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살수
황충은 그대로 전진해서 마초를 걷어차려 했다.
끼이익.
마초는 몸을 숙여 뱃전으로 미끄러졌다. 그리고 황충의 다리를 잡고 땅에서 한 바퀴 구르며 무릎을 비틀었다. 과거 조운에게 패배 선언을 받아냈던 슬쇄(膝碎)였다.
‘권장으로는 몇 번을 쳐도 버틸 것이다. 금나로 항복을 받아내야겠다.’
무릎의 힘줄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면 어쩔 수 없이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황충의 대처가 마초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핫!”
황충은 짧게 기합을 내지르며 몸을 낮췄다. 그리고 마초가 다리를 잡고 구르려는 움직임을 힘으로 버티기 시작했다.
“제길, 이렇게 되면…….”
이대로라면 황충의 무릎이 부서진다. 마초는 황충이 무공을 상실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턱.
마초는 황충의 무릎을 놓고 땅바닥을 굴러 일어났다.
용맹이 삼군의 으뜸이다(勇毅冠三軍).
정사 <삼국지>에서 황충에 대해 전하는 말이다. 그가 그런 평가를 받을 당시 유비 휘하에는 관우, 장비, 마초가 있었다. 그리고 무명의 무장에 불과했던 황충은 그 용맹을 보인 후 관우, 장비, 마초와 나란히 사방장군에 임명된다.
그런 이력에 걸맞게, 지금 형주자사부의 일개 교위에 불과한 황충이 천하제일인 마초를 상대로 치열하게 맞서 싸우고 있었다.
“후우우.”
마초가 깊게 심호흡을 했다. 황충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시 한번 마초를 껴안으려 돌진했다. 황충은 이번 대결에서 계속 마초를 껴안고 몸싸움하는 것을 고집했다. 촌경에 당하더라도 청경을 내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타당한 판단이었다.
‘황충에게 나처럼 세밀한 초식은 없다. 하지만 기본이 잘돼 있고 영리하다. 게다가 저 엄청난 외공…….’
회귀하기 전의 자신이라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
마초는 그런 생각을 하며 돌진하는 황충을 맞이했다.
자신보다 큰 상대가 정면으로 빠르게 돌진하면 막기 어렵다. 측면으로 돌아서 상대하려 해도, 옆으로 도는 걸음이 앞으로 달려 나오는 상대의 걸음보다 빠를 수는 없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뒤로 피하기도 어렵다.
두 사람이 거의 근접했을 때, 황충이 자세를 낮췄다. 마초의 다리를 잡으려는 의도였다.
마초는 그대로 앞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돌진하는 황충의 머리를 향해 무릎을 올렸다.
퍼억!
선혈이 튀었다. 무릎에 맞은 황충의 오른쪽 눈두덩이 크게 찢어져 피가 튀고, 목이 뒤로 꺾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목이 부러지고도 남았겠지만 황충은 이내 자세를 수습하고 계속 돌진했다.
마초는 황충의 오른쪽 옆으로 돌았다. 황충은 눈 위의 상처에서 흐른 피 때문에 오른쪽 시야가 가려져 있었다. 그 사각으로 들어간 마초가 촌경을 쓰자 폭음이 터졌다.
펑!
펑! 펑!
마초는 계속 황충의 오른쪽으로 돌면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촌경을 날렸다. 몸통에 연이어 날아오는 촌경을 버텨내던 황충도 턱에 한 발이 꽂히자 끝내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충의 자세가 흐트러진 잠시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마초가 황충의 뒤로 돌았다. 한 팔을 집게처럼 목에 두르고, 다른 한 팔로는 머리를 압박하면서 조르기 시작했다.
“…….”
목의 경동맥이 눌리자 정신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황충은 말없이 눈을 부릅뜬 채 반격을 위해 조금씩 몸의 힘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천하제일인이 발출하는 치명적인 공격을 너무 많이 맞은 탓일까. 생각대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턱.
그때, 마초가 황충의 목을 감은 팔을 풀고 뒤로 물러났다.
“이 정도면 승패가 갈리지 않았나. 큰 차이는 아니지만.”
마초가 황충을 보며 말했다. 치열한 혈투로 얼굴은 엉망이 돼 있었지만, 태도에는 여유가 있었다.
물끄러미 마초를 바라보던 황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큰 차이는 아니지만, 우열은 분명히 가려진 것 같군.”
황충은 뒤로 돌아 몇 걸음 걸었다. 그리고 다시 명적을 꺼내 하늘을 향해 쐈다. 이번에는 전투 중지의 신호였다.
팔짱을 낀 채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던 감녕도 활을 꺼내 명적을 쐈다. 역시 전투 중지의 신호였다. 자신이 나서서 겨루지 못한 아쉬움이 동작에서 묻어 나왔다.
