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와룡 (1)
마초가 장선과의 회담을 마친 다음 날.
마초 일행은 장사군까지 달려온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고 있었다.
“주공! 가 선생! 감 장군! 그리고… 비 별가?”
“아, 오랜만에 뵙습니다. 비서랑 나관중 선생이시지요?”
비관과 나관중이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비슷한 또래에 익주 내전까지 같이 치른 두 사람이지만 뭔가 잘 맞지 않는지 계속 사이가 어색했다.
그 모습을 본 마초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비서랑이 말을 잘 타니 빨리 올 줄은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빨리 도착했군. 혼례를 얼마 만에 끝내고 달려온 거야?”
“주공이 떠나시고 스무날 만에 해치웠습니다. 기껏 양양까지 달려와 보니 강하로 가셨다고 해서 다시 강하로 달렸지요. 그런데 또 강하로 가는 길에서 이감 장군이 보낸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부리나케 장사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채염과의 신혼 생활도 미뤄 두고 혼례를 치르자마자 형주로 달려온 나관중이다. 나관중은 창검술이나 궁술은 전혀 못 하지만 말은 잘 탔다. 게다가 그를 수행한 것은 삼십여 기의 강족 기병들이니, 통상적으로는 불가능한 속도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관중을 수행해서 온 강족 기병대 대장의 행색이 뭔가 이상했다. 변발이나 삭발 대신, 길게 기른 머리를 상투로 묶은 모습이 영락없는 한인이었다.
“월길, 그 꼴은 뭐냐?”
“으하하! 한에 가면 한의 법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 전에 한 조정에서 편장군 벼슬까지 받았으니 이제부터 반은 한인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한인들은 저처럼 모발이 풍성한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고 하니 기분도 좋고 말입니다.”
“머리숱 자랑하려고 상투 트는 강족이라니,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이러다 이름까지 한인 이름으로 바꾸는 거 아니냐?”
“아, 그것도 이미 지어 뒀습니다. 주공의 마씨 성을 따라서 마완이라고 하고, 자는…….”
“아니 자까지 있어?”
마초는 신이 나서 떠드는 월길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월길이 가후, 감녕, 비관, 서서 등에게 둘러싸여 한참 상투 자랑을 하는 사이, 마초는 나관중과 함께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논의했다.
“설마 풍칙의 정체가 강동군의 서성일 줄은 몰랐군요. 게다가 황조를 암살하기 위해 잠입해 있다니… 주공, 그런데 이 상황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요? 이 먼 형주 땅에서 남의 전쟁에 개입하기는 곤란하지 않습니까.”
“일단 장사를 둘러보고 결정하자고. 묵가의 인물인 장선이 이 땅을 어떻게 다스렸는지 궁금하지 않나.”
* * *
이틀 후.
마초와 나관중은 장사성의 북문을 찾았다. 북문 쪽에는 성벽 보수 공사가 한창이었다. 두 사람은 공사 현장이 잘 보이는 적당한 그늘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남방은 엄청나게 덥구만. 게다가 습하기까지 하니 정말 최악인걸.”
마초는 더위를 쫓기 위해 연신 큼지막한 부채를 부쳤다. 학의 흰 깃을 뽑아서 만든 큼직한 깃털부채, 백우선(白羽扇)이었다. 이걸 쓰면 위엄이 살아날 것이라며 나관중이 만들어 준 물건인데, 겉보기에는 그럴듯하지만 무겁기만 하고 실용성이 없었다.
“그래도 백우선을 들고 계시니 비바람을 마음대로 부리실 것 같습니다.”
“사람이 깃털부채 좀 들었다고 어떻게 비바람을 부리나. 부채는 그냥 시원한 게 최고지. 에이, 그냥 파초 잎이나 들고 올걸.”
계속 투덜대는 마초를 뒤로하고 나관중은 성벽 보수 공사를 하고 있는 인부들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금 인부들을 지휘하는 두 청년이 바로 곽독과 곽준 형제라고 하셨지요?”
