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229화 (294/306)

229화. 두 명의 오후(吳侯)

형주 강하군.

유표군, 장선군, 강동군 간의 회담은 싱겁게 끝났다.

“대장군의 명을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유표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양양에서 급파된 사자, 한숭은 마초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한숭은 좋게 말하면 정세 판단이 뛰어나고, 나쁘게 말하면 지조가 없는 인물이었다. 형주조차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고령의 유표, 북중국을 조조와 양분하고 있는 젊은 마초 중 누가 강한지 잽싸게 파악하고 마초 쪽에 줄을 섰다.

“한덕고(덕고는 한숭의 자)는 참으로 말이 통하는 인물이군! 핫하하!”

마초는 크게 웃으며 한숭을 치하했다. 한숭이 고집을 부리지 않으면서 회담은 깔끔하게 끝났다. 강동군 입장에서는 황조를 죽여 선대의 원수를 갚으면서 장사에도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고, 장선군 입장에서는 강동과 교주를 뒷배로 둔 채 독립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유표군은 빼앗긴 강하를 돌려받았고, 황조군의 1만 군사를 별다른 피해 없이 형주자사부의 직할군으로 흡수하게 되었으니 어느 정도의 실리는 남게 되었다.

“대장군. 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회담이 끝난 후, 장선군을 대표해 회담에 참석한 장역이 깊게 머리를 숙였다. 장선은 벌써 병이 깊어서 거동이 불편할 정도였다. 이제 곧 장역이 장사태수직을 승계할 것이다.

“흰소리하지 말고 통치나 똑바로 하라고. 앞으로 6, 7년 정도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내실을 다지게. 특히 묵가를 전파하겠다며 유 형주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절대 하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녀석이 짜증 나게 해도 참수는 하지 말게.”

마초는 웃으며 옆에 있는 예형의 어깨를 툭 쳤다. 예형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소생은 그저 거짓을 꾸며내지 못하여 바른 소리를 할 뿐입니다. 장 공자가 바른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어찌 소생의 목을 취하려 하겠습니까?”

“잘났다. 이런 물건을 맡게 되었으니 장 공자도 이제 고생길이 훤하군.”

예형은 장사까지 따라와서 묵가 제자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묵가 제자들은 유학자들처럼 언변이 화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질박한 말로 차별 없는 사랑을 논하며, 매일 중노동을 하고, 신념을 위해 초개같이 목숨을 던졌다.

그런 모습이 비뚤어진 천재 유학자의 마음에 뭔가 변화를 일으킨 것일까. 예형은 그때부터 며칠 밤을 새며 <묵자>를 탐독했다. 이제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도 없는 서적이었지만 장선이 보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묵가에 대해 자기 나름 대로의 이해가 끝났을 때, 예형은 장사군 종사로 출사했다.

“썩어빠진 유학으로 썩어빠진 세상에서 행세하는 자들처럼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묵적의 도에 몸을 더럽힐지언정, 더러운 자들에게 아부하며 벼슬살이를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 그래. 잘 생각했네.”

예형은 그렇게 스스로를 유배하는 것처럼 말하며 장사에 남는 걸 택했다. 장역과 묵가 제자들은 두 손을 들어 그런 예형을 환영했다. 혹시 유표가 앞으로 다시 사상 탄압을 시도한다면, 그때는 이름난 유학자 예형이 방패가 되어 줄 것이다.

‘낙양이나 양양에서는 아무도 예형을 필요로 하지 않지. 그러나 장사 사람들은 진심으로 예형을 필요로 한다. 이 녀석은 아마 그런 점에 마음이 흔들린 것 아닐까.’

어쨌든 조조가 보낸 골칫덩이 예형은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마초는 그의 앞날을 응원하기로 했다.

* * *

양주 오군.

장강의 하류, 오늘날의 상하이가 지척에 있는 곳이다. 대장군 마초의 특사로 강동 땅에 온 나관중은 장강을 따라 내려와 끝내 이곳에 이르렀다.

