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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마초연의-217화 (217/306)

217화. 와룡 (2)

마초와 제갈량은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의 대화를 남들이 들을 수 없는 외딴곳이었다.

제갈량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서원직은 잘 있습니까?”

제갈량은 대장군부에서 일하는 친구 서서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마초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주 잘 있네. 나는 그를 훗날 크게 쓰고자 하는데, 같이 공부해 본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능히 국가의 동량이 될 만한 인물입니다.”

“어째서인가?”

마초가 묻자 제갈량은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좋은 방안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토론을 해야 하지요.”

“맞는 말일세.”

“그런데 토론을 제대로 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의견과 의견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게 되기 쉽지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토론을 피하는데, 서원직은 다릅니다. 그는 토론을 중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토론 과정의 감정 대립에 미혹되지 않습니다. 대장군께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그를 가까이 두시면, 그는 반드시 토론을 통해 가장 좋은 해결책을 찾아내서 올릴 것입니다.”

원래의 역사에서, 촉한의 승상이 된 제갈량은 ‘서원직의 십 분의 일만 따라간다면 나 또한 잘못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서서에 대한 그의 높은 평가는 단순한 우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둘 사이의 내막을 아는 마초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려서부터 제갈량과 방통이 싸우는 것을 말리다 보니 토론의 기술이 늘었다고 했었지.’

서서에게 듣기로, 어린 제갈량은 고집이 세고 의견 충돌을 피하지 않는 소년이었다고 했다. 훗날 명재상이자 인격자로 알려지게 되는 제갈량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였다.

“잘 알겠네. 그런데 그대가 어째서 이 전쟁터에 있는 것인가.”

제갈량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집안은 본래 서주의 사족이었다. 그러다 조조의 서주 침공으로 고향이 잿더미가 되자 형주로 피난을 온다. 형 제갈근은 일찌감치 강동군으로 출사했고, 두 누이는 각각 형주 호족과 혼인했으니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이 없었다. 이제 그 뛰어난 머리를 살려 아무 데나 출사하기만 하면 고속 승진은 불을 보듯 뻔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 속의 제갈량은 20대 후반이 되도록 출사하지 않았다. 학자나 문장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저 직접 밭을 갈며 시골 선비로 살았을 뿐이다. 마치 초야에 묻혀 살다 죽을 사람처럼 세월을 흘려보내던 그는, 홀연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진 유비군에 출사한다.

그는 어째서 젊은 시절을 그렇게 보냈을까.

잠시 날카로운 눈으로 먼 산을 바라보던 제갈량이 대답했다.

“곽씨 형제와 거래를 했습니다.”

“거래?”

“저는 곽씨 형제가 장사로 돈을 벌 수 있게 돕고, 곽씨 형제는 제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는 거래입니다.”

“그래서 만두를 만들어 줬나. 그런데, 그대는 곽씨 형제에게 뭘 원했나?”

“전쟁터를 보고자 했습니다.”

“전쟁터?”

“혼자 병법을 공부해서 나름 깊게 이치를 통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전장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전쟁을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만두를 만들어 준 것도, 쇠뇌를 개량해 준 것도 다 전쟁터를 참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다 죽을 수도 있네.”

“하지만 살아남으면, 누구보다 전장을 깊이 이해하는 군사(軍師)가 되겠지요.”

제대로 된 군사가 되려면 병법만 공부해서는 안 된다. 전장의 경험을 쌓아야 한다. 그러니 제갈량의 말은 일견 타당한 말이다.

하지만, 전쟁을 보겠다고 관직도 없는 몸으로 전쟁터에 직접 찾아 들어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그렇게까지 병법을 연마하려는 이유가 뭔가.”

“하하하.”

제갈량은 웃음을 지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뭔가 쓸쓸한 웃음이었다.

“화가 많아서 그런가 봅니다.”

“화라니?”

“가슴에 화가 많이 쌓여 있습니다. 누구하고든 싸우고 싶더군요. 마침 황조가 유경승의 사주를 받고 묵가 제자들과 장사 사람들을 다 죽이려 하니, 이만큼 좋은 싸움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묵가 제자들을 도와줬습니다. 여기서 죽으면 더는 화가 날 일이 없을 것이고, 혹여 살아남으면 병법을 깊이 체득할 테니 어느 쪽이든 좋지 않습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위험을 감수하는 건가?”

