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215화 (215/306)

215화. 겸애(兼愛)

형주 장사군.

장사태수 장선은 자신을 찾아온 손님을 맞고 있었다.

“가 상서께서 이 궁벽한 곳까지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장선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가후는 여윈 얼굴에 잔잔한 웃음을 띠며 답했다.

“저는 이제 조정의 상서가 아니라 대장군부의 종사중랑일 뿐입니다. 대장군께서는 천하 곳곳에서 현인들을 구하고 있는데, 이 형남 4군에도 유망한 젊은이들이 많으니 마땅히 방문해야지요.”

가후는 장선에게 서신을 보내 인근 고을의 젊은이들을 초청하도록 요청했다. 오늘은 이들 중 옥석을 가려 대장군부로 데려갈 만한 인물들을 고를 셈이었다.

장선이 가후를 보며 말했다.

“말씀하신 것처럼 형남 4군에도 학문에 힘쓰는 젊은이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형남 4군이 유 형주와 반목하면서 중앙 정계는커녕 형주목부로 진출할 길도 막힌 상태지요.”

“마 대장군께서 태학에 인재를 추천받기도 했고, 조 승상께서도 널리 인재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형남 4군의 젊은이들은 낙양에서 볼 수가 없더군요.”

“얘기는 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유 형주가 북쪽 길을 가로막고 있으니 중앙으로 진출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마침 오늘 가 상서께서 인재를 찾기 위해 오셨으니 이곳 젊은이들에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가후는 그렇게 말하는 장선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곧 전쟁을 치를 사람 같지 않은 평온한 얼굴이군.’

오는 길에 장선의 평판을 조사해 보니 대단히 좋았다. 백성들에게는 선정을 베풀고, 귀족 사회에서도 존경받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도 아무 사심 없이 젊은 선비들을 추천하는 듯했다.

‘그런데 낯빛이 좋지 않군.’

장선의 나이는 이제 50대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얼굴이 누렇게 떠서 병색이 완연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가후는 자신의 옆에 있는 인물을 돌아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원직이 보기에는 어떤가?”

“큰 전쟁을 앞둔 사람 같지 않게 평온하군요. 어쩌면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생각도 자네와 같네.”

날카로운 눈빛을 한 종사 서서가 대답하자 가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가후와 서서의 뒤에 있던 호위무사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가후와 서서에 의해 형남 4군 젊은이들에 대한 일종의 면접이 시작되었다. 15,6 세의 소년도 있었고 혼례까지 마친 20여 세의 젊은이들도 있었다.

가후가 절반, 서서가 절반을 맡아 하루 종일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저 피상적인 지식을 가진 인물도 있었고, 깊이 있는 식견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해가 질 무렵, 가후와 서서는 각각 합격자들을 추려낸 후 다시 만났다.

“나는 스무 명 중 여섯 명을 데려가기로 했네. 원직, 자네는 어떤가?”

“스무 명 중 세 명입니다. 형북에 비해 형남 젊은이들의 학식이 뛰어나지는 않군요.”

“엄격하구만. 학식 면에서는 나도 아쉬움이 있지만,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니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했네. 일단 대장군을 따르는 선비가 많이 있으면 그들 중 인물도 나오지 않겠나.”

“그 또한 맞는 말씀입니다. 허나 관리를 선발할 때는 사례나 하북에서 인재를 뽑을 때와 똑같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으면 대장군부의 기강이 바로 서지 않을 것입니다.”

“허허, 자네의 말도 맞네.”

가후와 서서는 그렇게 아홉 명의 젊은이를 대장군부로 데려가기로 했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명단을 보며 특정한 두 사람의 이름이 있는지 확인했다. 마초가 반드시 데려와야 한다고 했었던 이름들이었다.

“둘 중 장완이라는 청년은 내 쪽에 있었네.”

“어땠습니까?”

“오늘 대화한 젊은이들 중 최고의 인물이었네. 그릇이 크고 대담하면서 학문에 밝으니 훗날 나라의 동량으로 크게 쓰일 걸세. 능히 삼공을 맡길 만한 인물이네.”

장완은 마초와 지난 생에서 면식이 있었다. 삼국지의 2세대들 중 손꼽힐 만한 인물로, 원래의 역사에서는 제갈량의 뒤를 이어 촉한의 재상이 된다.

가후의 말을 들은 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장군의 안목은 틀리지 않는군요.”

“그런가. 다른 한 명은 자네 쪽에 있었나 보군.”

“그렇습니다. 영릉의 유파라는 소년이었습니다.”

“유파는 어떻던가?”

