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노당익장 (1)
“우리는 드러나지 않게 이 전쟁에 개입한다. 장사태수 장선의 편에 서서 황조군에 대적할 것이다.”
장사성.
마초 일행은 포구에 있는 큼지막한 상관에 모여 있었다. 비관이 운영하는 상단에서 얼마 전 남형주 진출을 위해 지은 건물이었다. 이곳에서 마초는 황조와 장선의 싸움에 몰래 개입할 것을 선언했다.
비관이 물었다.
“맹기 형님… 아니, 대장군. 차라리 대장군께서 장사에 머물고 있다고 황조군에 알리시는 게 어떻습니까? 대장군이 장사에 계신 걸 알면 황조도 입장이 난처해서 전쟁을 벌이지 못할 텐데요.”
“그건 임시방편일 뿐이다. 내가 여기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한 달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황조는 장사성을 함락시키겠지. 그리고 내가 드러내놓고 남의 전쟁에 개입하는 것도 모양새가 너무 안 좋지 않나.”
“하지만… 지금 한 번의 싸움을 이긴다고 장사가 계속 버틸 수 있겠습니까? 올해의 공세를 막아내더라도 내년, 내후년에 계속 쳐들어올 텐데요.”
비관은 여전히 걱정이 많았지만, 마초는 자신감을 보였다.
“우형에게 다 생각이 있으니 아우는 너무 걱정하지 말게. 이감, 내가 말한 일은?”
“처리했습니다, 주공. 강동과 교주 양쪽으로 서신을 보냈습니다.”
“좋아. 강동과 교주에서 답신이 도착하면 앞으로 유표군이 함부로 장사를 넘보지 못할 것이다.”
마초는 이감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이번에는 가후를 보며 말했다.
“곽씨 형제는 내가 황조의 출병을 늦춰 주기만 하면 전쟁 준비를 충분히 해서 이길 수 있다고 했지만, 직접 둘러보니 어림도 없겠더군요. 가 선생이 서원직과 함께 장사의 전쟁 준비를 점검해 주십시오.”
“직접 싸울 수는 없지만, 책략을 짜 주는 정도는 괜찮겠지요. 염려 마십시오.”
그렇게 가후에게도 임무를 맡긴 후, 마초의 시선은 감녕을 향했다.
“황조군은 강하에서 배를 타고 상수를 따라 내려올 것이다. 흥패,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자네는 마대와 함께 배를 타고 상수의 상류에서 대기하게. 그럴 일은 없어야겠지만, 만약의 경우가 생긴다면…….”
“정체를 숨기고 황조군을 습격해서 혼란을 만들어야겠군요. 알겠습니다.”
가후와 서서, 감녕과 마대가 뒤에서 장선군을 돕는다.
마초는 그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말했다.
“황조의 곁에 다른 세력의 간자가 있다. 그러니 싸움은 길지 않을 것이다. 장선군이 잘 버텨서 황조를 난전으로 끌어내기만 하면, 황조는 부하의 손에 죽을 것이다.”
* * *
둥. 둥. 둥.
장사성의 옆을 끼고 흐르는 상수의 강물 위로 북소리가 울렸다. 강하에서부터 상수를 따라 내려온 황조군의 선봉대가 진군의 북을 치고 있었다.
강동군과의 오랜 싸움으로 단련된 황조군은 과연 정예병이었다. 상수 강변에 배를 정박하고 일사불란하게 장사성을 포위했다. 장사를 지키는 장선군은 3천에 불과했으니, 1만이 넘는 황조군을 보자 아예 야전을 포기하고 성 안으로 들어가서 농성을 시작했다.
“좋아. 전군 공격하라!”
황조군의 선봉장 소비는 기세 좋게 첫 공격을 명했다. 황조군의 일부는 성 근처의 거점을 제압하고, 일부는 정란이나 충차 같은 공성 병기들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일부는 화살을 퍼부으며 교전을 시작했다.
“으음, 저놈들이 외성을 증축했군. 꽤 그럴싸하게 만들었는데.”
