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황조를 만나다
마초는 가만히 곽독의 눈을 들여다봤다.
나이답지 않게 깊은 눈이었다. 많은 인생 경험을 가진 마초에게도 인상적인 눈이었다. 역사서에는 ‘곽준의 형이며, 일찍 죽었다’고만 전해지는 곽독이다. 그러나 지금 마초의 눈앞에 있는 곽독은 그런 범상한 인물이 아닌 것으로 보였다.
다만 그 눈에 떠오른 결의가 어떤 것인지 짐작하기 쉽지 않았다. 힘을 뽐내려는 협객의 것도, 공을 세우려는 무장의 것도, 이문을 남기려는 상인의 것도 아니었다.
‘뭔가 강한 신념을 가진 놈이군.’
마초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어떻게 대답할지는 이미 결정한 상태다. 그러나 마초는 곽독에 대해 궁금한 것을 조금 더 묻고 나서 대답할 생각이었다.
“자네들의 청대로 황조의 출병을 늦춰 주면, 나는 무엇을 얻지?”
“현인을 천거하겠습니다.”
“현인?”
“그렇습니다. 대장군께서는 지위고하나 노소에 관계없이 널리 인재를 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저희가 아는 사람 중에 형주 제일, 아니 천하제일의 지모를 가진 인물이 있습니다. 그 인물을 대장군께 천거하겠습니다.”
“재미있군.”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저런 미사여구로 지칭하며, 대장군에게 권력을 써 달라고 청탁을 하는데 반대급부로 그 인물에 대한 천거를 내건다는 말인가?
마초는 곽독을 보며 물었다.
“그 인물이 혹시 저 만두를 만든 사람인가.”
“아니, 대장군이 그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다 아는 수가 있지.”
마초는 씩 웃었다. 그리고 곽독과 곽준을 향해 말했다.
“질질 끌지 않고 대답하지. 내 대답은 거절일세.”
마초의 단호한 대답을 들은 곽독의 표정이 굳었다.
“대장군, 소인들이 청하는 이유는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대장군께서 일전 관중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신 것처럼, 소인들 또한 장사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먹으면 황조의 출병을 늦추는 것 따위는 어렵지 않다. 아니, 대장군의 힘을 사용하면 아예 전쟁을 막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소인들의 청을 들어주시면 틀림없이 많은 것을 얻으실 것입니다. 소인들이 천거하려는 이는 그저 글 읽는 선비가 아닙니다. 그는 관중과 악의에 비견할 만한…….”
“뭔가 대단한 인물을 천거하려는 건 잘 알겠네. 그런데 말이야.”
마초는 곽씨 형제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황상께 형주목의 인수를 받은 것은 유경승일세. 유경승에게 군권을 받은 것은 황조고.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그대들이 구하고자 하는 장사태수 장선은 따지고 들면 역적이란 말일세.”
“이각과 곽사가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시절에는 대장군께서도 역적으로 몰리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런데 나는 그 상황에서 이각, 곽사와 싸워 이겼고, 그래서 하루아침에 충신이 되었지.”
마초는 태연한 얼굴로 곽씨 형제에게 말했다.
“나는 남방의 일을 잘 모르네. 자네들 말처럼 장사태수 장선에게 정의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이 난세에 정의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있나? 정의를 실현하고 싶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싸워서 이겨라. 그게 내 대답일세.”
“으음.”
곽독이 낮은 신음을 흘렸다. 곽준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초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띠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가 끝났으니 우리는 이만 일어나야겠군. 만두 잘 먹었네. 만두값은 여기 놓고 가지.”
탁.
마초는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상 위에 놓고 일어섰다. 옆에 있던 비관도 엉거주춤 일어서서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곽독은 아우 곽준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헛된 기대였던가.”
“이렇게 될 줄 예상했지 않습니까. 너무 실망하실 것 없습니다.”
“네 말이 옳다. 그러나 못내 아쉽구나. 유가의 선비들은 대장군 마초를 두고 극히 난폭한 자라고 하지만, 그는 항상 약한 자의 편에 서서 강한 자를 막아내고, 전쟁터 밖에서 쓸데없는 살생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와 뜻이 통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그는 또한 친족을 끔찍이 아낀다고 합니다. 유자들과 방법이 조금 다를 뿐, 그 또한 별애(別愛)에 충실한 인물 아니겠습니까.”
곽준은 그렇게 말하며 마초가 놓고 간 비단 주머니를 열었다. 그 순간 곽준의 눈이 커졌다.
“아니……!”
“무엇이냐?”
놀라는 아우를 보고 비단 주머니의 내용물을 본 곽독도 덩달아 눈이 커졌다.
“이것은 설마…….”
안에는 술잔이 들어 있었다. 은은한 옥색을 띠는 투명한 유리잔이었다.
“말로만 듣던 유리를 실제로 보게 되는군요.”
곽준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유리는 서역에서 들여오는 수입품이다. 금이나 옥으로 채워지지 않는 중국 부유층들의 욕망을 충족할 만한 사치품이었다. 천하가 혼란해지며 서역 교역이 끊어진 후부터는 구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다 몇 년 전, 마초가 서량을 정벌하고 서역과의 교역로를 복원한 다음부터 물량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었다.
