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풍칙의 정체
‘뭔가 이상하군.’
마초는 풍칙이라 이름을 밝힌 청년과 황조를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풍칙은 황조 휘하가 아니라 강동군의 인물이었다. 강동군이 황조를 공격했을 때 여몽의 휘하에서 병졸로 종군했었던 인물이다.
일개 병졸이었던 그의 이름이 알려진 이유는 하나.
‘황조의 목을 벤 자가 바로 풍칙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이 자가 황조의 휘하에 있는 거지?’
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초는 풍칙을 유심히 살폈다.
나이는 스무 살 남짓. 체격은 장료와 비슷한 정도의 보통 체격이다. 손을 유심히 살펴보니 분명히 오랫동안 무공을 단련한 자였다.
그런데 말씨가 형주 사람들과 약간 달랐다.
“풍 도위는 이곳 출신이 아닌가?”
“서주에서 왔습니다.”
“서주 어디 출신인가?”
“낭야(琅邪) 거현(莒縣)이 고향입니다. 몇 년 전 난리를 만나 강동으로 피했는데, 그곳도 정세가 혼란해져서 다시 황 태수께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낭야, 낭야라…….’
서주 낭야군은 제갈량의 출신지로 유명한 곳이다.
그리고 또 한 명, 서주 낭야군 출신 인물 중 굵직하게 이름을 남긴 인물이 있었다. 그는 강동군의 장수였다.
이 청년의 정체가 진짜 병졸 풍칙인가, 아니면 낭야군 출신의 강동군 장수인가? 마초는 생각에 잠겼다.
‘이자가 말하는 난리란 조맹덕이 벌인 학살을 의미할 것이다. 그 시기에 강동으로 피난해서 살다가, 손책이 죽으면서 강동의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형주로 이주했다는 건데…….’
이렇게만 보면 앞뒤가 다 맞는다. 그러나 마초는 뭔지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말씨나 몸가짐을 보면 어지간히 명망이 있던 호족 출신 같군. 이 자가 병졸 풍칙이라고 보기는 뭔가 이상하다. 실제로 지금도 황조의 눈에 들어 도위 벼슬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원래의 역사에서는 강동군에서 고작 병졸로 있었다고?’
뭔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마초는 풍칙이라는 청년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황조와 함께 자신의 옆에 앉게 한 뒤, 자연스럽게 화제를 병법에 대한 것으로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해박한 병법 지식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결국 전쟁은 속임수 아니겠나(兵者 詭道也). 적이 견고하면 방어만 해야 하고(實而備之), 적이 강하면 싸움을 피해야겠지(强而避之).”
“핫하하, 참으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황조는 이론에 밝은 인물이 아닌지 그저 껄껄 웃기만 했다. 마초는 풍칙에게 슬쩍 물었다.
“그래, 적이 견고하고 강하면 어떻게 해야겠나? 풍 도위는 좀 알겠나?”
“외람되오나.”
풍칙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적을 약 올려 화를 내도록 하거나(怒而撓之), 비굴하게 굴어 교만하게 만드는(卑而驕之)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하하, 손자병법을 외우고 있군. 무장으로서 좋은 자세일세.”
마초는 짐짓 크게 웃으며 풍칙을 칭찬했다.
대화할수록 총명함이 느껴지는 청년이었다. 그러다 보니 더욱 이상했다.
‘이런 자가 원래의 역사에서는 강동군의 병졸로 생을 마쳤다? 그럴 리 없다.’
이 청년은 아무리 봐도 풍칙이 아니라 낭야 출신의 강동군 장수 같았다. 그런데 그러면 또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대체 왜 풍칙이라는 가명으로 정체를 숨기고 있다는 말인가?’
잠시 후.
마초는 변소에 가는 척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자신의 수행원으로 위장하고 있던 이감을 불렀다.
“찾으셨습니까, 주공.”
“황조군에 수상한 자가 있네.”
