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장사의 운명
황조가 죽었다.
황조군과 대치하는 묵가 제자들은 어렵지 않게 이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황조군의 지휘체계가 갑자기 마비되고 병사들이 무질서하게 퇴각했기 때문이다.
묵가 제자들을 이끄는 곽독과 곽준은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군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했는가. 참으로 하늘이 내린 사람이구나.”
“지금이 기회입니다. 황조군이 다시는 장사를 넘보지 못하도록 철저히 격멸해야 합니다!”
곽씨 형제는 도망치는 황조군을 추격하기 위해 출진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서는 인물이 있었다.
쿵.
땅을 짚는 것만으로 지축이 흔들릴 만큼 무거운 방패 두 개를 든 무장이었다. 무장 중에서도 짝을 찾기 힘든 근육질에 바싹 깎은 대머리를 하고, 병졸들과 같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싸움은 여기서 끝내기로 하지.”
황충이었다.
단신으로 장사 외성을 돌파했던 게 불과 삼 일 전이다. 어디서 다쳤는지 몸 여기저기에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그런 황충의 앞에 나설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황조군은 내가 수습해서 강하로 퇴각할 것이다. 그대들은 자중하여 불필요한 인명이 상하지 않게 하라.”
황충은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했다. 황충의 용맹을 아는 장선군과 묵가 제자들은 굳이 그런 황충과 맞서려 하지 않았다. 황조와 소비가 전사한 이상 황충이 군을 수습하는 게 이치에 맞으니, 황조군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지 않았다.
“무엇보다 황 장군이 아니었으면 황조군의 병사들은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겠지요. 묵가 제자들과 장선군이 추격전을 벌였을 테니 말입니다.”
황충의 옆에 있던 나관중이 말했다. 황충은 근육이 한껏 강조되도록 팔짱을 낀 자세로 대답했다.
“나는 장군이 아니라 교위올시다. 나 선생께서는 과례를 조심하시오.”
“형주자사부의 소교들과 병사들은 자기들끼리 장군이라고 부르더군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장군직을 얻으실 수 있지 않습니까.”
황충은 헛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나관중은 그런 황충을 찬찬히 관찰했다.
‘이 사람이 남방 제일의 무사인가. 과연 그렇게 불릴 만한 자태로구나.’
<삼국지연의>를 통해 나이 지긋한 노장으로 알려진 황충이다. 그러나 역사상의 기록으로 보면 황충이 특별히 고령이었다고 볼 만한 근거는 분명하지 않다. 황충에게 노장이라는 개성을 부여한 장본인 나관중은 역사상의 황충을 만나자 감회가 새로웠다.
‘마흔 살 정도 됐을까? 실제로는 유 황숙이나 관운장과 비슷한 연배구나. 그리고 저 몸은 정말 신기할 정도로군.’
나관중이 살던 14세기의 북중국에는 몽골인이나 서역인이 흔했다. 그러나 그런 이국의 무사들 중에도 황충 같은 근육질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근육만 보면 의심의 여지 없는 천하제일이었다.
황충은 자신을 계속 훑어보는 하얀 얼굴의 서생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 신기하시오?”
“앗, 송구합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건장한 신체를 타고나지 못해서…….”
“우리 가문에 내려오는 비전이 몇 개 있소. 무거운 돌을 드는 훈련을 통해 누구나 건장한 체격을 얻을 수 있소.”
“누구나 건장해질 수 있다고요?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들어 보시오. 먼저 사람의 몸을 3개로 나눠 보겠소. 그런 다음 3일을 주기로 하여…….”
황충은 연공법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수다스럽게 변해서 나관중이 질릴 때까지 떠들었다.
“…그래서 누구나 노력만 하면 건장해질 수 있는 것이오. 원한다면 나 선생께도 가르쳐 드릴 수 있소.”
“아니오.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나관중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황충은 나관중을 보며 피식 웃고 화제를 바꿨다.
“설마 강동군이 육로로 습격을 할 줄은 몰랐소.”
“그들 입장에서 황 태수는 선대의 원수니까요. 오늘 이 싸움도 강동군이 황조군에게 몇 번이고 거짓으로 패하며 교병계를 쓴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야만 황 태수를 야전으로 끌어낼 수 있으니까요.”
“대장군도 관여한 것이오?”
“대장군 또한 강동군의 원수인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장군께서는 형주에 와서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되셨습니다. 대장군의 뜻은 이 난세를 끝내는 것인즉, 가장 피가 적게 흐르는 방향으로 이 사실을 활용하신 것이지요.”
마초는 나관중을 사신으로 삼아 마대와 함께 황충에게 보냈다. 황충에게 상황을 알리고 전쟁을 조기에 수습하려는 목적이었다.
