈 털어 가는구나. 그렇지 않느냐, 원직?”

웃는 낯으로 엄살을 부리는 스승을 보며, 제자 서서도 이내 너털웃음을 지었다.

“마 태부께서는 선비를 잘 대접하시고, 대장군께서는 인물평에 능하십니다. 이 인물이다 싶으면 마음껏 일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시지요. 동문들도 하나같이 만족할 것입니다.”

형주 일대의 젊고 유망한 선비들이 모여서 공부하던 수경장이다. 이제 대부분의 인물들이 출사할 곳을 정했는데 전부 마가군이었다.

“최주평은 일찌감치 태학에서 공부하고 있고, 석광원과 맹공위도 이번에 너의 소개로 관서대도독부로 출사하게 되었지. 학문이 가장 높았던 너는 진작부터 대장군부에서 종사로 있었고 말이다.”

뿐만이 아니다. 손님으로 잠시 머물렀던 순유와 가후도 결국 마가군을 택했다.

서서는 고개를 저었다.

“스승님께서 저를 높이 봐주시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저 글줄을 잘 외웠을 뿐, 재주는 여기 있는 방사원에 비할 바가 못 되는 걸 알고 있습니다.”

방통, 자는 사원.

아직 20대 초반이지만, 벌써 400근(약 104kg)을 넉넉히 넘기는 후덕한 풍채의 사내였다. 방통은 서서를 향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원직 형은 대장군에게 아주 푹 빠졌나 봅니다. 그가 싸움을 잘하고 지략도 뛰어난 건 알겠는데, 정말 우리가 찾던 인물이 맞습니까?”

“사원 아우. 대장군은 진정 영웅일세. 탁류파처럼 사심이 있는 것도 아니오, 청류파처럼 고루한 논리에 얽매여 있는 것도 아니지. 난세를 끝낼 인물을 찾는다면 그만한 인물이 없을 걸세.”

“으흠. 그건 여남의 유 예주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기왕이면 약한 쪽에서 천하를 노리는 게 더 재미있겠는데.”

“유 예주의 세력은 마가군의 십 분의 일에 불과하네. 현실적으로 그가 난세를 끝낼 수 있겠는가. 공연히 아우의 힘만 낭비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네.”

오늘 서서가 온 목적은 방통에게 임관을 권유하는 것이었다.

방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살에 파묻혀 있어서 잘 구분되지 않던 목과 턱 사이에 굵은 주름이 졌다.

“안타깝군요. 유 예주가 대장군과 비슷한 연배만 됐어도 내가 그를 제왕으로 만들어 봤을 텐데. 이제는 좀 늦었지요.”

방통은 못내 떨치기 힘든 유비에 대한 미련을 정리하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좋습니다. 출사하지요. 단, 조건이 있습니다.”

“자네의 말이라면 대장군께서도 어지간한 것은 다 수용할 걸세. 조건이 무엇인가?”

“대장군부, 그러니까 마 대장군의 직속으로 가겠습니다. 관서대도독부나 조정, 태학이 아니고요.”

“그 말은…….”

“모략을 맡아 보겠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방통은 기대된다는 듯 씩 웃었다. 서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원 아우는 항상 위험한 곳을 원했지.’

방통은 삶에 큰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과감했다. 너무 창의적인 두뇌를 주체하지 못한 탓인지, 무모하고 충동적으로 행동할 때가 잦았다. 지금의 비대한 몸집도 그런 절제 없는 생활의 산물인 것이다.

“대장군부에서 모략을 담당하는 총책임자는 가후 선생일세. 자네가 합류한다면 틀림없이 크게 환영해 주실 걸세.”

서서는 방통이 앞으로 일할 대장군부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했지만 방통은 제대로 듣지 않았다. 먼 산을 보며 딴청을 피우던 그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공명은 어떻게 한답니까?”

“공명은 장사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왔네. 대장군과 따로 만나서 출사하기로 약속을 했으니, 약속을 지키겠다는군.”

“으흠. 그 녀석 성질에 조정에서 말단으로 시작하는 건 안 맞을 테고, 관서대도독부에서 행정 쪽으로 시작하겠지요? 그게 특기니까.”

“하하, 사원 아우는 공명의 이야기가 나오면 유독 집중력이 높아지는군.”