털썩.
황충이 뱃전에 꼿꼿한 자세로 앉았다. 머리를 감싼 옷깃을 풀자 귀의 상처에서 흐른 피가 찐득하게 엉겨 있었다. 황충은 상처의 피를 닦아내고 다시 묶었다.
마초는 그런 황충에게 다가가 짐을 한 꾸러미 내밀었다.
“이건 뭐지?”
“천하의 명의에게 받은 잘 드는 약. 그대에게 필요할 것이다. 싸움이 끝났으니 서로 원한은 남기지 않는 것으로 하자고.”
약을 받은 황충은 마초를 올려다본 후, 큼지막한 눈과 입을 움직여 씩 웃었다.
“재미있는 친구로군.”
“뭐가 그리 재미있나?”
“대장군 마초라면 천하에서 손꼽히는 귀한 몸인데, 시골 무부와 굳이 이런 승부를 벌이다니 재미있지 않겠나.”
“하하하, 이런.”
마초는 쓴웃음을 지으며 황충을 바라봤다.
“언제 눈치챘나?”
“첫수를 나눈 다음부터. 무명의 무사가 가지고 있을 만한 무공이 아니었다. 젊은 나이에 오십 년 공력이 필요한 무공을 쓰는 인물이 천하에 둘이나 있을 것 같지는 않더군.”
우락부락한 외모와는 달리 상황 판단이 빠른 황충이다. 마초는 ‘이 녀석도 장익덕과 비슷한 부류인가’ 따위의 생각을 하며 물었다.
“그대가 황조에게 이 사실을 고하면 내 처지가 곤란해지겠군.”
마초는 황충을 슬쩍 떠보듯 물었다. 황충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과연 그럴까. 황조의 처지가 더 곤란해질 것 같은데. 대장군 마초가 몰래 장사에 개입하고 있다면, 강하태수 정도가 감당하기는 너무 힘든 진실 아닌가.”
그 또한 일리 있는 말이다. 마초가 몰래 장사태수 장선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관서와 형주가 극한의 대립을 피할 수 없다. 장사를 공략하는 황조의 입장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란한 처지에 놓일 것이다.
“나는 황조의 수하가 아니라 형주자사부의 신하다. 내 부하들과 무사히 양양으로 돌아가는 것이 첫 번째고, 장사를 빠르게 함락시켜 불필요한 살생을 막는 것이 두 번째다.”
“그렇군.”
“나는 대장군이나 유 형주처럼 귀하신 분들의 정치 싸움에는 별 관심이 없다. 황조 같은 소인배에게도 흥미가 없다. 내가 궁금한 것은 단 하나다.”
“말해 보게.”
“황조가 장사를 함락시키면 살육이 일어난다. 나는 황조가 공세에 나서기 전에, 먼저 성을 함락시켜서 살육을 막을 생각이다. 대장군은 나를 방해할 텐가?”
황충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마초는 진지한 얼굴로 그런 황충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맞받았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나는 지금 장사를 지키는 젊은이들이 죽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 내 앞을 막아서지 말았어야 했다. 대장군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우리는 장사성의 남문에 도달해 공격을 시작했을 것이고, 내일이면 내성을 무너뜨렸을 것이다. 대장군이 살리겠다는 젊은이들이 대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황조의 학살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방금 대장군이 날려 버린 것이다.”
“실로 대장부가 할 법한 생각이군. 하지만 황 교위, 나는 그대가 성문을 부수는 것보다 더 적게 피를 흘리고 이 싸움을 끝낼 방법이 있다네.”
마초는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았다. 자신을 힐난하는 황충에게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대는 오늘 나와의 비무에서 내상을 입었으니 사흘 정도는 정양해야 할 걸세. 나는 그 사흘 안에 이 전쟁을 끝낼 생각이네.”
“사흘 만에… 전쟁을 끝낸다고?”
“그래. 전쟁이 끝나면 그대와 그대의 병사들은 무사히 형주자사부로 돌아갈 수 있겠지.”
황충은 마초의 호언장담을 믿기 힘든 듯 인상을 찌푸렸다. 마초는 그런 황충을 향해 말했다.
“나는 이곳에 있을 테니까, 정양이 끝나고 사흘 뒤에도 전쟁이 끝나지 않거든 나를 찾아오게. 아니면 대장군 마초가 몰래 장사를 지원했다고 떠들고 다녀도 상관없고.”
“…….”
“단, 그때까지 이 배는 내가 맡아 두겠네. 이 배에 천근노가 실려 있지? 사흘 후에 그대의 군영으로 돌려보내겠네.”