“아까부터 계속 대화하시던 풍칙이라는 도위 말입니까?”
“그래. 그자의 곁에 사람을 붙이게. 앞으로 스무날 안에 황조군이 장사로 출진할 걸세. 내 생각이 맞다면…….”
마초는 눈을 반짝 빛내며 이감에게 말했다.
“풍칙은 그 안에 누군가를 만날 걸세.”
* * *
며칠 후.
풍칙은 그날도 변함없이 낮 시간을 보냈다. 아침부터 황조군의 군사들을 조련한 후, 병장기를 점검하고 무예를 수련했다.
그러나 저녁 시간은 조금 달랐다. 퇴청한 풍칙이 향한 곳은 강하 외곽의 한 저택이었다.
“이제 오는가.”
저택의 후원에 먼저 앉아있던 청년이 풍칙을 반겼다. 평복 차림이었지만 건장한 체격에 날카로운 눈매가 무장 같은 느낌을 풍기는 젊은이였다.
“오래 기다렸네.”
풍칙은 청년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후원에는 기생 두 명이 저마다 악기를 잡고 연주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있는 집 청년들의 술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자리였다.
풍칙은 기생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술로 목을 축인 후, 붓과 천을 꺼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 전쟁의 작전과 진격로인가.”
“그래. 이것만 보냈다가 혹시 잘못되면 낭패를 보니 내가 직접 그리는 게 가장 안전하지. 자네는 이 작전도에 먹물이 마르면 즉시 들고 떠나도록 하게.”
“알았네. 거사가 얼마 남지 않았네. 조금만 수고해주게.”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풍칙에게 대답했다.
그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아이고 어르신, 아니 됩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아, 안 돼!”
“돼!”
풍칙이 실랑이하는 소리를 들으며 눈살을 찌푸렸을 때,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콰앙!
“무슨 소리지?”
풍칙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청년이 일어났다. 당황한 기생들은 악기 연주를 멈추고 한쪽으로 몸을 피했다.
잠시 후, 문을 부순 장본인이 나타났다. 길고 검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거대한 백마에 앉아있는 미남자였다.
“이게 누구야. 강하태수부의 풍 도위 아닌가. 이런 곳에서 다시 보다니 정말 우연이군.”
도철을 탄 채로 저택 문을 부수고 들어온 마초가 씩 웃으며 풍칙에게 말을 건넸다.
풍칙은 묵묵히 마초를 바라봤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
마초가 정보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낙양 금군 출신의 시랑군이 마초의 눈과 귀가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의 행적에는 빈틈이 없었다. 중요한 뭔가가 누설되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설령 누설되었다 한들 어찌할 도리가 없다. 마초는 천하제일인이다. 일대일의 투장에서 여포를 꺾은 자가 내 칼에 쓰러질 리는 없다.’
무사히 넘어가지 않으면 그대로 죽는 것이다.
풍칙은 그런 생각을 하며 침착하게 마초를 응대했다.
“풍칙이 대장군을 뵙습니다. 어인 일로 먼 곳까지 오셨습니까?”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들렀네. 여기 있는 분은 뉘신가?”
“장사를 하는 친구입니다. 먼 곳으로 출진하기 전이니 여색이 탐나서 돈 많은 친구에게 기생을 불러 달라 하였습니다.”
누가 들어도 자연스러운 핑계다. 마초는 씩 웃으며 도철에서 내려 자리로 다가갔다. 그리고 풍칙의 친구라고 하는 청년에게 인사를 건넸다.
“풍 도위의 친구인가. 반갑네. 대장군 마초일세.”
“천하에 이름 높으신 대장군을 뵈어 영광입니다. 송겸입니다.”
“송겸이라. 역시 그랬군.”
마초는 송겸이라는 이름을 듣자 풍칙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송겸은 손책이 거병할 때부터 강동군에 있었던 숙장이다. 훗날 이릉대전에 참전해서 공을 세우게 된다.