서서는 방통을 놀리는 것처럼 씩 웃었다. 방통은 민망한지 인상을 찌푸렸으나 얼굴에 살이 하도 많아서 안면 근육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따, 딱히 공명이 신경 쓰여서 그러는 건…….”

“공명에게도 나름의 생각이 있더군. 한 번 지켜보세.”

* * *

땅. 땅. 땅.

양양성의 한 대장간.

제갈량은 벽에 기대서 망치질 소리를 듣고 있었다. 망치질을 하는 사람은 큰 키의 대장장이였다.

“오래 기다렸어요, 가가.”

작업을 끝낸 대장장이가 머리에 동여맨 두건을 풀었다. 두건에 싸여 있던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이제 대장간 일도 제법 틀이 잡혔군.”

제갈량은 대장장이를 보며 말했다. 대장장이는 제갈량을 향해 대답했다.

“거짓말.”

“진심이오.”

“가가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티가 나요.”

대장장이는 여인이었다. 8척인 제갈량과 키가 비슷했으니 고대의 여성으로는 대단한 장신이었다. 허리에는 군살이 없지만, 근육으로 인해 팔다리에는 굴곡이 있었다. 아름다움보다는 힘이 느껴지는 단단한 체격이었다.

“예전에는 망치를 쥐는 것도 힘들어했지.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쇠를 다루는 일까지 하고 있지 않소? 월영, 그대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짐작할 수 있소.”

여인의 이름은 황월영. 양양의 대호족 황승언의 막내딸이자, 이 시대의 귀족 여성들이 좀처럼 가까이하지 않는 기술자들의 일에 빠져 있는, 집안의 골칫거리였다.

“하하하. 사내들만큼 힘이 좋으니 조금만 배우면 나도 할 수 있을 줄 알았지요. 그런데 직접 해 보니 힘만 좋다고 되는 일이 아니네요.”

황월영은 그렇게 말하며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은 대장간 밖의 안 쓰는 풀무 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가가가 죽을 줄 알았어요.”

황월영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제갈량은 피식 웃었다.

“실제로 죽을 뻔했소.”

“어떻게 살아났나요?”

“전쟁이 불과 사흘 만에 끝났소. 마 대장군이 뒤에서 힘을 썼다고 하더군. 덕분에 내가 원하던 전쟁터의 모습을 실컷 볼 수 있었소.”

“으흠.”

황월영은 고개를 기울여 제갈량을 봤다.

8척의 키에 단단한 체격, 사나운 눈매, 야외 노동으로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 고대의 기준으로 미인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외모다. 그러나 황월영은 남들의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한 점의 거리낌도 없이 활짝 웃었다.

“그만큼 했으면 이제 전쟁터를 직접 보고 진정한 군사가 되겠다느니 하는 소리는 그만둬요. 방사원도 가가처럼 무모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럴 생각이오. 다행히 장사는 독립을 유지하기로 했소.”

“그건 나도 들었어요. 양양의 묵가 제자들이 장사로 이주한다더군요. 여자한테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게 묵가 사람들밖에 없었는데, 나는 이제 뭘 해야 하지? 시집이나 가야 하나?”

황월영은 슬쩍 제갈량을 훔쳐봤다. 양양에서 제일 잘생긴 청년은 모르는 척 앞만 보고 있었다. 황월영은 피식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나야 뭐 적당히 호족의 딸로 살아가면 그만이고. 이제 가가도 선택해야 할 때가 오겠군요.”

“그렇소. 내년에 출사할 생각이오.”

“마가군인가요?”

“글쎄.”

제갈량은 명확하게 답하지 않았다. 황월영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설마 유 예주에게 갈 생각이에요?”

“그건 아니오.”

“그러면?”

놀라는 황월영을 보며 제갈량이 설명했다.

“얼마 전 원직 형을 만났소. 조정에서 시험 삼아 과거(科擧)라는 제도를 도입한다는군.”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 시험은 수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어, 이후 동아시아 관료 사회의 근간이 된다. 지금 시대에는 추천제도인 향거리선제를 통해 관리를 선발했고, 시험은 지방의 하급 관리를 뽑을 때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는 정도였다.