황충은 말없이 마초를 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오늘 입은 부상을 생각하면 사흘 안으로 다시 선봉에 서기는 어렵다. 이 자리에서 마초와 계속 대결을 벌이는 것은 승산이 극히 낮다. 마초는 5척 장도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으니 병장기를 들면 더 강해질 것이다. 나서지 않고 있는 감녕에게도 신경이 쓰였다.
‘마초, 이 자는 내 목을 취할 수 있었지만, 자비심을 보였다. 반면 황조는…….’
인상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던 황충은 얼굴을 타고 뭔가 흘러내리는 느낌에 정신을 차렸다. 떨어져 나간 귀의 상처가 벌어졌는지 다시 피가 흐르고 있었다.
황충은 씩 웃었다.
“내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군. 좋아, 돌아가서 대장군이 이 복잡한 장사 문제를 어떻게 정리하는지 지켜보겠네.”
“지켜보고 나서 어쩔 셈인가?”
“양양에서 다시 만나지. 마음에 들면 술을 들고 찾아갈 테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병장기를 들고 가지 않겠나.”
황충은 그대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병사들 몇몇이 몰고 온 작은 배를 타고 사라졌다. 감녕의 장팔범봉에 맞아 강에 떨어진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다행히 죽지 않고 무사했다. 쇠붙이가 달려 있지 않은 돛대로 그냥 밀어붙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감녕은 한참 동안 황충이 떠나는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황한승. 독특한 자로군요.”
“그래, 완력은 천하제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세밀한 초식은 조금 부족하지만.”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저자는 뭔가… 난세의 무장 같지 않군요.”
장사성을 단신으로 함락시키고, 천하제일인 마초와 겨루는 동안 황충은 한 번도 병장기를 뽑아 들지 않았다. 이미 천하에 이름을 떨칠 만한 무공을 갖추고 있지만, 교위 직급에 만족하며 공을 탐내지 않았다. 비무의 승패에도 연연하지 않았다. 감녕은 그런 황충의 태도가 신기했다.
“황한승은 원래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더군. 출세에도 관심이 없고. 이번 전쟁에서도 황조의 전공을 자기가 빼앗아서 학살을 막을 생각이라지 않나.”
“하면, 그런 자를 우리 마가군으로 끌어들일 방법이 있겠습니까?”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 볼 수밖에. 양양으로 돌아가면 다시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세.”
“잘 됐으면 좋겠군요. 저도 저자와 무공을 한번 겨뤄 볼 수 있게 말입니다.”
마초와 감녕은 황충에게 빼앗은 배를 몰아 상수 하류의 숙영지로 향했다. 한밤중이라 강은 조용했다.
그런데 시간이 일각쯤 지났을 무렵, 배에 문제가 생겼다.
쿵.
“밑전에 뭔가 부딪혔습니다!”
배를 몰고 있는 금범군 병사들이 외쳤다. 감녕은 눈살을 찌푸리며 배 밑전으로 향했다.
“돌고래냐, 아니면 악어냐?”
“그것은 확실치 않습니다. 날카로운 구멍이 나서 물이 새어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악어인가? 침착해라, 이 녀석들아. 큰 구멍은 아니니 서쪽 강안에 배를 대고 수리하면 되지 않느냐.”
고대의 장강에는 악어와 돌고래가 흔했다. 그래도 천근노를 실을 정도로 큰 배가 악어의 충돌 따위로 침수되는 건 석연치 않은 일이었다.
‘형주 녀석들이 배 만드는 솜씨가 시원찮기는 하지만, 악어 때문에 이 큰 배가 침수되는 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배는 강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강안에서 10장 거리까지 접근했을 때, 다시 한번 배 밑전에서 소리가 울렸다.
쿵!
쇠가 나무를 때리는 소리였다. 동시에 배가 크게 기울었다. 밑전이 뚫린 배의 한쪽 선저가 강바닥에 닿았다. 배는 30도가 넘는 각도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졌다. 선원 몇몇이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황급히 균형을 잡았다.
“악어가 아니라 사람이군.”
감녕은 지체 없이 사각철간을 꺼내 양손에 들었다. 마초도 치란을 허리에 차고 그의 옆에 섰다.
마가군의 다른 배들은 흩어져서 숙영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형주군에서 탈취한 이 배만 따로 떨어져서 수리를 위해 강안으로 가던 길이었으니, 마초와 감녕의 곁에는 불과 십수 명의 군사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촤아악!
물속에서 십여 명의 신형이 튀어나와 비스듬히 기울어진 배에 올랐다. 검은 옷과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객들이었다. 자객들은 기울어진 배에서도 용케 균형을 잡으며 각자 손에 든 병장기를 꺼내 마가군 병사들을 제압해 갔다.
“호아신변(護我身邊), 화개일월(華盖日月).”
“엄형불견(掩形不見),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
자객들이 외우는 것은 도교, 그중에서도 마초에 손에 의해 멸망당한 한중 천사도의 주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