“사람됨이 옹졸하고 자존심이 지나치게 강합니다. 아마 여러 사람을 움직여야 하는 일은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관자(管子)의 가르침에 정통해 있습니다. 이미 그 수준이 조정의 중신들 이상이며, 나라를 부유하게 만드는 것에는 천하의 기재라고 할 만합니다. 쓰기는 까다롭지만, 잘만 쓴다면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고 나라의 곳간을 채울 만한 인물입니다.”

유파 또한 마초가 지난 생부터 알던 인물이다. 유비의 휘하에서 촉한의 통화정책과 법률을 맡았던 전문 관료다. 그는 군부의 핵심 인물인 장비는 물론 주군인 유비와도 반목할 정도로 성격이 모난 인물이었으나, 그런 성격을 감수하고 유비가 중용할 만큼 관료로서는 빼어난 능력을 보였다.

장완과 유파. 화려한 책략전을 펼쳤던 삼국지 초기의 인물들에 비해 인지도는 낮지만, 사실 관료로서의 업적은 가후나 서서를 오히려 상회하는 인물들이다.

“이 두 사람은 훗날 대장군께 큰 힘이 되겠군.”

“저 또한 그리 생각합니다.”

가후와 서서는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따라왔던 호위무사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호위무사가 어디로 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장사태수 장선을 만나고 있겠지요.”

* * *

장사태수의 치소.

장선은 가후의 호위무사인 줄 알았던 청년이 꺼내 놓은 징표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군의 인수와 천자의 임명장이었다. 호위무사의 정체를 알게 된 장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선이 마 대장군을 뵙습니다.”

장선은 마초를 향해 깊게 절을 올렸다. 마초도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남의 이목을 끌고 다녀서 좋을 일이 없기에 가 선생의 호위무사로 위장해서 들어왔소. 장 태수께서는 무례를 용서하시오.”

“대장군의 입장을 이해합니다. 아시겠지만 이곳 장사는 곧 전쟁터가 될 것입니다. 조정의 대장군이 이런 지역 군벌끼리의 전쟁에 휘말리면 입장이 난처하시겠지요.”

마초는 씩 웃으며 말했다.

“옳으신 말씀이오. 그런데 장 태수께서는 곧 전쟁을 치를 사람 같지 않게 평온하군.”

“제가 병이 들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의원의 말로는 올해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 하더군요. 50년이 넘게 살았으니 무슨 미련이 더 있겠습니까. 다만…….”

“다만 무엇이오?”

“형남 4군은 유 형주에게 10년간 저항해 왔습니다. 우리 장사군이 그 중심이 되었지요. 이 전쟁에서 패하면 장사에 피바람이 불까 그것이 걱정입니다.”

“황조가 학살을 벌일 것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런 일을 막으려면 이겨야겠군. 이길 자신은 있소?”

“글쎄요.”

장선은 마초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지금 전쟁 준비가 한창인데 시간이 모자랍니다. 대장군께서 정체를 드러내고 오래 머물러 주신다면, 능히 황조를 막을 만큼 준비를 갖출 수 있겠지요.”

“하하하, 이런. 장 태수는 나를 곤란하게 하시는군.”

마초는 크게 웃었다.

“나는 무예와 병법을 업으로 삼고 있으니 새롭고 기발한 병법에도 관심이 많소. 강하의 황조에게 듣기로 장 태수께서는 기이한 병법을 쓰신다더군.”

“약한 자의 입장에서 성을 지키기 위해 몇 가지 기책을 쓴 적이 있습니다. 대장군께서 유념하실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그러지 말고 알려주시오. 내가 나중에 병법서라도 남기면 후학에게 공부가 되지 않겠소? 황조군에 유출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실 필요 없소.”

“그저 서생이 궁여지책으로 썼던 계략들일 뿐입니다. 천하에서 군사를 가장 잘 부리시는 대장군께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보통의 관리라면 자신의 병법을 자랑하고 싶기 마련이다. 마초는 계속 장선이 썼던 병법을 물어봤지만, 장선은 이리저리 말을 돌리며 대답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마초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장사태수 장선의 정체는 역시 그것인가. 서성과 송겸에게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지만… 만약 이자가 그것이라면 앞뒤가 다 맞는다.’

그것.

400년 전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집단이다. 마초 또한 그것에 대해서는 소문만 들었을 뿐이다. 지난 생에서 촉한의 표기장군이었을 때는 곽준이 그것이라는 풍문이 돌았지만, 하도 허무맹랑한 말이기에 그저 뜬소문이려니 치부했었다.