이는 과거제가 보편화된 시대를 살았던 나관중의 발상이었다. 과거 급제자를 선발하는 것은 마가군이 쥐고 있는 태학이니, 과거로 뽑힌 관리들은 자연스럽게 친 마가군 성향을 띠게 될 것이고, 추천제를 통해 관직에 든 호족 출신들을 견제하게 될 것이다.

‘과거제로 돌아가는 나라를 수십 년 만에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관리 중의 일부라도 과거로 뽑기 시작하면 훗날 틀림없이 좋은 쪽으로 작용할 것이다. 지금의 추천제와 서로 보완하며 발전해 나가지 않겠는가?’

그것이 나관중의 생각이었다.

제갈량은 황월영을 보며 말했다.

“경전과 역사를 토대로 정책을 논하는 시험이오. 태학생, 그리고 태학생이 추천한 선비들을 대상으로 내년에 시행된다고 하오. 나는 최주평에게 추천을 받아 시험에 응시할 것이오.”

“으음… 가가는 경전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잖아요? 항상 공방을 찾아다니거나 밭에서 농사일만 했으면서, 태학생들과 시험으로 겨루겠다고요?”

“아직 일 년쯤 시간이 있소. 경전은 그사이에 통달하면 될 일이오.”

제갈량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의 두뇌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아는 황월영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이라면 가능하겠지.’

“장사의 싸움이 끝나면 출사하기로 대장군과 약속을 했소. 그런데 이대로 시골 서생인 채로 출사하면, 대장군에게 나는 그저 부하 중의 하나일 뿐이오.”

“그래서요?”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여 명성을 먼저 얻을 것이오. 그다음에 출사해야 내가 원하는 만큼 무겁게 쓰일 테니.”

“하하하하.”

황월영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 항상 자신 곁에 있었던 사람이 세상을 향해 부리는 패기가 뭔가 통쾌했다.

‘그래, 이 사내는 이토록 큰 인물이다. 그래서 나는… 이 사내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구나.’

제갈량에게 필요한 것.

그것은 귀족 사회에 끼어들 수 있는 연줄이었다. 제갈씨 가문이 몰락한 지 오래라 제갈량은 생계를 위해 직접 농사를 지을 정도였다. 그러자면 양양의 명문가와 혼인으로 이어지는 게 가장 편하다. 명문가의 여식이면서, 팔척장신에, 대장간 일에만 빠져 있어서 아무도 데려가려 하지 않는, 황월영이 적임자였다.

그런데 상황이 변했다. 제갈량은 대장군 마초에게 직접 영입 제안을 받았다. 그조차도 마음에 차지 않아 스스로 과거를 봐서 장원급제자로 시작하겠다고 하니, 이제 형주 호족과의 혼맥은 큰 의미가 없었다.

“가가는 꼭 장원급제해서 관중과 악의 못지않은 인물이 될 거예요. 나도 양양에서 응원할 테니…….”

“같이 갑시다.”

제갈량이 말을 끊었다. 황월영은 사나운 눈매를 동그랗게 뜨고 제갈량을 마주 봤다.

“뭐라고요?”

“나와 혼례를 치르고, 같이 낙양으로 갑시다.”

“가가. 한순간의 기분에 휩쓸리지 말아요. 태학생들 사이에서 장원급제한다면 여기저기서 사위로 삼으려 할 거예요. 관중과 악의처럼 될 생각이라면, 조정의 명문가나 지방의 실력자를 선택하는 게 맞아요.”

“조정 명문가의 여식과 혼인하면 하늘의 때를 얻을 것이고, 지방 실력자의 여식과 혼인하면 땅의 이로움을 얻을 수 있겠지. 그러나 하늘의 때는 땅의 이로움만 못하고(天時不如地利), 땅의 이로움은 사람의 화목함만 못하다(地利不如人和) 하였소. 나는 천시나 지리에 기대지 않고 사람의 힘으로 대업을 이룰 것이니, 마땅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아가야 할 것이오.”

“어… 음…….”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까.

황월영은 한참 동안 우물거린 후 대답했다.

“그런다고 내가 덥석 받아들일 줄 알았어요? 며칠 생각해 볼 테니 그리 알아요.”

뚝. 뚝.

말과는 달리 황월영의 눈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까무잡잡하던 얼굴은 피가 몰려서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열이 나는지 목덜미에서는 땀이 흘렀다. 제갈량은 잔잔히 웃으며 깃털 부채를 들어 정혼자를 향해 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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