‘이 송겸이라는 자는 강동군의 무장이다. 아직 무명일 테니 내가 자신의 이름을 모를 거라 생각하겠지. 그렇다면 풍칙의 정체는…….’
마초가 풍칙의 정체에 도달하는 사이, 송겸은 마초의 허리춤에 무기가 없는 것을 확인했다.
‘그만두게.’
이길 수 있을지 계산하는 송겸을 보며 풍칙이 고개를 저었다. 송겸은 눈으로 풍칙에게 물었다.
‘상대는 비무장일세. 자네는 백 명을 상대할 수 있는 고수 아닌가? 내가 마초를 붙잡을 테니, 자네가 그 틈을 타서…….’
‘병장기의 유무 따위는 중요하지 않네. 우리가 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네.’
풍칙의 눈빛을 읽은 송겸이 얕은 한숨을 쉬었다.
마초가 풍칙을 보며 말했다.
“사실 오늘은 자네에게 용건이 있네. 자네 행적이 여간 수상한 게 아니라서 말이야.”
“수상하다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다른 이름을 쓰고 있는데, 그럼 수상하지 않겠나?”
마초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어디까지 들통났는지 모르겠군. 만약 마초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면, 더 이상 실체가 드러나기 전에 송겸을 죽이고 나 또한 자결하리라.’
풍칙은 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왼손으로 품 안의 비도를 만지작거리며 마초에게 물었다.
“소인의 이름은 풍칙입니다. 대장군께서는 소인의 이름을 뭐라고…….”
“서성, 자는 문향.”
팟!
풍칙은… 아니, 서성은 마초가 자신의 이름을 대자 그대로 품 안에서 비도를 뽑았다. 살인멸구를 위해 먼저 송겸의 숨통을 끊을 셈이었다.
터억.
그러나 서성의 손은 비도를 뿌리기 전에 멎었다. 마초가 손을 뻗어 서성의 손목을 잡은 것이다.
“제길!”
서성은 아직 자유로운 오른손을 허리춤에 가져갔다. 그런데 칼을 뽑기도 전에 마초가 일어서는 게 보였다.
우당탕!
그저 손목을 잡혔을 뿐이다. 그런데 마초는 손목의 작은 접촉면을 통해 서성의 무게중심을 완벽하게 통제했다. 일어선 마초가 손목을 살짝 비틀자 서성은 그대로 눌려서 땅을 뒹굴었다. 미리 합을 맞춰 놓고 하는 연무에서나 볼 수 있는, 완벽한 청경의 수법이었다.
“으윽…….”
“이런 제길!”
옆에서 그것을 바라보던 송겸은 이를 갈며 칼을 빼 들었다. 그러나 송겸은 서성이 자신의 숨통을 끊으려 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무공 수준이 차이가 있었다. 마초는 송겸에게 눈으로 살기를 쏘아 보냈다.
“멈춰라.”
“크, 크윽!”
송겸은 마초의 눈을 마주하자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의 압박감에 칼을 뽑을 수 없었다.
‘이건 마치 돌아가신 손 장군… 아니, 그 이상이다.’
칼자루를 쥔 송겸의 손에 순식간에 흥건하게 땀이 고였다. 손목을 잡힌 서성은 여전히 마초에게 몸을 완전히 통제당해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그 상태로 있던 마초는 표정을 풀고 씩 웃으며 서성의 손목을 놓았다.
“이놈들아, 내가 명색이 대장군인데 내 앞에서 병장기를 뽑으면 되겠느냐? 하여튼 강동 녀석들은 필요 이상으로 씩씩해.”
“…그건 칭찬입니까?”
“최고의 칭찬이지. 나는 너희들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든다고.”
마초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하며 빙글빙글 웃었다.
“나는 강동의 일에 끼어들 생각이 없으니 안심하라. 그저 너희들에게 물어볼 게 있을 뿐이다.”
“그 말, 믿어도 되겠습니까?”