그리고 서역 교역로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의 형주에서는 더욱 구하기 힘든 물건이기도 했다.
“이걸 내다 팔면 얼마가 될지 상상도 가지 않는군. 이제 군자금 걱정 없이 병장기와 식량을 마련할 수 있겠구나.”
“대장군은 무슨 뜻으로 이런 물건을 주고 간 걸까요? 어쩌면…….”
마초가 자신들의 싸움을 지지하는 것일까?
그것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쨌든 마초가 지원해 준 군자금이 곽씨 형제가 하려는 싸움에 큰 힘이 되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 * *
양양성의 한 객점.
마초 일행이 숙소로 쓰고 있는 곳이다. 마초는 일행들을 모아 놓고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곽씨 형제의 의기는 가상하지만, 내가 이제 천하의 주목을 받는 위치에 있는데 선뜻 도움을 약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마초의 말을 들은 가후가 잔잔히 웃으며 대답했다.
“참으로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주공께서 또 하나의 목적이 있으신 모양입니다만.”
“하하하, 가 선생은 못 속이겠군요.”
마초는 씩 웃으며 가후를 향해 말했다.
“나는 곽씨 형제를 수하에 두고 싶습니다. 특히 아우인 곽준은 범상치 않은 인물입니다. 어떻게든 살려서 대장군부로 끌어들이고 싶은데, 그들이 장사의 전쟁에 끼어든다 하니 걱정이 됩니다.”
“앞으로의 전쟁에서 곽씨 형제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궁금하신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선생, 뭔가 방법이 없겠습니까?”
마초는 가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가후는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뭔가 판단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부족합니다. 강하의 황조는 어떤 사람인가? 장사의 장선은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곽씨 형제는 대체 왜 싸움에 끼어들려는 것인가? 일단 강하나 장사에 가서 전후 사정을 조금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강하와 장사, 둘 중 어느 곳을 먼저 가 보면 되겠습니까?”
“강하입니다. 대장군께서 양양을 떠나 멀리 움직이시려면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장사는 유 형주의 영역이 아니니 찾아갈 명분이 없지요. 하지만 강하는…….”
가후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슬쩍 올려서 위를 쳐다봤다.
“강하태수 황조를 만나러 갈 만한 좋은 명분이 하나 있으니까요.”
객점의 2층에는 예형이 감금되어 있었다.
* * *
형주에서 장강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강하군에 닿는다. 장강 중류와 하류, 형주와 강동을 나누는 경계가 되는 곳이다. 과거 적벽대전의 전장으로 유명했고, 오늘날에는 큰 역병의 발생지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
강하태수 황조는 자신을 찾아온 귀한 손님을 만나고 있었다.
“대장군께서 이 궁벽한 곳을 찾아주시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핫하하하하!”
황조는 마초에게 요리를 권하며 크게 웃었다. 그리고 자신 앞에 놓인 큼지막한 튀김 요리를 입으로 가져갔다.
바사삭.
우드드득.
튀김옷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황조가 뼈를 씹어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마초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런 황조에게 말했다.
“황 태수는 아무거나 잘 드시는군.”
“전장에서 사는 무인이 음식을 가려서야 되겠습니까? 그리고 이 박쥐튀김은 강하의 별미입니다. 대장군께서도 한번 드셔 보시면…….”
“아니, 난 사양하겠소.”
마초는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박쥐 대신 기다란 고기를 들어 씹기 시작했다. 뼈째로 건조해서 구운 오리의 목이었다.
“이건 그런대로 먹을 만하군.”
“으하하하, 대장군께서 입에 맞으신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아니 입에 맞을 정도는 아니고.”
대장군 마초가 뭐라고 하든지 신경 쓰지 않는 걸 보면 황조도 어지간한 사내였다. 마초는 피식 웃고 그런 황조를 관찰했다.
40대쯤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체격은 언뜻 비대해 보이지만 무인답게 동작에 힘과 절도가 있었다. 대장군 앞에서도 위축되거나 조심스러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저런 성격이니 강동군과 그렇게 싸우면서도 버틸 수 있었나 보군.’
원래의 역사에서 황조는 15년간 강동군과 싸우며 강하를 지켜 왔다. 승리보다 패배가 많았고, 15년째에는 끝내 패해서 목숨을 잃었지만, 그의 상대는 손견, 손책, 주유, 여몽 등 훗날 이름을 크게 떨치는 강동의 무장들이었다.
‘어느 정도 능력은 있는 인물일 것이다. 유 형주가 강동군에게서 형주를 지키는 방패로 쓰고 있지 않은가.’
15년 전, 강동군의 1대 수장 손견이 황조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 후로 황조는 강동군의 원수가 되어 세찬 공세를 막아내야 했다. 그러나 황조는 그런 강동군의 공세를 10년 가까이 버텨냈고, 강동군 2대 수장인 손책의 죽음을 계기로 마침내 강동 방면의 전선을 공세로 전환하려 하고 있었다.
