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강동소호 (2)
“또 보는군, 서문향.”
마초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자신의 앞에 끌려온 서성을 내려다봤다.
“황조 암살에는 성공했나? 우리 쪽에서 정찰해 보니 황조가 죽은 기색은 없던데.”
“황조에게 회복할 수 없는 중상을 입혔습니다. 이제 곧 죽을 것입니다.”
서성이 대답했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송겸과는 달리 침착한 태도였다.
마초는 그런 서성을 향해 말했다.
“좋아. 내가 이렇게 무례하게 자네를 모셔 온 이유를 알겠나?”
“모르겠습니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내가 간밤에 태평도의 습격을 받았는데, 그자들이 말하기를 강동군이 대장군 마초의 암살을 의뢰했다고 하더군. 자네 배를 부숴서 끌고 온 건 이 사실을 확인하려는 까닭일세.”
사실 강동군이 태평도에게 마초 암살을 의뢰했다는 자백은 없다. 서성을 압박하기 위해 그런 사실이 있는 것처럼 꾸몄다.
그런데 정작 압박당하는 서성은 흔들림이 없었다.
“금시초문입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저기에 들어가면 생각이 나지 않을까?”
마초가 손가락으로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사람이 들어갈 만큼 큰 솥에 병사들이 불을 때고 있었다. 솥을 본 송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지만, 서성은 여전히 침착했다.
“400년 전의 항우나 하던 행동을 설마 대장군께서 하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정히 저를 삶아야겠다면 그리하십시오. 그러나 제 입에서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뒤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저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으흠.”
마초는 호상에 앉은 채 서성의 눈을 뚫어지도록 쳐다봤다.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군. 이 녀석은 비밀 임무 중이었으니 모를 수도 있겠지. 아니, 설령 안다고 하더라도… 이 녀석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마초는 피식 웃고 자리에서 일어나 솥으로 다가가 뚜껑을 열었다.
후욱.
뜨거운 김이 올라왔다. 잠시 후, 김이 사그라지자 마초는 직접 국자를 들어 솥에 담긴 액체를 두 그릇 퍼 올렸다.
“내가 동탁도 아닌데 사람을 삶겠나. 그대들이 허기질 것 같아 죽을 끓였으니 들게.”
닭고기까지 들어 있는 제법 훌륭한 식사였다. 송겸과 서성은 잠시 망설였지만, 포박을 풀어주자 결국 죽을 한 그릇씩 비웠다.
마초는 서성과 잡담을 하며 편안한 분위기를 먼저 조성했다.
“여기 있는 감흥패는 나의 상장일세. 그런데 자네를 잡으면서 고생을 좀 했다더군.”
“지나친 겸양입니다. 제가 손도 쓰지 못하고 패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서문향, 자네는 무예도 뛰어나고 기백이 보통이 아니야. 나는 자네가 마음에 쏙 드는군. 꼭 강동군에 있어야겠나? 마가군에 들어오면 이천 석의 장군직을 약속하지.”
“거절합니다.”
서성은 긴말을 하지 않았다.
“으흠, 손씨를 계속 섬기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마초는 서성을 회유하려고 몇 번 시도했으나 서성은 요지부동이었다. 원래의 역사에서 그의 강직한 성품을 알고 있는 마초는 결국 포기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하여튼 강동 녀석들은 고집이 세. 좋아, 포기하지. 대신 하나만 알려 주게. 태평도를 사주해 나를 암살하려 했던 게 강동군 맞나?”
“그것은 제가 알지 못하는 일로…….”
“주랑을 만나야겠다.”
주랑, 주씨 가문의 청년.
강동군의 숨은 실권자 주유를 말한다. 마초의 입에서 주유의 이름이 나오자 처음으로 서성의 눈빛이 흔들렸다.
“대장군께서 직접 주 장군을 만나시겠다는 말입니까? 일단 돌아가서 힘써 보겠습니다만…….”
“서성. 나는 지금 청탁을 하는 게 아니다.”
마초의 분위기가 변했다. 태연하던 서성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을 살려 주마. 약속대로 너희들의 계획을 방해하지도 않겠다. 하지만 너희들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는 확실히 알아야겠다. 나는 주랑과 직접 대화할 것이다.”
꿀꺽.
