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공무도하(公無渡河)
파양현.
형주를 지나온 장강은 이곳에서 방향을 틀어 북동쪽으로 흐른다. 파양현 일대의 강폭은 수평선이 보일 만큼 거대했다. 민물의 바다처럼 거대한 이 호수를 두고 훗날의 사람들은 파양호라 부르고, 지금의 사람들은 팽려택이라 부르고 있었다.
팽려택의 장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태수부가 있었다. 파양현이 속한 예장군의 태수가 아닌, 서쪽의 형주 강하군을 다스리는 강하태수부였다. 형주목이 임명한 강하태수는 황조고 실제로도 황조가 강하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강동군에서도 멋대로 강하태수를 임명해 둔 상태였던 것이다.
“오늘 고 선생을 모시고 강론을 들을 수 있어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테니 푹 쉬십시오. 음식은 대단치 않지만, 음악만은 마음에 드실 것입니다.”
강하태수부에 세워진 정자 위. 강하를 다스리지 않는 강하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고대에게 술을 권했다.
고대는 강동에서 첫손 꼽히는 유학자였다. 오늘은 강하태수의 청으로 먼 파양현까지 와서 좌전을 강론한 참이었다. 고대는 악공들이 연주하는 음악 소리를 들으며 술을 입으로 가져갔다.
“주 장군께서 대단치 않은 재주를 높이 여겨서 이 먼 곳까지 불러 주시니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유학자 고대는 60세 전후, 이 시대에는 노인이라고 불릴 만한 나이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고대는 젊은 강하태수에게 깍듯이 예를 취했다.
그를 부른 강하태수는 바로 주유. 강동군 최고의 실세로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주유는 우아한 동작으로 포권하며 예를 표한 뒤 다시 술잔을 들었다. 주유의 미모는 눈부셨다. 나이 지긋한 고대도 그 아름다움에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휘릭.
그러던 주유가 별안간 고개를 돌렸다. 공후를 연주하던 악공을 보며 단정한 얼굴을 찌푸렸다.
“음이 틀리지 않았나.”
“소, 송구합니다, 장군.”
“공후를 내게 주고 나가 보라.”
주유는 그렇게 말하며 악공을 물리쳤다. 주유에게서 얼음장 같은 냉기가 흐르자 다른 악공들도 황급히 악기를 놓고 자리를 떴다.
주유는 공후의 현을 몇 번 튕겼다. 그리고 목을 가다듬은 후, 공후를 타며 나직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대여 강을 건너지 마오(公無渡河).
그대는 끝내 강을 건너셨네(公竟渡河).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墮河而死).
가신 그대를 어찌하리(當奈公何).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먼 동쪽, 지금은 멸망한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전래된 노래다. 이 시대에는 중국에서 보편적인 유행가였다.
누구를 생각하며 노래하는지, 그 선율이 처연하고 아름다웠다. 주유는 긴 손가락으로 후주를 넣고 곡을 마무리했다. 홀린 듯 음악을 듣고 있던 고대는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주유의 선율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음악이 끝나니 정자 안에는 주유와 고대만이 남아 있었다. 짧은 노래가 흐르는 사이 사람들이 전부 사라진 것이다.
“주 장군, 이게 대체…….”
“긴히 청을 드릴 게 있습니다.”
주유는 여전히 공후를 안은 채 고대를 응시했다. 눈이 깊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청이라니요? 그저 초야에 묻혀 사는 유생에게…….”
“낮에는 이름난 유학자, 밤에는 도교의 지도자라. 바쁘시겠습니다. 오늘은 유학자 고대 선생이 아니라 강동 태평도의 총수에게 볼일이 있어 모셨습니다.”
주유와 마주 앉아 있던 고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고대는 입꼬리를 양쪽으로 올리며 히죽 웃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나.”
“선인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오래되었지요.”
“어떻게 알았나.”
“태평도에는 우리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우길 선인.”
디리링.
주유는 그렇게 말하며 공후를 한 번 쓸었다. 손가락이 닿는 곳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울렸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자 맞은편에 우길이 보였다. 유학자 고대로 행세할 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달라져 있었다. 겸손하고 점잖은 태도는 사라지고, 풍부한 표정에 언뜻 광기가 비쳤다.
“강동의 호랑이가 언젠가는 내 목을 노릴 것이라 생각했지. 그가 죽고 나서 한시름 놓았는데, 이제 주랑이 내 목을 노리는가.”
“우길 선인의 목이라. 그런 건 나에게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주유는 무심하게 답했다.
“덕왕촌의 엄백호를 통해 내 뜻을 전했을 텐데요. 포교를 하고 싶으면 하고, 재물을 쌓고 싶으면 쌓으십시오. 권력에만 욕심을 내지 않으시면 됩니다.”
“흥. 벼슬하는 이들은 항상 그렇게 말하고 뒤통수를 치고는 하지. 그래, 청할 것이라는 게 무엇인가?”
“사람을 하나 죽여 주셔야겠습니다.”
“허허허.”
우길은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더러운 일에 우리 태평도를 가져다 쓸 셈인가?”
“피차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강동군은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일을 처리해서 좋고, 태평도는 강동 땅에서 자유롭게 포교해서 좋고.”
“내가 거절하면?”
“천사도(天師道)가 어떻게 됐는지 보시지 않았습니까.”
이 시대 도교의 큰 지파에는 천사도와 태평도가 있다. 원래의 역사에서는 태평도가 힘을 잃고 한중의 천사도에 흡수되게 된다.
그런데 지금은 마초에 의해 한중의 천사도가 철저히 파괴되어 버렸다. 힘 있는 자의 분노 앞에서 종교는 한없이 무력했다. 주유는 우길에게 그 사실을 상기시켰다.