황조는 그런 공적만큼 자기애도 강한 인물이었다. 마초 앞에서도 한참 동안 자기 자랑을 늘어놓은 뒤 용건을 물었다.
“형주목께서 소장께 보낸 인물이 있다고요?”
“아아, 예형 선생이란 분이오.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았는지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시오. 며칠 후에 예 선생의 몸이 나으면 만나 보시구려.”
마초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예형을 풀어주자 그는 역시나 유표 앞에서 갖은 욕을 하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유표는 예형을 강하의 황조에게 보내기로 했다. 다혈질인 황조가 자기 대신 예형을 죽일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모든 게 가후의 예상대로였다.
“예형은 조 승상이 보낸 인물이다. 어찌 조 승상의 사신이 홀로 뱃길을 가게 할 수 있겠는가?”
마초는 그런 명분으로 슬쩍 예형의 강하행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강하에 도착하자 정작 예형은 숙소에 가둬 놓고 자신이 먼저 황조를 만나고 있었다.
황조는 순간적으로 화제가 끊어지자 다시 새 화제를 꺼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자기 자랑이었다.
“손견을 벴던 이 황조와 손책을 벤 대장군이 한자리에 있으니, 강동 놈들이 알면 어지간히 분하겠습니다그려. 와핫하하하!”
강동군의 수장을 전사시켰다는 것으로 은근슬쩍 마초와 자신을 동급으로 놓는 발언이었다. 마초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것참, 황 태수께서 북방에 있었으면 크게 이름을 날렸겠구려. 손책이 죽은 후 강동군은 지리멸렬해진 것으로 알고 있소. 이제 강동군을 토벌하시려오?”
“그러고 싶지만, 그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어서 말입니다.”
“급한 문제라. 그게 무엇이오?”
마초가 흥미롭다는 듯 묻자 황조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남쪽에 형주목을 따르지 않는 역도들이 있습니다. 그 역도들을 먼저 쳐 없애려 합니다.”
“장사의 장선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강동군의 영역인 시상으로 진출해도 사실 지키기 어렵습니다. 반면 장사는 본래 형주에 속하니 지키기 쉽지요. 지금은 장사태수 장선을 중심으로 무릉, 영릉, 계양의 형남 4군이 전부 형주목께 반기를 들고 있지만, 장선이 죽으면 다른 군들도 더 이상 저항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황조는 딱히 마초에게 작전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준비가 끝나고 유표의 허락이 떨어졌으니 출진까지 불과 스무날도 남지 않은 것이다.
“으흠. 황 태수만한 명장이 이제까지 함락시키지 못한 걸 보면 장사태수 장선이라는 자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군.”
“소장도 그게 참 이상하단 말입니다. 한 번은 장사를 거의 함락시켰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놈들이 아주 이상한 병법을 쓰기에 실패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상한 병법?”
“온갖 특이한 무기와 함정을 만들어서 성을 지키더이다. 갈고리에, 마름쇠에, 게다가 땅굴을 파서 야습을 하지 않나, 하여튼 온갖 기책들을 다 쓰기에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것참 신기하군. 그런데, 장선군이 그런 병법을 쓴다면 지금도 장사를 공략하기 어려운 것 아니오?”
“하하, 그 문제는 소장이 해결했지요.”
황조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유 형주께 형주군의 무장을 한 명 빌렸습니다. 어떤 성이든 떨어뜨릴 수 있는 남방 제일의 용장이지요. 대장군께서는 그의 이름을 모르시겠지만 말입니다.”
“남방 제일이라.”
마초는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살짝 웃었다.
남방 제일이라고 불릴 만한 형주군의 용장. 마초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 또한 지난 생에서 마초와 함께 유비를 섬겼던 동료였다.
“황충이라는 인물입니다. 아직 무명입니다만, 그 용맹은 가히 삼군의 으뜸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지요.”
“그런가. 내 기억해 두겠소.”
그러나 황조에게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는 노릇이다. 마초는 모르는 척 황충의 이름을 듣고 넘어갔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황조는 자신의 수하들을 한 명씩 소개하기 시작했다. 도독 소비 이외에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인물들이었다. 마초는 건성으로 듣고 넘어갔다.
그런데 가장 말석에 있는 젊은이의 차례가 됐을 때, 마초의 눈이 빛났다.
‘무공이 있는 녀석이다.’
무공이란 결국 두 가지 요소로 결정된다. 얼마나 뛰어난 신체를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 신체를 얼마나 뜻대로 활용할 수 있는가. 50년 가까운 수련이 쌓이자 마초도 일상생활의 동작들만 보고도 그자의 무공 수준을 대강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젊은이는 발끝부터 손끝까지 유려한 움직임으로 일어나고, 걷고, 앉고, 술잔을 받았다. 자신의 신체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고수의 움직임이었다. 황조 같은 지방 군벌의 밑에 무명소졸로 있기는 아까운 재능이었다.
“이 친구는 얼마 전 얻은 도위입니다. 나이는 어린데 무용이 보통이 아니라서 가까이 두고 있습니다.”
“그런가. 그대는 이름이 무엇인가?”
마초는 흥미로운 눈으로 청년을 보며 물었다.
청년이 대답했다.
“풍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