“그래. 얼마 전 장사에 도착해서 바로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더군.”
“둘 다 범상치 않은 인물인가 봅니다.”
“내가 양양에서 만나 보니, 특히 아우인 곽준은 상당히 탐이 나더군. 내 휘하로 끌어들이면 좋겠는데.”
두 사람은 그렇게 말하며 곽씨 형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잠시 후, 쉬는 시간이 되자 곽씨 형제가 마초를 찾아왔다.
“대장군을 뵙습니다.”
“그날 주고 가신 유리잔 덕분에 전쟁 준비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마초는 그 말을 듣자 피식 웃었다.
“유리잔을 처분하는 데 성공했나 보군. 한두 푼이 아니었을 텐데.”
“아시다시피 저희는 묵가의 사람입니다. 같은 묵가 제자 중 부잣집에 연이 닿아 있는 인물이 있어서 다행히 처분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인물이 혹시 여인인가?”
마초가 묻자 곽독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곽준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다 아는 수가 있지. 양양에 유리잔을 사들일 만한 부자는 몇 명 안 되지. 그런데 지난번 자네들은 황승언의 집안에 연줄이 있어서 정보를 얻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아마 채가나 괴가가 아니라 황가에 처분했을 것이라 봤네.”
“하… 맞습니다. 그런데 여인인 것은 어찌 아셨습니까?”
“일개 청지기나 식객 정도의 인물이 그런 비싼 유리잔을 처분할 수 있겠나. 아마 황승언의 가족이겠지. 그런데 황승언에게는 가족이 한 명뿐이야. 용모가 추해서 시집을 못 가고 있다는 막내딸.”
“으음…….”
“대호족의 딸을 묵가 제자로 끌어들이다니, 재주도 좋군.”
마초는 씩 웃으며 주변을 돌아봤다. 마초와 나관중을 따라온 군사들 몇몇이 손수레를 끌고 왔다.
“이건 뭡니까?”
“꿀물. 한 잔씩 마시고 일하게.”
손수레에는 귀한 꿀물이 든 독들이 실려 있었다. 곽씨 형제와 함께 일하는 인부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잘 먹겠습니다, 공자! 아니, 어르신!”
마초는 인부들에게 손을 들어 답례했다. 왁자하게 떠들며 꿀물을 마시는 인부들을 보고 나관중이 말했다.
“다들 표정이 밝습니다. 여윈 자도 보이지 않고요. 참으로 평화로운 고을입니다.”
“그래. 장사태수 장선이 어지간히 선정을 베풀었나 보군.”
장사태수 장선이 묵가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마초는 이감을 시켜 장선의 뒷조사를 하게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었지. 완전히 깨끗하다. 게다가 장사군을 잘 다스려서 이 난세에도 굶는 자가 없다고 들었다.’
장선은 유가의 기준으로 봐도 충분히 훌륭한 선비였다. 아마도 묵자 또한 제자들이 장선처럼 살기를 바랐을 것이다.
꿀물을 마시며 휴식을 만끽하는 인부들을 대신해, 곽씨 형제가 마초와 나관중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대장군께 감사드립니다. 역시 저희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나를 두고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그러나.”
“대장군은 조조나 원소 같은 군웅들과는 다릅니다. 대장군께서는 항상 약자의 편에 섰고, 항상 전쟁을 빨리 끝내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움직이셨지요. 묵자가 살아나서 오늘날의 모습을 보신다면 대장군을 성인이라 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마초는 기가 막혔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관중이 잔잔히 웃었다.
“주공께서는 천하제일의 영웅이니까요. 돌아가신 이공자도 기뻐하실 겁니다.”
꼭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보니 약자의 편에 서게 되었고, 관중의 대기근을 극복해 아버지 마등의 세력을 키우려다 보니 죽을 사람들을 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죽은 마휴의 뜻을 따르다 보니 어느덧 여기저기서 마초를 영웅이라 칭송하게 되었다.