“대장군이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위험을 감수해 오지 않았습니까.”

제갈량은 태연했다.

마초는 잠시 그런 그를 보다 말했다.

“무엇에 그렇게 화가 났나.”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습니다.”

제갈량은 먼 산을 바라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의 고향, 서주 낭야군은 조조의 침공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조조군의 대학살로 죽은 이들의 시체가 계곡을 막아 강이 흐르지 않을 정도였다.

서주의 참혹한 광경, 형과 누이들의 얼굴에 떠오른 죽음의 공포, 코끝을 찌르던 지독한 냄새. 형주로 피난 와서 자리 잡은 후에도, 이날의 기억은 끈질기게 제갈량을 괴롭혔다.

그때부터 복수를 다짐했다. 어린 나이에도 자신의 두뇌가 특출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병법을 익혀 최고의 군사가 되면 조조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병법 공부에 몰두했다.

병서를 다 떼는 건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남은 시간은 살아 있는 지식을 얻기 위해 보냈다. 직접 밭을 갈며 둔전의 기술을 익혔다. 대장간을 기웃거리며 무기 제작 기술도 배웠다. 목공도, 요리도 그런 식으로 배웠다. 사서나 경서도 남들만큼은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는 학문보다 기술에 관심이 더 많았다.

“그러다 알게 된 양양의 대장장이들 중에 묵가 제자가 있었습니다. 묵자는 그 자신이 뛰어난 기술자였으니, 뭔가 숨어 있는 비전이 있을까 하여 묵가 제자들과 교류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막상 비전이란 것들을 보니, 너무 구닥다리라 별로 쓸모가 없더군요.”

제갈량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마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혹시 묵가에 몸을 담기로 한 것은 아닌가.”

“그 생각도 해 봤습니다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더군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살라니, 저에게는 무리입니다.”

제갈량은 말을 이었다.

원래는 공부를 위해 수경장에 드나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진도가 너무 빠른 탓에 이내 흥미를 잃었다. 그렇게 기술만 배우며 겉돌던 찰나, 수경장에 한 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모든 게 제갈량과 반대였다. 피난민 출신인 제갈량과 달리 나름대로 형주에 기반이 있는 호족 출신이었다. 훤칠한 키에 미남인 제갈량과 달리 볼품없는 체구에 지독한 추남이었다. 어딘지 주의가 산만한 태도로 인해 남에게 호감을 주지 못하는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런 볼품없는 껍데기 안에 천재가 들어 있었다. 유일하게 제갈량과 토론이 가능한, 서로 가르침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방통이었다.

경쟁하듯 학문을 닦던 제갈량과 방통은 이내 서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이렇게 공부를 해서 무엇에 쓴다는 말인가?”

후한이 제대로 된 나라 구실을 못 하게 된 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한은 썩어서 되살릴 수 없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거기에 있었다.

전란이 끝나고 조정이 권위를 회복하면? 그때는 또다시 환관과 외척의 전횡이 시작될 것이다. 부패한 한 조정의 문화가 바뀌지 않는다면 이름만 바뀐 또 다른 십상시가 나타날 것이다.

만약 군웅 중의 누군가가 그런 한을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다면? 그때는 호족의 나라가 세워질 것이다. 호족들의 협력 없이는 새 왕조를 세울 수 없다. 그리고 새 왕조에서 통제받지 않는 호족들은 계속 자신의 땅을 늘려 갈 것이다.

세상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제갈량과 방통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제 친구 방사원(사원은 방통의 자)은 답을 찾아보겠다며 천하를 유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보시다시피 대장장이나 목수들과 어울려 남의 전쟁에 종군하고 있지요.”

제갈량은 스스로의 꼴이 웃기는지 피식 웃었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초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고민한다고 당장 답이 나올 만한 문제는 아니군.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고민만 하는 것도 옳은 태도는 아닐세. 일단 출사해서 관직 생활을 하며 답을 찾아보는 건 어떤가.”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직은 출사할 생각이 없습니다.”