강동군의 손익은 황조의 목을 얻은 후 바로 물러났다. 그리고 황조가 사라지고 갈 곳을 잃은 강하태수부의 1만 군사는 황충의 지휘하에 들게 되었다.
독립 군벌이나 마찬가지였던 황조가 죽었다. 그렇다면 남은 1만 군사는 어디에 귀속될 것인가?
‘유 형주의 휘하로 가겠지. 황조를 잃은 대신 형주목이 직속으로 부릴 수 있는 1만의 정예병을 얻었다. 유 형주 입장에서도 남는 장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장사는 또 한 번 위기를 넘겼다.’
장사는 살아남았다. 강동군은 원수의 목을 얻었다. 유표는 1만 군사를 얻었다. 황충은 패전했지만 1만이나 되는 정예병을 수습해서 직할부대로 편입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 오직 불행해진 것은 황조뿐이었다.
그러나 황충에게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하나 있었다.
“장사는 어찌할 셈이오? 이번에는 살아남았지만, 유 형주가 다시 한번 대군을 보내면 그때는 버티기 어려울 것이오. 그리고 그때는 진짜 학살이 일어날 것이오.”
장사는 묵가의 본거지다. 유학자 유표는 앞으로도 장사의 독립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나관중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 또한 대장군께서 방법을 갖고 계십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 *
황조의 목을 얻은 손익은 강동으로 돌아가기 전, 송겸을 보내 마초에게 회견을 요청했다. 감사의 인사를 표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러나 마초는 일언지하에 손익의 요청을 거절했다.
“애송이와는 나눌 말이 없다. 나는 주랑과 이야기할 것이다.”
“대장군, 강동군의 수장은 손 장군입니다. 대장군께서 비밀리에 움직이고 계시니, 손 장군께서도 비밀리에 와서 감사의 인사만 드리고 갈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수행원 없이 단신으로…….”
“내 말을 못 들었나? 나는 강동을 실제로 움직이는 사람에게만 관심이 있다. 붉은 두건 쓴 애송이하고 놀 만큼 한가한 줄 아는가?”
마초는 일부러 송겸에게 짜증을 냈다. 송겸은 속으로는 울분을 곱씹으면서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고 정중하게 인사한 뒤 물러갔다.
이는 가후의 계책이었다. 일찍이 가후는 마초에게 이렇게 간언했었다.
“손익은 황조를 직접 베서 선대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게다가 먼 형주까지 원정해서 군사적 능력을 보였지요. 이제부터 강동 호족들도 손익을 인정하기 시작할 겁니다.”
“시세가 부득이하여 강동군의 힘을 빌리기는 했지만, 나는 강동군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별로 반갑지 않은 소리군요.”
“이렇게 하십시오. 손익을 크게 무시하며 모욕을 주십시오. 그리고 주랑을 크게 존중하며 손익 대신 주랑과 회담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생의 말씀은… 주유가 신하의 몸으로 주군인 손익보다 더 큰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걸 드러내라는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손익이 주유를 경계하도록 불화의 씨앗을 심는 겁니다. 주유는 손익의 형 손책의 벗이고, 강동 최고의 무장입니다. 당장은 손익도 주유를 크게 신임하겠지요. 그러나 지금 키워둔 의심은 언젠가 주유의 발목을 잡을 것입니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실로 악랄한 계략이다. 가후의 말을 들은 마초는 헛웃음이 나왔다.
“선생하고 척지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군요. 가 선생, 솔직하게 말해 보십시오. 계속 이각을 섬겼으면 나를 잡을 계략도 있었지요?”
“그런 게 있었으면 주공께서 저를 내쳤을 때 조용히 형주로 떠났겠습니까?”
“또 그 얘깁니까? 그때는 내가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마가군에 복귀한 이후로 가후는 사람됨이 조금 변했다. 표정에는 여유가 생겼고, 가끔 농담까지 서슴지 않게 되었다. 마초는 그런 가후를 보며 크게 웃었다.
그리고 며칠 후.
마초가 곳곳에서 부른 사람들이 장사에 모였다. 장소는 외딴곳에 있는 작은 정자였다.
“장사에는 마땅한 주루가 없더군. 오랫동안 전쟁을 치렀고, 태수부터 묵가 제자라 검소하니 사실 당연한 일이지. 그래서 이 정자로 모셨으니 너무 허물하지 마시오.”
상석에 앉은 마초는 그렇게 말하며 좌중을 둘러봤다.
묵가 제자들을 대표해 곽독이 보였다. 장사태수 장선의 아들 장역도 와 있었다. 황충과 싸우다 부러진 팔목이 아직 낫지 않았는지 부목을 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장 태수께서 병에 걸려 위중하시오. 별세하시면 앞으로는 장 공자가 태수직을 잇는 것으로 이야기가 되었소이다. 여기 계신 분들이 장 공자를 도와주시길 바라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곽독이 손을 모아 예를 표했다. 그는 며칠 전부터 장선을 대신해 거자(鉅子, 묵가의 지도자)가 되었다. 앞으로는 양양의 기반을 송두리째 장사로 옮겨 와서 장사에서 살아갈 생각이었다.
