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악담과 독설 (2)
왕찬, 자는 중선.
10대 초반에 이미 낙양에 이름을 떨친 천재 학자다.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채옹이 그의 지식을 아껴서 깊이 교류했던 바 있다.
동탁의 폭정으로 천하가 혼란해지자 왕찬은 형주 피난길에 나선다. 이때 백성들의 처절한 고통을 보고 지은 칠애시(七哀詩)가 아직까지 남아 그의 재능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니 학자로서 예형에게 뒤지지 않는 명성을 지닌 인물이다. 예형은 그런 왕찬을 보며 묘한 비웃음을 띠었다.
“왕 선생은 내 학식을 비웃을 셈이오?”
“예 선생의 학식이 깊은 것은 익히 알고 있지요. 그런데 아직 천하의 대사를 이룩하기 위한 공부는 부족한가 봅니다.”
“천하의 대사를 이뤄?”
“군자는 자신을 바로잡는 데는 곧은 먹줄과 같이 하고(故君子之度己則以繩), 사람을 대할 때는 끌어 당겨서(接人則用枻), 능히 너그러이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故能寬容) 하였습니다. 선생의 주장은 그저 말과 글로만 세상을 보는 자의 말에 불과합니다. 유 형주의 수하들이 옛 성인의 도리에 어긋난다고 욕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유 형주처럼 그들을 이용해 북형주를 안정시키고 전란으로 희생될 목숨들을 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왕찬이 순자의 말을 인용했다. 예형은 눈살을 찌푸리며 왕찬에게 물었다.
“순자의 비상편(非相篇)인가?”
“그렇습니다.”
예형은 말없이 한동안 왕찬을 쏘아봤다. 왕찬은 담담하게 그 시선을 받았다. 단정한 외모의 예형과 강렬하게 못생긴 외모의 왕찬은 꽤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예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보고 북방 제일의 선비가 아니라 했으니 선생도 그만한 재주를 가졌을 거라 믿소.”
“물론이지요.”
“어디 한 번 봅시다.”
예형은 왕찬을 시험하듯 고사를 인용하기 시작했다. 순자에서 시작된 논의는 맹자와 예기를 거쳐 좌전으로 이어졌다.
왕찬의 대답에는 막힘이 없었다. 그 또한 예형에게 지지 않을 만큼 지식은 해박하고 언변은 유려했다. 볼품없는 체격과 못생긴 얼굴을 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지성이었다.
천하에서 손꼽힌다는 형주의 선비들이지만 누구도 두 청년 사이에 끼어들지 못했다. 한참 동안 열띤 문답이 끝난 후, 예형이 씩 웃으며 말했다.
“남쪽에도 선비가 있었군. 내가 왕중선을 몰라봤소. 그런데 그만한 재주를 갖고 어찌하여 유 형주의 휘하에 몸을 굽히고 계시오?”
“난세입니다. 고작 글재주만 가진 자가 군웅의 휘하에 들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왕모는 그저 글재주 말고 다른 재주가 없음이 한스러울 뿐, 예 선생처럼 죽음을 구하지는 않겠습니다.”
“왕중선은 사인으로서 자각이 없는가? 그만한 학문을 가진 자가 썩은 이들에게 글을 팔겠다는 것이오? 그렇게까지 구차하게 살아서 주공 단이 되시려오, 아니면 태공망이 되시려오?”
“예 선생은 주공 단이나 태공망이 되지 못할 바에야 백이와 숙제가 되어 난세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하려 하시는군요. 저는 그저 왕찬으로 초라하게 목숨을 잇고자 합니다. 그렇게라도 살다 보면 아주 조금이나마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원래의 역사에서, 비슷한 또래였던 예형과 왕찬은 모두 젊은 나이에 학문으로 일가를 이뤄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삶은 크게 달랐다. 예형은 조조와 유표를 비롯한 난세의 강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 들어간다. 왕찬은 초년의 명성에 비해 그다지 돋보이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살다가 죽었다. 태평성대였다면 크게 출세했겠으나, 난세에는 그다지 이름을 남기지 못했으니 아무래도 왕찬에게 공부 말고 다른 재주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왕찬의 삶 중에 특이한 부분이 있다. 기억력이 유독 좋았던 그는 중원의 전란에 대한 당대의 이야기들을 모아 <영웅기(英雄記)>라는 책을 남긴다. 영웅기의 원전은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으나, 훗날의 학자들이 정사 삼국지의 주석으로 영웅기를 다수 인용하는 것으로 봐서 신뢰도 높은 1차 사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은 이상과 초라한 현실의 괴리를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택한 예형. 초라한 현실을 그저 살아가며 후대의 역사가들을 위해 기록을 남기고 간 왕찬.