“그런가. 지난 생에는 패륜아 소리만 실컷 들었는데, 그때와 비하면 나도 출세했군.”
마초는 피식 웃어 버렸다.
‘순수한 녀석들이군. 하긴 그러니까 묵가 사상에 빠져 있겠지.’
묵가 제자들에게 성인이라고 불리는 건 기분 좋은 일이지만, 실제로 마초가 성인이 되겠다거나 하는 한가로운 생각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니었다. 전쟁이나 권력투쟁에서 이기는 것이 최우선 목표이고, 명성 같은 건 부차적으로 딸려 오는 것이다.
묵가 제자들에게 군자금을 지원한 것도 사실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다.
‘묵가에는 비전(秘傳)의 병법이 있을 것이다. 묵자 자신도 성을 지키는 것에 뛰어난 병법가였고, 기계장치에도 일가견이 있다 했으니까. 장사태수 장선이 여러 번 유표군의 공격을 막아낸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래서 마초는 묵가의 비전 병법을 견식하고, 쓸 만한 게 있으면 마가군에 도입하려 했다. 그런데 며칠간 장사의 전쟁 준비 태세를 둘러보며 느낀 비전의 실체는 마초의 생각과 영 딴판이었다.
“비전이 있기는 있는데, 너무 구닥다리야.”
묵자는 시대를 앞서간 병법가였다. 문제는 묵자가 살던 때로부터 시대가 400년이 넘게 흘렀다는 것이다.
나관중이 말을 받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전국시대에 고안한 것이라고 믿기 힘든 기발한 수성 병기들이 있기는 한데, 우리 마가군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더군요.”
“그래. 사실 자네가 만드는 천 년 후의 물건들이 훨씬 도움이 되지.”
“그런 대단치 않은 비전으로 어떻게 유표군의 침공을 여러 번 격퇴할 수 있었을까요?”
“나는 그게 묵가에 비전으로 내려오는 무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무기 때문이 아니라 정신력 때문에 선전했던 것 같네. 장선을 돕는 묵가 제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을 테고, 징집된 농민병들도 선정을 베푸는 태수에게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을 테니까.”
이대로라면 묵가에 지원한 군자금은 별다른 소득 없이 소모될 것이다. 마초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곽씨 형제에게 다가가 말했다.
“자네들이 내 돈으로 무장을 했으니, 나에게도 도움을 하나 줘야겠네. 어떤 병기를 만들었는지 소상히 알려주게.”
“병기 말입니까?”
“그래. 묵가에 내려오는 비전의 병기들 말이야. 내가 한 번 둘러봤는데 특별한 것들이 없더군. 자네들이 직접 가서 가장 내밀한 것까지 보여주게.”
“하하, 그 정도는 해 드리지요.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군자금을 지원해 주셨으니.”
곽준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대장간으로 마초를 안내하기로 했다. 마초가 이미 돌아본 곳들을 제외하자 한 곳이 남았다.
“대장군께서 가장 중요한 곳을 둘러보지 않으셨군요.”
“가장 중요한 곳?”
“그렇습니다. 대장군께서 바라시는 것이 이곳에 있을 겁니다.”
곽준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 * *
곽준이 마초를 데리고 간 곳은 성내의 어느 대장간이었다.
“우리 묵가에는 비전이 많이 내려옵니다. 지금 봐도 신묘한 기계장치 같은 것들이 많이 있지요.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어두운 방에 상자를 놓고 작은 구멍을 뚫어 빛을 통과시키면 반대쪽 벽면에 외부의 풍경이 거꾸로 보이는데…….”
“됐네. 난 그런 것보다 당장 쓸 수 있는 무기가 궁금하다고. 그나저나 엄청나게 덥군.”
남형주의 여름 날씨는 덥고 습하다. 심지어 이곳은 불을 다루는 대장간이다. 마초는 나관중이 만들어 준 백우선을 계속 부치며 더위를 쫓으려 했다.
남방 사람인 곽준은 더위가 익숙한지 별 반응 없이 마초를 보며 말했다.