제갈량은 단호했다.

“장사는 이 난세의 축소판입니다. 이제 곧 황조가 쳐들어옵니다. 그의 뒤에는 인의의 가면을 쓴 유표가 있습니다. 제 고향 서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장사에서도 힘없는 사람들이 죽어서 그 시체로 강물이 막힐 것입니다.”

“공명(제갈량의 자).”

마초는 옛 동료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가 고안해서 만들고 있는 원융노는 실로 기발한 병기일세. 그러나 아직 완성된 기술이 아니야. 그런 걸로 전쟁의 승패를 바꿀 수는 없네.”

“알고 있습니다.”

“그대에게는 관직도 없고, 세력도 없네. 그대가 이 전쟁터에 남는다고 뭘 할 수 있겠나?”

“도망치지 않을 수 있겠지요. 이번에는 그때처럼 도망치지 않을 것입니다.”

마초는 가만히 청년 제갈량의 얼굴을 응시했다.

썩 잘생긴 얼굴이었다. 지금은 허름한 노동자의 복색을 하고 있지만, 학창의에 갈건을 쓰면 영락없이 단정한 선비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잘생긴 외모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눈 때문이었다.

청년 제갈량은 눈매가 사나웠다. 고향을 잃은 슬픔과 난세에 대한 분노를 눈동자 안에 간신히 갈무리하고 있었다. 마초에게는 아직 현실을 받아들일 만큼 성숙하지 못한 이상주의자가 보였다.

마초는 미숙한 시절의 옛 동료를 보며 웃었다.

“젊은이다운 패기는 좋군. 하지만 공명, 세상은 젊은이가 결기를 부린다고 바뀌지 않네.”

“그것도 잘 알고…….”

“이렇게 하세.”

마초는 제갈량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끊었다.

“내가 장사 사람들을 살려 주지. 그 대신, 싸움이 끝나면 조정에 출사하도록 하게.”

제갈량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공명, 그대는 죽을 사람들을 살릴 힘이 없어. 하지만 나는 한의 대장군이다. 내가 힘을 써 보겠다는 것이다.”

“그 대가로… 저보고 대장군의 수하가 되라는 것입니까?”

“대체 뭘 들었나? 내 수하가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줄 알아? 그냥 중앙 조정에 출사해서 관직 생활을 하라는 말이다.”

마초는 그렇게 말하고 빙글빙글 웃었다.

원래의 역사에서 제갈량이 출사하는 것은 207년. 지금으로부터 6년 뒤의 일이다. 21세의 제갈량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군. 하지만 이 녀석의 잠재력을 생각하면 이대로 둘 수는 없지.’

그러니 일단 아무 관직이나 하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면 제갈량은 어떤 자리에서도 반드시 두각을 나타낼 것이다.

게다가 다른 문제도 있었다. 마가군에는 이미 뛰어난 책사들이 많다. 아무것도 보여준 것이 없는 제갈량을 바로 최측근으로 삼으면 조직이 흔들릴 것이다. 그러니 일단 대장군부나 관서대도독부가 아닌 조정에 두고, 거기서 탁월한 성과를 내면 측근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어쩌면 굳이 마가군의 일원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이다. 중립적인 자리에서 친 마가군 성향의 고관이 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으니. 어차피 조조의 편에는 절대 서지 않을 인물이다.’

제갈량은 마초를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대장군의 권세가 얼마나 강한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전쟁에 개입할 만한 입장이 아닐 텐데요. 게다가 이 장사 땅은 한 번 싸움에서 이긴다고 안전해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유 형주와 황조가 끊임없이 이 땅을 노릴 겁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다. 그대는 살아남는 것만 신경 쓰도록 하라.”

덥고 습한 날이었다. 마초는 부채를 부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제갈량을 향해 들고 있던 부채를 던졌다.

“곧 낙양에서 다시 보게 되겠군. 그 부채는 낙양에 오면 다시 돌려주게.”

제갈량은 마초가 주고 간 부채를 내려다봤다. 학의 흰 깃털을 촘촘하게 꽂아 만든 근사한 백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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