마초는 설전을 벌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절망적인 현실에 어떻게 대처할지는 개인의 선택이다. 학문하는 이들 중 예형 같은 이가 하나도 없다면 그것도 옳은 세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왕찬의 방법이 마음에 드는군.’
두 사람이 설전을 벌이는 사이 어느덧 밤이 깊었다. 마초는 유표와 눈짓을 주고받아 연회를 파하게 했다. 예형의 도발로 후끈 달아올랐던 연회 분위기는 왕찬이 예형을 제지하며 미지근하게 식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의 연회는 피를 보지 않고 끝났다.
다음 날, 마초는 양양의 객점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 그리고 예형을 객점에 집어넣고 무장한 군사들을 스무 명이나 배치해서 물샐틈없이 지키게 했다.
“저놈이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도록 감시해!”
마초는 단호했다. 마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형님, 예 선생은 조 승상이 형주에 보낸 사신 아닙니까? 우리가 이렇게 가둬도 괜찮을까요?”
“안 될 건 또 뭐야? 조맹덕의 사신이니 목숨은 살려두는 거다!”
마초는 예형을 격리시키기로 했다. 조조의 사신으로 온 예형의 언행 때문에 유표가 어지간히 노했을 테니, 앞으로의 협상에서 마가군에 불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형주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해야 하는데, 저놈이 뭔가 사고를 치면서 일이 틀어질 수도 있으니까. 크게 도움 될 일도 없는 놈이니 차라리 가둬 버리는 게 낫지.’
객점에 격리된 예형은 한동안 건물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가 잦아들 무렵 마가군의 특산품인 고품질 닥종이를 잔뜩 넣어 주니 뭔가 쓰고 있는지 조용해졌다.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군. 얼마나 편하고 좋아?“
마초는 그렇게 예형을 단속한 뒤, 왕찬을 따로 불렀다.
왕찬은 천성이 자유분방하고 예법을 별로 중시하지 않았으며, 그런 성격으로 인해 유표의 눈 밖에 났다고 전해진다. 한쪽 분야만 발달한 천재들에게 흔히 보이는 허술한 사회성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날도 대장군 마초를 만나는 자리이건만 별로 긴장한 기색도, 기쁜 기색도 없이 덤덤하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난번에는 더벅머리 선비 하나가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실례가 많았네. 왕중선이 그 일을 언짢게 여기지 말았으면 하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거지요. 기분 나쁠 게 무엇이겠습니까?”
왕찬은 어찌 보면 초연해 보이고, 어찌 보면 사회성이 떨어져 보이는 태도로 그저 무심하게 마초의 질문에 답했다. 한 번 좋은 인상을 받아서 그런지, 마초는 그런 왕찬의 태도가 싫지 않았다.
‘어쨌든 대범하니까. 소심하고 경거망동하는 것보다는 낫지.’
형주에 온 목적 중에는 이 왕찬을 만나는 것도 있었다. 마초는 옆으로 고개를 슬쩍 돌려 시비를 보며 말했다.
“술을 내오너라.”
“네?”
“술을 내오라고 하지 않느냐.”
“아, 네!”
시비의 복장을 하고 마초의 옆에 서 있던 소녀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그리고 어색한 동작으로 안으로 들어가 술병과 잔을 가져왔다.
소녀의 나이는 18,9세 가량. 키가 크고 몸놀림이 가벼웠는데, 일하는 손놀림은 시비치고 어딘지 어설펐다. 마치 서역인과의 혼혈인 것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미색이 있는 편이었는데, 표정이나 자태가 사내 같은 면이 있어서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이 녀석은 티가 많이 나는군. 이래서야 왕중선이 눈치채지 않을까 걱정인데.’
마초는 시비로 위장해 있는 누이동생 마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칠애시를 감명 깊게 읽은 마수는 신랑감 후보로 점찍은 왕찬을 직접 보겠다고 굳이 형주까지 따라왔다. 시비로 위장해서 정체를 숨기고 왕찬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마수는 술병과 잔을 자리에 놓고 어색한 동작으로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왕찬의 얼굴을 계속 흘끔거렸다. 남에게 별 관심이 없는 왕찬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저 무심하게 있을 뿐이었다.
마초는 그 뒤로도 왕찬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위해 계속 질문을 던졌다. 왕찬은 대장군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재주도 있고, 기백도 있고, 성품도 괜찮은 자다. 단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런 왕찬의 외모가 몹시 볼품없다는 것이었다. 마초는 슬그머니 왕찬에게 물었다.
“왕중선, 자네가 올해 스물다섯이라 했지. 그런데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았다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내가 듣기로는 유 형주와 혼담이 있었다고 하던데?”
“유 형주의 사위가 될 뻔했는데 혼담이 깨졌습니다. 제가 못생겨서 싫다고 하시더군요.”