“대장군께서 원하시는 무기도 이곳에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깡. 깡. 깡.
곽준이 안내한 대장간 안에서는 여러 명의 대장장이들이 연신 망치질하며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마초는 그들이 무엇을 만드는지 유심히 살폈다. 쇠뇌의 틀, 그리고 쇠뇌살의 촉이었다. 그런데 보통 쇠뇌와는 모양이 달랐다.
‘엄청나게 큰 쇠뇌다.’
대장장이들의 옆에는 목수들이 있었다. 한 무리의 목수들은 나무로 만든 쇠뇌살에 철촉을 이어 붙이고 있었고, 또 한 무리는 거대한 쇠뇌를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 거대한 쇠뇌를 보자 마초의 눈빛이 변했다.
“이건… 원융노(元戎弩)가 아닌가.”
한 번에 여러 발의 살을 동시에 발사할 수 있는 쇠뇌.
이 무기를 활용하면 정확한 조준이 없어도 공간을 제압할 수 있다. 현대의 산탄총과 같은 역할을 하는 무기였다.
마초는 지난 생에서 원융노의 시제품을 본 적이 있다. 수명이 다하기 직전, 승상 제갈량이 원융노를 만들고 있는 것을 봤던 것이다.
곽준이 말했다.
“묵가의 비전은 지금 시대에는 너무 낡았습니다. 하지만 묵자께서 남기신 저술을 가지고 공부한 사람이 있어서 이런 무기를 만들 수 있었지요. 대장군께서 지원해 주신 자금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 무기를 설계한 사람이 누군가?”
“제가 일전에 소개시켜 주려던 선비를 기억하십니까? 형주 땅에 관중과 악의에 비할 만한 젊은 선비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곽준은 그렇게 말하고 대장간의 한쪽 구석으로 가서 한 사람을 불렀다.
“선생! 나와 보십시오.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잠시 후.
선생이라 불린 사내가 곽준과 함께 마초의 앞으로 다가갔다.
마초보다도 대여섯 살 아래로 보이는, 갓 스물을 넘긴 아주 젊은 청년이었다. 그는 일꾼들 틈에 섞여 웃통을 벗고 쇠뇌를 깎고 있었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지만 일어서니 무척 키가 컸다.
“누구십니까?”
선생은 땀투성이인 상체에 겉옷을 걸치며 마초에게 물었다.
옷깃 사이로 드러난 상체는 단단한 근육질이었다. 대장간의 열기로 상기된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눈매는 마치 무장들의 그것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마초가 지난 생에서부터 아주 잘 알던 사람이었다.
‘이게 얼마 만인가. 그런데…….’
마초가 선생을 만난 것은 마흔 살 무렵의 일이다. 청년 시절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와는 인상이 많이 다르군.”
“예?”
“아무것도 아닐세. 곽씨 형제가 선생이라 모시는 자가 그대인가.”
마초는 피식 웃어 버렸다. 날카로운 인상의 선생은 그런 마초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시냐고 물었습니다.”
“이, 이분은…….”
더듬거리는 말투로 나관중이 끼어들어 마초 대신 대답했다.
“하, 한의 대장군이며, 양양후시고, 그, 근황부도독이신…….”
뜻하지 않은 곳에서 평생 흠모해 온 우상을 만난 탓일까? 나관중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얼굴이 흙빛이 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말도 더듬게 되었다.
“마초다.”
말이 길어지자 마초는 짧게 대답했다.
선생은 마초의 이름을 듣자 손을 들어 예를 표했다.
“제갈량입니다. 이번 전쟁을 준비하는 데 대장군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들었습니다.”
“그래. 그러니 그대도 내게 도움을 하나 줘야겠어.”
청년 제갈량은 날카로운 눈으로 마초를 응시했다.
마초가 말했다.
“나와 이야기를 좀 하세. 그대가 어찌 된 영문으로, 여기서 묵가 제자들을 돕고 있는지 들어야겠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