“이것 참 웃기는 놈이군. 안 믿으면 어쩔 거야? 꼭 손책 같은 소리를 하는구만.”
마초는 그렇게 서성을 타박한 후 유유히 술을 들이켰다. 송겸은 식은땀을 닦은 후, 기력이 소진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서성은 낮은 한숨을 쉬고 마초의 옆에 앉았다.
“좋습니다. 대체 궁금한 게 뭡니까?”
“먼저 너희들의 목적. 강동군의 무장이 정체를 숨기고 황조의 휘하에 잠입해 있는 이유는…전쟁터에서 황조를 전사로 꾸며서 암살하기 위해서인가?”
“그 외에 뭐가 있겠습니까.”
서성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 말을 듣자 마초는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역시 그랬군. 황조를 베는 큰 공을 세웠지만, 전혀 이름이 남지 않았다던 강동군 병졸 풍칙의 정체… 그게 바로 서성, 이 녀석이었군.’
서성은 서주 낭야군 출신으로, 조조의 서주대학살을 전후해서 강동으로 이주했다. 이후 강동군에 들어가서 손꼽히는 무장이 되어 수많은 전선에서 수많은 군공을 세운 명장이었다.
원래의 역사에서도 황조를 벤 풍칙의 정체는 병졸로 위장해 황조의 곁에 잠입한 강동군의 장수 서성일 것이다. 어쩌면 서성이 아닌 다른 장수가 풍칙이라는 이름으로 황조의 곁에 잠입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황조의 목이 그렇게도 탐났나.”
“황조는 파로장군(손책의 아버지 손견을 말함)의 원수입니다. 강동군에 황조의 목을 취하는 것보다 더 중한 일은 없습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황조는 군재가 있는 인물이니, 작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는 있어도 목을 얻기는 어려웠겠군.”
“맞습니다.”
서성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마초는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최근 강동군은 황조군에게 여러 고을을 내주고 밀려났지. 그래서 황조는 친히 장사 정벌에 나설 생각을 품게 되었고. 서성, 그대는 그 틈을 타서 황조를 암살하기 위해 잠입해 있고. 설마 강동군이 패한 것 또한 황조를 끌어내기 위한 교병계인가?”
“글쎄요. 소장은 높은 위치에 있지 않아서 그런 큰 그림까지는 잘 모릅니다.”
이번에는 서성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마초는 잠시 생각하다 크게 웃었다.
“하하, 강동군의 대도독은 참으로 무서운 인물이군.”
“대도독? 그게 누굴 말하는 겁니까?”
“아, 아직 그 친구가 대도독이 되기 전인가? 뭐 아무려면 어때.”
강동군에서 이런 계책을 쓸 만한 인물.
마초는 그게 누군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원래의 역사에서 동오의 대도독으로 적벽대전의 승리를 이끈 그 인물일 것이다.
‘주유가 틀림없다. 무서운 흉계를 꾸미고 있었군.’
서성은 마초를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대장군께서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건 그대들이 주는 정보에 따라 다르겠지. 내게 장사에 대해 알려다오.”
“장사에 대해서라면…….”
“장사태수 장선이 누구인지. 그동안 어떤 방법으로 황조군에게 저항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황조 암살이 성공하면 강동군은 장사를 어떻게 할 생각인지.”
마초는 서성과 송겸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그대들 강동군이 남방에서 무엇을 하든 관여하지 않겠다. 그러니 그대들은 알고 있는 것을 나에게 소상히 고하라.”
서성과 송겸은 서로 마주 보았다.
어차피 마초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마초가 강동군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이상, 최대한 협조해서 마초와의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만약 마초가 마음을 바꾼다면 강동군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갈 터였다.
“알겠습니다. 장사태수 장선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조사했습니다. 그에게는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저희의 추측으로는…….”
서성은 그렇게 말하며 장선의 정체에 대한 강동군의 추측을 말했다.
이야기를 듣는 마초의 눈이 커졌다. 들으면서도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