서성은 침을 삼켰다.
‘이게 천하제일인인가.’
마초가 발하는 기세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자신도 모르는 새 목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서성은 정신을 집중하고 배에서 힘을 끌어 올려 목소리를 냈다.
“알겠습니다. 주 장군이 즉시 이곳으로 와서 대장군을 뵙도록 만들겠습니다.”
마초가 가진 무공은 무섭지 않다. 그것은 서성 하나의 목숨을 던지면 끝나는 문제다.
그러나 무공은 마초가 가진 강력한 힘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조정의 대장군이며, 관서 마가군의 실질적인 수장이다. 성정이 난폭하고 행동은 몹시 과감하다고 알려져 있으니, 언제든 강동을 짓밟기 위해 군사를 일으킬 수 있는 인물이었다.
마초는 서성이 제압당하자 다시 기세를 죽이고 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잘 생각했네. 주랑은 파양현에 주둔하고 있다고 하더군. 여기서 지름길로 달리면 열흘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 아닌가.”
“대장군, 주유 장군은 지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다른 곳?”
마초의 눈썹이 꿈틀했다.
“주유 장군은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닷새면 닿을 수 있는 거리입니다. 오래 기다리시지 않아도 됩니다.”
서성은 마초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 황조의 목이 떨어질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 나서 출발하겠습니다. 열흘 안으로 주유 장군과 만나실 수 있게 만들겠습니다.”
* * *
곽준이 이끄는 묵가 제자들은 다음날에도 여전히 황조군을 몰아쳤다.
풍칙, 즉 서성에 의해 중상을 입은 황조는 간신히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 황조 대신 전장을 지휘하는 부장 소비는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
“빌어먹을, 어르신의 상태가 저러니 물러날 수도 없고 나아갈 수도 없구나. 풍칙, 이 벼락 맞을 놈!”
다친 황조를 지키기 위해 발이 묶인 황조군은 묵가 제자들과 교전이 일어날 때마다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그래도 병력은 아직 우리가 세 배의 우위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저놈들에게는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정예병이 없으니, 싸움을 길게 끌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조금만 버텨라!”
소비 또한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내다. 묵가 제자들이 기상천외한 무기들을 앞세워 공격하고 있었지만, 황조군은 수도 많고 훈련도도 높은 정예병이었다. 묵가 제자들 입장에서는 병력의 질 차이 때문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방법이 없었다. 길게 끌면 황조군이 이기는 싸움이었다.
문제는 중상을 입은 황조가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때, 동쪽에서 징 소리가 울렸다.
“어떤 놈들이냐?”
소비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산기슭에서 한 무리의 군사들이 나타났다. 숫자는 약 천오백, 오랜 행군을 했는지 하나같이 흙투성이였다. 반면 손에 든 병장기는 전부 상등품이었다. 눈빛은 다들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청건병.”
무리의 중간에서 한 젊은이가 앞으로 나타나 수신호를 하자 군사들은 저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푸른 천을 풀어 머리에 둘렀다.
“돌격하라.”
젊은이가 수신호를 하자, 푸른 두건을 쓴 청건병들은 저마다 함성을 내지르며 돌격하기 시작했다. 오랜 행군을 위해 가벼운 갑주만을 걸친 경보병이지만, 아무도 주눅들지 않고 중무장을 한 갖춘 황조군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퍽!
“으아악!”
정면에서 공격하는 묵가 제자들만 신경 쓰던 황조군은 푸른 두건을 걸친 군사들에게 측면을 찔리자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하나같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정예병들이었다.
“황조는 저곳에 있나.”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젊은이가 앞으로 나섰다. 많아도 스물 남짓으로밖에 안 보이는 아주 젊은 청년이었다. 청년은 군사들이 두른 푸른 두건 대신, 허리춤에서 붉은 두건을 꺼내 머리에 둘렀다.
타닥.
청년은 병사들 사이에 섞여 땅을 구르며 달려 나갔다. 남들보다 걸음이 훨씬 빨라서 이내 앞서 있던 병사들을 추월하고 대열의 선두로 나섰다. 이내 접전이 벌어지는 제 1열까지 다가간 청년은 그대로 몸을 날려 황조군 병사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퍼억!