고대의 성들이 흔히 그렇듯이, 장사성도 내성과 외성으로 이중 성벽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지난번에 시원치 않았던 외성은 그새 묵가 제자들이 증축해서 높고 튼튼하게 완성돼 있었다.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장사의 외성을 수비하는 것은 장선의 아들 장역이었다. 장역은 황조군이 공격해 오자 우렁차게 외쳤다.
“응사하라!”
장역의 호령과 함께 외성의 성벽 위에서 화살이 날았다.
휘이이잉.
퍼억!
위에서 아래로 쏘는 화살은 위력적이었다. 장선군의 화살에 황조군의 선봉대가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성에 접근하는 것을 단념했다.
소비는 장사의 방어 태세가 단단한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주공이 도착하시기 전에 공을 좀 세워 볼까 했더니, 할 수 없군.”
소비의 옆에 있던 아장 하나가 그런 소비를 보며 물었다.
“장군, 어찌할까요?”
“화살의 사거리 밖으로 물러나서 진영을 설치해라. 주공께서 도착하시면 총공세를 벌일 것이다.”
그런데, 소비와 아장의 대화에 별안간 한 사람이 끼어들었다.
“황 태수가 도착하는 게 내일이라 했나.”
거한이었다.
키는 9척. 여포와 장비보다 크고, 관우와 비슷하다. 평상복 위에 간단한 찰갑만을 걸치고 있었는데, 장정 두 명분은 너끈히 될 것 같은 근육이 온몸에 솟아 있어 옷 위로 도드라져 보였다. 거한은 사내의 다리통보다 굵은 팔뚝으로 용케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놈이 또 팔뚝 자랑을 하는군. 하여튼 기분 나쁜 녀석이야.’
소비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겉으로는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자신은 강하태수부 소속인 반면, 이 거한은 상급기관인 형주자사부 소속인 것이다.
“그렇소이다, 황 교위.”
“하면 총공격은?”
“충차와 정란을 먼저 조립하고 사흘 후에 감행할 것입니다. 공성 병기가 충분하니, 이번에는 한 번 공격으로 외성을 함락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외성을 함락한다고 전투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진짜 단단한 것은 내성이다. 그러나 외성과 내성 사이에는 수천 명의 가까운 사람들이 살면서 보급과 지원을 담당하고 있다. 외성을 함락시키고 외성 안의 민가를 제압하면 장선군은 꼼짝없이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는 것이다.
“그런가. 사흘 후 저녁이면 장사 사람들이 다 죽겠군. 알았소.”
거한은 그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챈 소비는 거한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황 교위! 경거망동하지 마시오. 장사성 안에는 숱한 역도들이 있소. 주공께서 그들을 친히 처단하실 것이오!”
“그래?”
거한은 고개만 돌려 소비를 돌아봤다. 거한과 눈이 마주친 소비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아,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주공의 지시가 있어야…….”
“나는 황 태수의 신하가 아니다.”
거한은 그 말을 남기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소비는 거한의 뒤통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거한의 나이는 30대 후반쯤으로 알려졌지만, 머리가 일찍 빠졌는지 아예 바싹 깎아서 번들번들한 대머리였다. 소비는 거한의 썩 잘생긴 뒤통수를 향해 욕설을 날렸다.
“제길, 저놈이 설마 공을 다툴 셈인가?”
잠시 후.
드르르륵.
장사성의 외성을 향해 수레 한 대가 전진하기 시작했다. 수레의 전면에는 거대한 방패가 여섯 개나 달려서 앞을 완전히 막고 있었다. 위와 양옆에도 철판을 덧댄 방패로 막혀 있는 수레였다.
퍼퍼퍼퍽!
수레가 화살의 사거리 안으로 들어가자 장사 외성에서 쏘는 화살이 어지럽게 날았다. 전후좌우에 방패를 두른 수레는 순식간에 화살이 박혔다. 그렇게 고슴도치 같은 모양새가 되어서도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저 수레는 대체…….”
“뭐가 끌고 있는 거냐? 말이냐, 소냐?”
외성의 수비병들은 당황했다. 수레 전면의 방패벽 사이에는 말이나 소가 들어갈 만한 공간이 없었다. 기껏해야 사람 한 명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짐말이 두 마리는 붙어야 할 법한 육중한 수레였다. 설마 사람 한 명이 끌고 있는 게 맞는지,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드드드득.