오군은 강동군의 본거지가 있는 곳이다. 강동군 수장 손익은 강하를 공략해서 황조의 목을 들고 오군으로 개선했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온 나관중을 위해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궁벽한 시골이라 비서랑 어르신께 대접할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양해하십시오.”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손익은 겸양을 표했지만, 나관중은 내심 상차림에 놀라고 있었다.

‘얼마 만에 보는 해산물인가?’

나관중이 살던 원나라 때는 내륙까지 가도가 촘촘하게 이어져서 해산물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로부터 1100년 전이고, 지역마다 지배자가 다른 난세이니 내륙에 있는 마가군에서는 해산물을 보기 어려웠다. 바닷가 근처에 위치한 오군까지 와서야 비로소 해산물을 맛보게 된 것이다.

우적. 우적.

큼지막한 전복을 통째로 입에 넣고 씹는 나관중을 보며, 손익은 미소를 띠고 물었다.

“대장군께서 가장 신뢰하는 인물이 비서랑 어르신이라 들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모실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나관중은 그런 손익을 유심히 관찰했다.

‘올해 열여덟, 아니 열아홉인가? 나이는 어리지만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손익은 죽은 형 손책을 꼭 빼닮았다. 건장한 체격에 잘생긴 외모, 맹수를 연상시키는 노란 눈동자, 나이를 잊게 하는 뛰어난 군재와 무모할 정도의 대담성까지.

원래의 역사에서 손익은 큰 활약을 하지 못하고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그러나 강동군의 수장 자리까지 이어받게 된 지금은 역사가 어떻게 흘러갈지 속단할 수 없다. 나관중은 앞으로를 대비해 신중하게 손익의 사람됨을 관찰했다.

“이곳 오군은 선대부터 손가의 근거지가 된 곳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대장군께서는 천자께 상표하여 손 장군을 이곳의 제후로 봉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오후(吳侯).

오군 오현을 다스리는 후작이라는 뜻이다. 원래대로라면 손책이 198년에 받게 되는 작위다. 그러나 역사가 뒤바뀌며 손책은 오후의 작위를 받기도 전에 회남으로 근거지를 옮겼고, 허도 기습을 시도하다 실패해서 죽었다.

이름난 군웅들이나 가지고 있는 현후 작위를 손익도 가지게 되었다. 손익은 짐짓 놀란 척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현후라. 일단은 그 정도로 만족해야겠군.’

오후의 작위는 18세의 손익에게 위엄을 더해 줄 것이다. 그러나 욕심대로 강동을 확실하게 통치하려면 적어도 유표와 동급의 양주목 정도의 작위가 필요했다. 손책의 계승자라면 마ᄄᆞᆼ히 그 정도의 위치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강동에는 아직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미개척지, 통제되지 않는 호족들, 한인들과 대립하는 이민족들이 많았다. 손익에게는 강동을 먼저 안정시키는 일이 급선무였다.

연회가 파한 후, 나관중은 며칠간 여러 사람을 만났다. 강동의 명사들이나 강동군의 중신들이었는데, 대부분은 진짜 목적을 감추려는 눈속임의 목적이 강했다.

‘생각보다 데려갈 사람이 없군.’

강동군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손책의 대에 이미 출사해 있었다. 배신할 만한 인물은 찾기 어려웠다. 굵직한 인물들이 있기는 했지만, 제각각의 사정으로 마가군으로 끌어들이자니 여의치 않았다.

“주연은 공신의 아들이고, 주환은 대호족의 아들이니 강동을 떠날 리 없지. 제갈근에게는 일언지하에 거절당했고, 장흠과 진무는 일전에 장문원의 손에 죽었고, 능통은 아버지가 마가군과의 싸움에서 죽었으니 원수가 됐고, 그리고…….”

정말로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그러다 겨우 한 명 건진 게 서주 출신의 유학자 엄준이었다.