청년은 폭이 넓은 직도를 뽑아 들고 그대로 황조군 병사들을 베어 넘겼다. 한 칼이 닿는 곳마다 하나씩, 확실하게 쓰러졌다. 붉은 두건을 쓴 청년이 앞장서서 길을 열자 청건병들이 뒤따르며 황조군 병사들을 도륙했다.
청년은 황조의 군막을 향해 똑바로 전진했다. 군사들을 지휘하던 소비는 청년의 앞을 막아섰다.
“이놈, 어디서 온 놈인지 이름을 밝혀라!”
“손익이다.”
손책이 죽은 후, 마가군에게 끌려간 손권 대신 강동군을 이어받은 손견의 셋째 아들.
청년, 손익은 간단히 이름만을 말하고 소비를 지나쳤다. 소비는 이를 갈며 손익의 뒤를 쫓으려 했다.
“누군가 했더니 강동의 애송이였나. 어르신께 다섯 번이나 패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오늘 네놈의 버릇을 고쳐…….”
퍽!
소비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까마득한 거리에서 날아온 화살 하나가 가슴을 관통한 것이다. 도끼 모양의 부형시에 맞자 소비의 상체는 그대로 두 쪽으로 쪼개졌다. 머리와 어깨까지 붙어 있는 한 덩어리가 공중을 빙글빙글 돌다 땅에 떨어졌다.
손익은 소비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태사자가 즐겨 쓰는 화살이었다.
우당탕!
손익이 황조의 군막에 접근했을 때, 군막의 문이 부서졌다. 소란을 감지한 황조가 먼저 몸을 일으켜 군막 밖으로 나온 것이다.
황조는 손익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흥, 꽤 그럴싸한 얼굴을 하고 있군.”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했지만, 손익 또한 손책 못지않은 미남이었다. 아버지의 건장한 체격과 어머니의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형과 같은 노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네놈이 황조인가.”
“그렇다. 다섯 번이나 패하고 도망쳤던 놈이 이제야 배짱이 생겼나 보구나. 이리 와서 두 손으로 칼을 단단히 쥐고 내 가슴을 찔러라. 혹시라도 빗나가면, 돌에 깔려 죽은 네놈 아비처럼 울부짖게 될 것이다. 크하하하!”
황조는 손익의 손발을 흐트러뜨리기 위해 한껏 도발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원수가 아버지를 욕하는 것을 들은 손익은 별 반응이 없었다.
손익은 전혀 손발이 흐트러지지 않은 채, 침착한 동작으로 황조가 날리는 칼을 피하고 황조의 다리를 크게 벴다.
퍽!
“끄아악!”
서성이 입힌 상처로 움직임이 불편하던 황조의 다리가 다시 한번 잘렸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뒹구는 황조에게 손익이 다가갔다.
“손가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
“끄, 끄으윽…….”
“네놈의 목을 갖기 위해 십 년을 기다렸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전에 네놈 목으로 제사 지낼 것이니 그리 알아라.”
서걱. 서걱.
손익은 그대로 칼을 톱처럼 써서 살아있는 황조의 목을 잘라냈다. 그리고 자신을 수행하던 부장에게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목을 넘겼다.
“문규(반장의 자). 잘 갈무리해라.”
부장 반장은 손익과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였지만 벌써부터 얼굴에 여러 개의 칼자국이 나 있었다. 반장은 입술을 세로로 가로지른 칼자국을 크게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이 날씨에는 소금에 절여도 썩을 수 있습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비슷하게 생긴 놈들을 몇 놈 잡아서 산 채로 끌고 가겠습니다. 강동 호족들 앞에 이놈의 목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니, 그 전에 썩어 버리면 그놈들 중 하나의 목을 잘라서 대신하지요.”
“좋을 대로 해라.”
10년을 끌어온 아버지의 원수를 방금 갚았다.
손익은 머리에 두른 붉은 두건을 풀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 두건을 물려준 사내를 생각했다.
“형.”
잠시 손책을 생각하던 손익은 이내 두건을 갈무리했다.
‘두 번째 원수에게 닿을 때까지, 또 10년쯤 걸리겠군.’
손익은 그런 속내를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하지만 손익의 눈에 떠오른 섬뜩한 살기를 보고 그의 의중을 짐작한 반장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