‘그런데 곽씨 형제가 그것이라면, 그리고 곽씨 형제가 죽음을 각오하고 장선을 도우려는 이유도 장선이 그것이라 그런 거라면…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장선은 어째서 강대한 유표에게 항복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해 왔는가.

곽씨 형제는 어째서 죽음을 무릅쓰고 장선의 싸움을 도우려 하는가.

협객도, 상인도 아닌 곽씨 형제는 대체 자신들을 따르는 이들과 무엇으로 맺어져 있는가.

장선이 썼다는 기이한 병법의 정체는 무엇인가.

강동군의 서성과 송겸은 나름대로 이들의 정체를 추측하고 있었다. 마초는 그들의 추측을 확인하기 위해, 지나가는 듯 운을 띄웠다.

“장 태수께서는 운명을 믿으시오?”

“허허허, 운명이라. 글쎄요.”

“내 생각은 이렇소.”

마초는 장선의 눈을 쏘아보며 말했다.

“운명을 믿는 자들은, 위로는 왕과 대신들을 설득하여 정치를 어지럽히고(以上說王公大人), 아래로는 백성들이 생업에 종사하는 것을 가로막지(下以駔百姓之從事). 오직 어질지 못한 자들만이 운명을 고집할 뿐이오.”

“허허허, 이런.”

장선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마초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죽음을 무릅쓰고 약자의 편에 서서 강자와 싸운다? 특이한 병법을 써서 성을 지킨다? 설마 오늘날까지 그들의 명맥이 이어져 왔을 줄은 몰랐소.”

마초와 장선은 잠시 동안 말없이 마주 보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마초였다.

“400년 전 사라진 줄 알았던 묵가(墨家)가, 이 형주 땅에 살아남아 있었을 줄이야.”

마초가 인용한 글귀는 묵가의 책인 <묵자>의 비명편이었다.

춘추전국시대에 난립했던 제자백가 중, 끝내 살아남아서 사상적 패권을 쥔 것은 공자의 유가(儒家)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 끝에 건국된 한은 공자의 가르침을 따르는 철저한 유교 국가였다. 다만 민간에서는 노자와 장자의 도가(道家) 사상이 중국 고유의 샤머니즘과 결합된 도교가 흥하고 있었으며, 한비자의 법가(法家)와 손자의 병가(兵家)는 실용적인 지식으로서 연구가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묵자의 묵가만은 철저한 탄압으로 흔적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묵가는 모든 인간에 대한 차별 없는 사랑인 겸애(兼愛)를 주장하고, 과학기술과 노동의 가치를 강조하는 학파였다. 근대 중국의 어느 학자는 묵자를 두고 ‘작은 예수이며 큰 마르크스’라고 평했다. 묵자는 보편적인 인간애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예수에 비견되며,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현실화되기 어려운 이상주의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에 비견되기도 한다.

“그러나 유가의 충효(忠孝)란 결국 차별적인 사랑(別愛)을 전제로 하는 것. 유가의 입장에서는 절대 묵가와 공존할 수 없었겠지. 한이 그대들을 400년간 탄압했을 텐데 잘도 살아남았군.”

“사실 이렇다 할 탄압은 없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가 끝나기도 전에 간신히 명맥만 잇는 신세가 되었으니까요. 아무래도 지나치게 이상적인 사상 아닙니까? 여러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겠지요.”

장선은 그렇게 말하며 허허 웃었다. 마초도 그런 장선을 보며 씩 웃어버렸다.

“묵가는 성을 지키는 병법을 가지고 있어서 수성전에 뛰어났다고 하지. 옛날 묵자가 그랬듯이, 곽씨 형제도 약한 자의 편에 서서 강한 자의 침공을 막아내려는 건가.”

“참으로 기특한 젊은이들입니다. 그런데 대장군께서는 어찌하실 셈입니까?”

형남 4군의 지도자격인 장선. 그런 그가 묵가의 인물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주변의 모든 세력이 장선과 형남 4군에 등을 돌릴 것이다.

졸지에 마초가 묵가와 형남 4군의 생살여탈권을 쥐게 된 것이다.

마초는 푸른 눈을 빛내며 미소를 보였다.

“나는 당분간 장사 일대를 둘러보겠소. 그대와 이 형남4군에 도움을 줄지, 아니면 그냥 지나칠지는 그다음에 결정하겠소.”

“그 말씀은…….”

“그대가 이 땅을 어떻게 다스렸는지 보고 나서 결정하겠다는 말이오.”

마초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선은 불편한 몸으로 따라 일어나서 방을 나서는 마초에게 예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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