“만재(엄준의 자) 선생이 같이 가 주신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엄모는 마 태부께서 태학을 다시 세우신 것을 항상 경모해 왔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태학에서 학문 연구에 매진할까 합니다.”

원래의 역사에서 엄준은 강동에서 그럭저럭한 벼슬을 하면서 살았다. 훗날 촉한에 사신으로 갔을 때 제갈량과 깊이 교류했다는 사실이나, 그가 죽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남긴 평을 보면 나름대로 학식이 높고 인품도 훌륭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유학자들과 그리 가깝지 않은 손익 입장에서는 없어져도 무방한 인물이기도 했다. ‘손익은 내가 누구를 만나는지 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무장이나 전문 관료를 빼 가면 민감하게 반응하겠지. 하지만 데려가도 괜찮은 사람들이 있다. 엄준 같은 유학자, 그리고…….’

손가와 사이가 나쁜 호족 집안의 10대 소년.

나관중은 오군을 떠나기 전 마지막 날, 목표로 했던 소년들을 불러들였다. 체격이 작은 소년과 큰 소년이었다. 먼저 작은 소년이 입을 열었다.

“육적, 자는 공기입니다. 비서랑 어르신을 뵙습니다.”

올해 열네 살의 육적은 어린 나이에도 제법 기골이 있어 보였다. 나관중은 웃으며 답례한 뒤 옆의 큰 소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육손, 자는 백언입니다. 육공기의 당조카가 됩니다.”

올해 나이는 열아홉. 그런데 유독 하얀 얼굴과 파리한 안색이 나이보다 더 어려 보이게 했다. 힘없이 처진 눈매와 깡마른 체구를 봐도 남자보다는 소년에 가까워 보였다.

나관중은 육손을 바라보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소년만 데려가면… 강동군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는다.’

강동을, 오나라를 몇 번이고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 낸, 삼국지 후반부 최고의 영웅. 그러나 지금은 무명의 소년에 불과한 육손이다.

원래의 역사를 기준으로 하자면, 지금의 마가군에 육손보다 격이 높은 인물은 한 명도 없다. 아직 합류하지 않은 제갈량만이 그보다 윗줄로 거론될 뿐이다.

나관중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두 분 공자들의 이야기는 들었소. 육강 대인께서 돌아가신 이후, 백언 공자가 가주를 대리하고 있다지요?”

육가는 본래 오군에서 손꼽히는 명문가다. 그런데 가주 육강이 여강태수를 지내던 중 싸움에 휘말려 전사하고 나서 가세가 꺾였다. 이후 육가는 오군으로 돌아와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데, 가주를 승계해야 할 육적의 나이가 어려서 육손이 가주를 대신하고 있었다.

‘육손이 나이는 다섯 살 많지만, 항렬로는 육적의 5촌 조카가 된다고 했었지.’

앞으로 1, 2년이 지나면 육손은 관직을 하기 위해 출사하고, 자연스럽게 육적이 가주의 자리를 승계할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문제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여강태수 육강을 죽인 사람이 바로 손책이라는 것이다. 즉, 육손은 이제 곧 원수의 휘하로 출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손은 죽는 날까지 손가에 충성을 다했다. 오나라의 주인이 된 손권이 옹졸하게 그를 의심하여 말로가 비참했을 뿐.’

그만큼 육손의 인품은 훌륭했다. 그러나 그라고 원수의 집안에 출사하며 어찌 괴로움이 없었을 것인가?

육손은 파리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육가의 가솔은 제가 잠시 맡아두고 있을 뿐입니다. 적당한 시기가 되면 관직에 들면서 숙부에게 자리를 넘길 것입니다.”

“백언 조카는 천하의 기재입니다. 백언 조카가 육가를 맡는 것은 육가의 복이지만, 가문을 위해서만 쓰기에는 조카의 재주가 너무 큽니다. 마땅히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야 할 사람입니다.”