유표는 일찍부터 문장가로서 명성이 있던 왕찬을 사위로 삼으려 하지만, 왕찬의 볼품없는 외모와 자유분방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마지막에 혼담을 취소했다고 전해진다. 유표 본인의 의지였는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유표의 딸의 의지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외모를 몹시 중시했다. 원소, 제갈량, 순욱, 손책, 주유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으로 역사서에 기록된 미남들이다. 반면 왕찬은 역사서에 기록된 대표적인 추남인 것이다.
‘과연 못생기긴 못생겼군.’
게다가 못생긴 얼굴이 유독 크기까지 해서 못생김이 더욱 돋보였다. 마초는 왕찬을 찬찬히 살피다 질문을 던졌다.
“자네가 형주 피난길에 썼던 칠애시(七哀詩) 말인데.”
“아아, 보셨습니까?”
“보다 뿐인가. 장안에서 그 시가 유명하다네. 전쟁통에 고통 받는 백성들의 슬픔을 노래했지. 글공부와 담을 쌓은 내 누이도 칠애시를 좋아한다네. 진정 마음이 따뜻한 문사가 아니라면 쓸 수 없는 글이라고 하더군.”
“마음이 따뜻하다… 좋은 말입니다만.”
왕찬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런 난세에 따뜻한 마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가진 것은 글을 읽고 쓰면서 얻은 헛된 명성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게 통하는 세상이 아니지요. 지금 세상에 필요한 것은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창검의 힘입니다.”
유표의 휘하에서 중용되지 못하고 겉돌던 왕찬은, 원래의 역사에서 유표가 죽자 조조의 편에 선다. 이후 조조의 휘하에서 문관직에 종사하며 학술과 의례에 관한 업무를 맡았다가 41세의 나이로 강동 원정길에서 병사한다. 반면 그의 두 아들은 얼마 후,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되었으니, 그를 조조의 충신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초는 원래의 역사에서 왕찬의 행적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창검의 힘이라. 이자는 무력을 가진 주군을 원하고 있었나 보군. 무력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자라면 누구든 상관없다는 건가.’
유표가 왕찬을 홀대한 만큼, 왕찬 역시 군사력이 부족한 유표에게 큰 충성심을 보이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네의 뜻을 알겠네. 난세를 끝낼 만한 무력을 가진 자, 지금 그런 자는 천하에 단 둘이 있을 뿐이지.”
“조 승상, 그리고 마 대장군이시지요. 안타깝게도 유 형주는 그 사이에 끼지 못합니다.”
“하하, 솔직한 친구로군.”
마초는 왕찬과 몇 마디 정담을 나눴다. 왕찬은 조조나 마초에게 귀부하여 천하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고 싶은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마초도 왕찬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뜻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 헤어졌다. 마초는 왕찬이 떠나자 시비로 위장해 있던 누이 마수를 불렀다.
“왕중선이 나는 썩 마음에 드는구나. 수, 네 생각을 말해 봐라. 직접 보니 어떻더냐?”
“그야, 뭐… 직접 뵈니 인품도 훌륭하시고, 말씀도 잘하시고…….”
마수는 그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마초는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좋다. 사내가 인물이 다는 아니지만, 인물이 너무 빠져서 네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혼담을 넣어도 되겠느냐?”
“인물이 왜요? 그 정도면…….”
마수는 다시 한번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눈 감고도 외울 정도로 왕찬의 칠애시를 좋아하는 마수다. 좋아하는 예술가에 대한 흠모의 감정 앞에서 외모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잘 됐구나. 곧 적당한 날을 택해 혼담을 넣을 테니 그리 알아라.”
마초는 크게 웃으며 마수의 혼사 문제를 정리했다.
마가군의 군사력은 이미 천하제일에 가깝다. 경제력도 조조군 다음 가는 수준이다. 천자의 편에 서서 이각과 원소를 격파하며 명분도 얻은 상태다.
단 한 가지 부족한 것은 사족 사회에서의 평판이었다. 마초는 이번 형주행을 기회로 사족 사회에 이름이 있는 명사들을 마가군으로 끌어들일 계획이었다. 학자이자 문장가로 유명한 왕찬은 그런 목적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냥 끌어들이는 것도 아니고, 마수와의 혼례를 통해 매부로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흡족한 것은 따로 있었다.
‘저 녀석이 시집가는 걸 다 보게 되는군.’
원래의 역사에서 누이동생 마수는 한수와의 싸움이 있었을 때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었다. 하지만 회귀한 후, 이것을 미리 예측해서 죽을 목숨을 살리고, 이제 혼례까지 주선하게 되었다.
‘그래, 이제 더는 가족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마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수는 그저 얼굴을 붉히며 왕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