덜컹.
성문 앞 30장 거리까지 접근한 수레가 드디어 멈췄다. 외성 위의 모두가 수레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우와아아!”
“황 교위 곁으로 붙어라!”
성 위의 수비병들이 전진하는 수레에 주의를 뺏긴 사이, 수레를 따라 조금씩 전진해 온 병사들이 수레의 곁으로 붙었다. 숫자는 십여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다들 몸놀림이 절도 있고 빨랐다. 병사들은 순식간에 수레의 주변에 붙어 큼지막한 방패를 치켜들고 날아오는 화살 공격에 대비했다.
“이런 제길!”
“쏴라!”
외성의 수비병들이 수레를 향해 활을 당겼다. 거리가 애매해서 빗나가는 화살이 더 많았다. 일부 수레로 향하는 화살은 수레를 둘러싼 거대한 방패들, 그리고 각자 방패로 몸을 가리고 있는 병사들이 막아내고 있었다.
투둑.
수레 전면의 방패 중 두 개가 땅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수레를 끌고 전진해 온 거한, 형주자사부 교위 황충의 모습이 드러났다.
황충은 날아오는 화살에 개의치 않고 수레를 둘러싼 가림막을 벗겼다. 수레에는 공성 병기로 쓰이는 거대한 쇠뇌, 노포(弩砲)가 실려 있었다.
그런데 통상의 노포와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활대의 길이가 사람 키의 두 배에 달하는 엄청나게 거대한 노포였다. 앞뒤 길이는 사람 키의 세 배에 달했다.
“잠시 화살을 막아라.”
황충이 명을 내리자 뒤따라온 병사들 십여 명이 황충을 둘러쌌다. 황충은 병사들과 같은 갑옷을 걸친 채 노포 위에 올라가서 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익.
시위로 쓰는 굵은 밧줄이 늘어나며 귀신이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황충의 거대한 팔뚝에 피가 돌며 삽시간에 십여 가닥의 핏줄이 솟았다. 황충은 노포의 말뚝만 한 손잡이를 잡고 뒤로 후퇴시켰다.
장사 외성 위에서는 장역이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저만한 노포가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없는데, 설마 저걸 당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은…….”
노포를 크게 만드는 것은 전혀 어려운 기술이 아니다. 그러나 저만한 크기의 노포라면 말이 끌어야 장전할 수 있을 테니, 효율이 중요한 전장에서는 터무니없이 비효율적인 무기였다.
철컥.
황충은 마침내 노포의 시위를 걸었다. 시위에 얹힌 것은 통나무에 철심을 박아 만든 물체였다. 쇠뇌의 모양을 한 것에 얹혀 있으니 화살로 보이기는 했다. 만약 이 물체만 따로 봤다면 누구나 기둥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길이가 1장, 무게가 40근에 달하기 때문이다.
황충은 노포의 각도를 비스듬히 올렸다. 그리고 시위를 놓자, 기둥뿌리만 한 화살이 공기를 찢으며 장사 외성을 향해 날았다.
부우우웅.
쾅!
화살은 성문과 성벽을 잇는 부분에 명중했다. 흙벽돌로 쌓은 성벽이 움푹 팰 정도의 일격이었다.
부우우웅.
콰앙!
두 번째 화살도 정확히 그 자리에 명중했다. 이번에는 성문이 부르르 떨었다. 성벽이 허물어지며 성벽에 박혀 있는 성문의 이음새 부분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화살이 날았다.
부우우웅.
쾅!
세 번째 화살도 정확히 같은 부분에 명중했다. 성벽이 부서져 나가고, 지지대를 잃은 한쪽 성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끼이이익.
콰아앙!
“아니, 저럴 수가!”
“성문이 열렸다!”
장수 하나가 단신으로 성문을 열어젖히는 것을 본 장사 외성의 수비병들은 망연자실했다. 황조군 진영에서도 그저 경악에 찬 외침이 터져 나올 뿐이었다.
황충을 따라온 형주자사부의 병사들은 그때부터 눈빛이 변했다. 전의를 상실한 장사성을 향해 일제히 돌격하기 시작했다.
“돌파하라!”