얼핏 보기에도 육적과 육손 사이에는 단단한 신뢰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관중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내가 보기에도 공기 공자의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이미 성인 못지않소이다. 가주를 맡으셔도 문제가 없을 듯싶소.”

“신언서판이요?”

“아, 그게 그러니까… 태학에서 인재를 평가하는 기준…이랄까요?”

신체와 언변과 문장과 판단력, 즉 신언서판은 당나라 때부터 쓰인 말이니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낯선 것이다. 나관중은 적당히 둘러대고 넘어갔다.

“어쨌든 두 분의 뜻은 잘 알겠소. 그러나 나는 안타깝소이다. 육가는 선대에서부터 한의 녹을 먹었던 명문가요. 마땅히 중앙 조정에 출사하여 한을 위해 일하는 게 좋지 않겠소?”

“어르신, 그 말씀은…….”

“공기 공자는 나이가 찰 때까지 태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겠소. 백언 공자는 태학에 들어도 좋고, 일찍 관직 생활을 시작하고 싶다면 적당한 자리를 만들겠소. 중앙 조정을 원한다면 의랑으로 천거할 것이고, 지방관을 원한다면 관중의 적당한 현령직을 구해 놓겠소. 무관직을 원한다면 대장군부의 기도위 자리를 드릴 수 있소. 이는 모두 대장군께서 승인하신 것이니 내가 확실히 약속하겠소.”

이제 마가군에도 인재가 풍부하다. 앞으로는 뛰어난 인재라고 해도 기존 인재들 이상의 특혜를 주기 힘들다.

그러나 그럼에도 육손 영입에 관해서는 무제한의 특혜를 제공하기로 이야기가 돼 있었다. 육손의 활약을 잘 아는 나관중이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육손의 활약을 직접 보지 못한 마초는 반신반의했지만, 나관중이 하도 강하게 주장하니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

나관중의 파격적인 제안을 들은 육손과 육적이 눈을 마주쳤다.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는 듯,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육적이 입을 열었다.

“비서랑 어르신께서 저희들을 잘 봐주시는 것은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오군은 조상들이 대대로 지켜 온 땅입니다. 비록 지금 천하가 혼란스럽고, 오군을 다스리는 손 장군의 집안과 껄끄러운 일이 있었으나… 이 육적은 가주로서 이 책임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공기 공자.”

“하지만 백언 조카는 다릅니다. 이 오군에 묻혀서 손가의 벼슬을 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물입니다. 어르신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도 제가 아니라 백언 조카의 재주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섯 살 때 집에 있는 어머니를 위해 연회장의 귤을 챙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효자 육적.

그런 그가 열네 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의젓한 태도로 자신과 조카의 미래를 결정했다.

“조카님, 펼칠 수 없는 재주 때문에 밤마다 달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낙양으로 가십시오. 가서 마음껏 뜻을 펼치십시오. 이 숙부가 비록 재주 없으나 오군의 가솔들만은 어떻게든 건사할 테니, 부디 가문의 일은 돌아보지 마십시오.”

육손은 눈을 감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내 결심이 선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섯 살 아래의 당숙부 육적에게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숙부님. 이 조카는 가서 넓은 세상을 보고 오겠습니다. 군문에 들어, 대장군의 밑에서 천하를 위해 큰 공을 세우겠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목숨이 다하기 전에…….”

육손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깡마른 몸에는 여전히 힘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축 처진 눈매 속의 눈동자는 타는 듯한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후(吳侯)가 되어 이곳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지금은 원수의 집안인 손가가 가지고 있는 오후의 작위.

육손은 마가군에 출사하기로 결심하며, 오후의 작위를 빼앗아 올 것을 선언했다.

현후의 작위는 가지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엄청난 공을 세운, 천하에서 손꼽히는 인물들만이 얻을 수 있는 작위다. 그러나 역사를 알고 있는 나관중은 육손이 후작이 될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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