“다른 두 분께서는 어떠시오?”
마초는 곽독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상석 가까이 앉은 두 사람을 둘러봤다.
“대장군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또한, 큰 감사를 드리고 앞으로 대장군을 교주의 은인으로 섬기라는 사 대인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 중 관료풍의 사내가 공수하며 말했다. 교지군 장사 환린이었다.
그가 말하는 사 대인이란 교지태수 사섭이다. 난세가 시작되며 중국 대륙의 최남단, 지금의 광동성에서 베트남 북부에 이르는 교주 땅 역시 혼란에 빠졌다. 이 교주의 난리를 수습하고 행정력을 복원한 게 교지태수 사섭이다. 그는 이미 교주 땅에서 주목이나 다름없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정은 아직 사섭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마초는 이런 사섭의 상황을 활용해서 교지에 사신을 보냈다.
‘천자께 아뢰어 사섭을 교주 자사로 삼아 힘을 실어준다. 어차피 먼 교주까지 가서 전쟁을 할 수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사섭은 조정과 전쟁을 벌일 인물이 아니니까.’
원래의 역사에서, 사섭은 현지인들의 민심을 얻고 교주를 잘 개발했다. 그러면서도 중앙 조정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베트남의 역사적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를 알고 있는 마초는 천자의 권위를 빌려 사섭의 정권을 인정해 주고, 대신 사섭 정권을 장사 보호에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약속한 교주자사의 인수가 여기 있소. 사 사군에게 잘 전해 주시오. 교주는 특산물이 많지만, 외딴곳에 있으니 교역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오. 앞으로 장사를 통해 교주와 형주, 강동, 그리고 무릉만이 교역할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니, 사 사군께서도 군사를 내어 장사의 치안을 지켜야 할 것이오.”
“물론입니다.”
환린은 깊이 고개를 숙여 마초에게 감사를 표했다. 사섭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장사의 교역 거점까지 얻어 왔으니 그에 대한 사섭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질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교주 내부에서 친 마가군 성향의 대표적인 인물이 될 것이다.
마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강동 쪽의 대표를 향해 물었다.
“주랑의 생각은 어떤가?”
강동군 대표로 앉아 있는 주유는 잔잔하게 웃음을 지었다. 단순히 잘생긴 것을 넘어서 마음이 경건해지는, 보는 사람의 혼을 빼놓을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복파장군께서 안배하신 일입니다. 강동군 또한 최선을 다해 따를 것입니다.”
강동군의 초대 수장 손견은 장사태수를 지냈다. 즉 강동군에도 상징성이 큰 땅이며, 남형주로 통하는 거점이기도 했다.
마초는 이 장사를 교역 거점으로 활용하며, 교주군과 강동군이 같이 주둔하도록 제안했다. 교역 거점이 필요했던 교주군, 남형주의 거점을 원하는 강동군, 양측 모두가 그 제안에 응했다. 실질적인 방위는 곽독이 이끄는 묵가 제자들이 맡을 것이다. 그러나 북형주에서 장사를 공격할 경우 교주군과 강동군이 동시에 참전하게 되는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장사는 계속 독립을 유지한다. 그리고 교주군과 강동군이 동시에 뒷배가 된다. 이렇게 상황을 정리되자 몇 순배 흥겹게 술이 돌았다. 마초도 스스럼없이 그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얼마 후, 밤이 깊어지자 자리가 파했다. 환린과 곽독, 장역은 왔던 길로 돌아갔다. 이제 자리에는 주유와 마초만이 남았다.
디링.
주유가 공후를 한 번 쓸었다. 능숙한 솜씨로 반주를 넣으며 공무도하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주유의 목소리는 낮고 풍부하고 아름다웠다. 듣는 사람이 꿈속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주유의 노래가 끝났다. 잠시 여운을 즐기던 마초는 푸른 눈을 번쩍 빛냈다.
“이제 우리의 얘기를 시작하지, 주랑.”
주유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말이 없었다.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전부 제대로 대답하면 살아 돌아갈 수 있습니까?”
“그건…….”
탁.
마초는 치란을 상 위에 올려놓았다. 언제든 뽑을 수 있도록 칼자루를 왼손 앞에 둔 채였다.
“대답을 듣고 나서 생각해 보겠다. 그대를 살려둘지, 말지.”
“하하하.”
주유가 낮게 웃었다.
“좋습니다. 뭐든지 거짓 없이 대답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딱.
주유가 공후를 두들겨 소리를 냈다.
그것을 신호로,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 올라왔다. 8척의 장한이었다. 장한은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마초와 주유 사이에 놓고 다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