“어쩔 수 없군.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상당한 거물을 죽일 생각인가 본데, 누군가?”
“대장군 마초.”
“으음?”
우길은 귀를 의심했다.
“목표물이 황조가 아니라… 대장군 마초라고?”
“황조의 목은 전쟁을 통해 얼마든지 취할 수 있습니다. 떳떳한 방법으로는 죽일 수 없는 인물이니 암살하려는 것이지요.”
“아니, 그렇다고 해도 마초는…….”
마초라면 조조와 함께 지금 천하에서 가장 강한 두 사람 중의 하나다.
그런 사람을 무슨 수로 암살한다는 말인가?
“태평도의 휘하에 뛰어난 살수들이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돌아가신 손 장군을 노릴 생각을 할 만큼.”
“허허, 살수가 몇 명 있는 건 사실이네만.”
“그들을 전부 동원해서 마초를 노리십시오. 마초는 지금 형주 땅에 있습니다. 이제 곧 강하의 황조가 장사를 칠 텐데, 마초가 조심성 없이 그 싸움에 끼어든 모양입니다. 태평도 입장에서는 절호의 기회가 생길 것입니다. 난전 중 죽은 것으로 꾸밀 수 있으니까요.”
“마초는 천하제일인일세. 여포도 때려잡은 자가 난전 중 칼에 맞고 죽었다면 누가 믿겠나?”
“천사도가 마초에게 원한이 있지 않습니까. 천사도의 잔당이 복수했다고 꾸미면 앞뒤가 맞겠지요.”
“이런, 이런.”
우길은 입에 술을 한 잔 털어 넣었다. 뒤이어 안주도 한 점 입으로 가져갔다. 팽려택에서 잡은 농어를 먼저 기름에 튀긴 후, 쪄낸 요리였다.
우적. 우적.
안주를 씹는 동안 우길은 답변을 생각했다. 그리고 농어 살을 목구멍으로 넘긴 후, 입을 열었다.
“대가는 아주 톡톡히 받아야겠군.”
“그러시지요. 앞으로 강동 땅에 원시천존을 섬기는 나라가 세워질 겁니다.”
“기대하고 있겠네, 주랑. 만약 그 약속을 어겼을 때는…….”
“마초조차 불귀의 객으로 만들 수 있는 태평도의 칼날이 이 주유를 향하겠지요. 잘 알았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우길은 히죽거리며 연신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음식과 술이 다 떨어졌을 때, 우길은 다시 유학자 고대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고대는 주유에게 공손하게 읍을 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주유는 잠시 적막한 정자에 머무르며 공후를 연주했다. 이번에는 서역의 곡조였다. 서양의 하프와 똑같이 생겨서 서역에서 전래된 것이라 여겨지는 악기에서 아름답고 힘 있는 선율이 흘렀다.
“피리와 칠현금의 명인인 것은 알고 있었는데, 공후에도 능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주유가 연주를 마무리했을 때, 부하 장수 하나가 정자로 올라왔다. 주유는 부하 장수를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사실 가장 자신 있는 건 노래지. 문향(서성의 자)에게서 또 소식이 왔느냐?”
“그렇습니다. 마초가 장사에 열흘이 넘게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자명, 네 생각은 어떠냐?”
주유는 자신의 앞에 선 여몽을 바라봤다.
3년 전, 진 전투에서 마가군에 대패하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온 여몽은 더 이상 앳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아직 20대 중반의 젊은이였지만 얼굴에 난 깊은 칼자국과 덥수룩하게 기른 수염이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마초는 황조를 암살하려는 우리의 계획을 눈치챘습니다. 그럼에도 장사에 오래 머무른다는 건, 이번 싸움에서 묵가 제자들의 편을 들 생각일 것입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
“장군.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주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팽려택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강동 호족들이 주공을 인정하지 않았다.”
손책이 죽은 후, 강동군을 물려받은 것은 작은 아우 손익이다. 큰 아우 손권은 진 전투에서 패하고 볼모로 잡혀 장안에 체류하고 있었다.
손익은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젊은이일 뿐이다. 손책의 생전에도 간신히 누르고 있던 강동 호족들이다.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는 손익을 인정할 리 만무했다.
여몽은 그런 주유를 보며 물었다.
“때를 기다리는 것도 좋지만, 그동안 마초가 중원을 제패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그때가 되면 복수는 더 힘들어질 것입니다. 차라리 황조를 포기하고, 지금 태평도와 함께 총력을 기울여 마초를 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주유는 여몽을 바라보며 웃었다. 벌써 수백 번이나 봤지만, 볼 때마다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자명, 너는 태평도가 성공할 것이라 보느냐.”
“셈하기 어렵습니다.”
“나 또한 그렇다. 태평도가 마초를 제거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 허나 태평도가 실패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나쁠 것이 없다. 태평도 또한 언젠가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더냐.”
“으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적당한 때가 오면 내 손으로 마초를 잡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자신감이다.
그러나 여몽은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 비친 주유는 천하제일의 병법가였다. 주유가 장강을 무대로 싸움을 벌이면 적이 열 배든, 스무 배든 격파할 수 있을 것이다.
여몽은 주유를 보며 군례를 올렸다.
“장군의 뜻을 알겠습니다. 하지만 기왕이면 태평도가 성공해서 일찌감치 마초의 목을 취하는 것이 좋으니, 우리의 개입이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태평도에 도움을 주겠습니다.”
“그렇게 하여라. 나 또한 태평도가 성공하기를 바란다. 만약 실패한다면…….”
장강을 다 태워야 할 테니까.
주유는 뒷말을 속으로 삼키고 팽려택을 내려다봤다. 바다처럼 거대한 팽려택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수면 밑에서는 장강의 뒷 물살이 거세게 앞 물살을 밀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