“우와아아!”
장사성의 수비병들은 황급히 대열을 갖춰 열린 성문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황충을 따르는 군사들이 더 빨랐다. 몇 명이 앞장서서 열린 성문으로 돌입했다.
우두둑.
노포 세 발을 쏴서 성문을 부순 황충이 목을 양옆으로 꺾고 그 뒤를 따랐다. 전신을 가릴 만큼 큼직한 방패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있었다. 보통의 병사들은 온몸으로 들고만 있어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의 무게였지만 그런 것을 두 개나 든 황충의 몸놀림은 너무나도 가벼웠다.
용감한 병사들 몇몇이 그런 황충을 향해 창검을 내질렀다. 그러나 철판을 두른 방패는 창에 찔리고 검에 베여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충의 힘에 질린 병사들이 자신도 모르는 새 주춤거렸다. 황충은 유유히 그사이를 지나 성벽 위로 올랐다. 성벽 위에는 장선의 아들이자 장선군의 지휘관, 장역이 있었다.
“이놈! 장 공자에게 가도록 내버려 둘 줄 아느냐!”
장역을 근거리에서 지키는 무장들 몇몇이 나섰다. 병사들 상대로는 제대로 손도 뻗지 않던 황충은 무장들을 보자 비로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퍼억!
“크윽!”
“으아악!”
황충은 방패로 무장들을 밀어붙였다. 방패에 밀린 무장들은 황충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그대로 밀려서 성벽 아래로 떨어졌다.
저벅. 저벅.
이제 황충의 앞에는 장역만이 남았다. 키가 크고 선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장역은 이를 악물고 황충을 향해 칼을 뽑아 들었다. 빈틈이 없는, 제대로 배운 검술의 자세였다.
장역의 자세를 본 황충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법 무공이 있군. 그대가 장 태수의 아들인가?”
“황조군의 주구에게 밝힐 이름은 없다. 나는 그저 옛사람의 가르침을 따라 성을 지키다 죽을 뿐이다!”
“잘못 알고 있군. 나는 황조의 부하가 아니다.”
황충은 그렇게 말하며 장역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장역은 그대로 검을 들고 황충에게 돌진했다.
황충은 장역이 달려오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걸어갔다. 마침내 한 발을 내디디면 칼이 닿을 만큼 두 사람이 가까워졌을 때, 황충은 장역의 칼날을 향해 방패를 슬쩍 내밀었다. 아주 짧은 가속만으로 힘을 발출하는 촌경의 수법이었다.
까앙!
장역의 칼은 황충의 방패에 실린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하늘로 날았다. 장역의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튀었다.
“크윽……!”
장역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손목이 부러졌는지 기묘한 각도로 꺾여서 축 늘어져 있었다.
황충의 군사들이 무력화된 장역을 포박했다. 황충은 장역을 잠시 내려다본 후, 성벽 위에 올라 장사 외성의 안쪽을 내려다보며 군령을 내렸다.
“오늘 안으로 외성을 제압하고 내성을 포위하라. 시간을 지체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존명!”
군사들은 일개 교위에 불과한 황충에게 마치 사방장군이라도 대하듯 절도 있는 태도로 군례를 올렸다. 황충이 고개를 끄덕이자 군사들은 일제히 해산했다.
묶인 채 꿇어앉은 장역은 그런 황충을 올려다봤다. 거대한 체구와 바싹 밀어버린 머리,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무위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던 그의 얼굴이 그제야 똑똑히 보였다.
황소 같은 인상을 한 사내였다. 각진 턱과 우악스러운 콧날을 보면 영락없는 무골이었다. 그러나 남들의 두 배쯤 될 것 같은 큼지막한 눈동자에서는 살기나 호승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대는… 이 장사를 대체 어쩔 셈인가?”
고통스럽게 목소리를 짜내 묻는 장역에게 황충이 대답했다.
“하루 만에 외성을 떨어뜨리고, 삼 일 안으로 내성을 열어젖힐 것이다. 황조가 뭔가를 하기 전에, 내 손으로.”
그래야 불필요한 살생을 줄일 수 있으니까.
황충은 뒷말을 생략한 채 장역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내성을 공략할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