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209화 (209/306)

209화. 악담과 독설 (1)

양양성.

11년 전, 형주목으로 부임한 유표는 치소를 무릉에서 양양으로 옮긴다. 상대적으로 중원과 가까운 양양은 그때부터 형주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중원에 전쟁이 끊이지 않게 되자 양양에는 각지의 피난민들이 모여들었다. 이각의 폭정을 피해 내려온 관중 사람도 있었고, 조조의 학살을 피해 도망친 서주 사람도 있었다. 전란의 시대에도 양양이 있는 북형주만은 전쟁터가 된 적이 없었다. 유표가 북형주의 정세를 안정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오면서 양양의 저잣거리를 보니 마치 옛 장안을 보는 것처럼 번화하더군요. 유 대인의 공덕이 참으로 크십니다.”

마초는 유표를 보며 말했다. 형주목 유표는 마초가 양양에 도착하자 바로 형주목의 치소로 맞아들여 극진히 대접하고 있었다.

“허허허, 대장군께서는 과찬을 거두시지요. 대장군이야말로 관중에서 두 역적을 참하고 대기근을 끝낸 영웅이 아닙니까?”

두 역적이란 이각과 곽사를 말한다. 유표는 긴 수염을 쓸며 마초의 공을 치하했다.

유표는 나이가 지긋했다. 올해 환갑이 되었으니 아직 40대 후반인 조조나 마등보다 앞선 세대의 인물이었다. 고대의 기준으로는 장년도 아닌 노인이었지만, 아직 체격은 건장하고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이자가 유경승(경승은 유표의 자). 과연 그냥 책상물림은 아니다.’

마초는 유표를 찬찬히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표는 당대의 이름난 학자였다. 주역에 대한 깊은 이해로 유학자로서의 명성을 먼저 얻었다. 평화로운 시대라면 그저 학문이 높은 황족 출신의 학자로 살다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평범한 학자가 아니었다. 난세가 되자 유표는 동탁을 잘 구슬려 형주목의 자리를 얻은 뒤, 북형주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다. 혈혈단신 형주목으로 부임한 유표는 양양의 대호족인 채가와 혼인 동맹을 맺는다. 채가의 가주 채풍의 딸을 후처로 맞은 것이다.

유표는 그렇게 끌어들인 채가의 세력을 이용해 북형주 일대의 토호들을 한자리에 모은 후, 전부 몰살시킨다. 그렇게 암살을 통해 권력을 잡고 북형주를 지배하는 군웅이 된 것이다.

그 정도의 과감성을 갖췄던 유표지만, 현대에는 우유부단하고 기회를 잡지 못하는 인물이라 전해진다. 그것은 남방의 요충지에 자리 잡은 유표가 아무리 좋은 기회에도 총력전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총력전을 하려면 부하들의 절대적인 충성이 필요하지. 아마 유표는 형주 군부에 그 정도의 영향력이 없었을 것이다.’

나관중이 알려준 역사에 기록된 유표의 모습, 그리고 자신이 같은 시대를 살며 전해 들었던 풍문들.

마초는 그 두 가지를 조합해서 유표의 본 모습을 추리했다. 유표와 형주의 중신들, 유력 호족들이 다 모인 연회 자리에서 눈치를 보니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대장군, 이 채모가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양양의 대호족 채모는 당당한 풍채에 귀티가 흐르는 중년 사내였다. 적당히 살집이 있었지만 둔하지 않고 건강해 보였다.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할 때마다 좌중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외지인이라도 그가 유표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이름 높으신 채 공과 교류하게 되어 기쁘오. 이 초의 술도 한 잔 받으시오.”

마초는 술잔을 주고받으며 슬쩍 주변을 살폈다. 채모가 말할 때마다 유독 크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무관직에 있는 이들 중에 그런 경우가 더욱 많았다.

‘군부에 대한 영향력은 유표보다는 채모가 큰 건가.’

혈혈단신으로 부임해서 군벌까지 된 유표의 수완도 보통은 아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호족과 군벌 관계는 미묘하다. 겉으로는 호족이 군벌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호족들이 우두머리가 되어줄 군벌을 선택하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채모는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듯 당당한 태도로 마초에게 말했다.

“대장군께서 먼 형주까지 왕림하신 건 단지 봉지를 둘러보기 위함은 아닌 것으로 압니다. 듣자 하니 혼담을 가지고 오셨다고요?”

“아아, 올해 열아홉 된 누이가 있소. 형주에는 장래가 밝은 젊은이들이 많으니, 여러모로 부족한 누이지만 적당한 인물을 찾아 혼사를 추진해 볼까 하오.”

“오호, 그렇습니까?”

채모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는 천하에 이름 높은 대장군 마초와 사돈을 맺을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내 아들은 아직 어리고, 집안에 열아홉 살 먹은 처녀와 맺어줄 만한 적당한 사내가 없군. 안타깝구나.’

사실 채모에게는 마초가 아니라도 든든한 뒷배가 있었다. 바로 조조였다. 채모와 조조는 젊은 시절 낙양에서 같이 학문과 시를 논하던 친구 사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뒷배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천하의 패권이 누구에게 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채모는 조조와 마초에게 각각 한쪽 다리를 걸쳐 놓고 싶었다. 그런데 마초의 혼담에 끼어들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이럴 때, 형주 제일의 유력 호족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이 혼담이 황가나 괴가로 가면 그들이 마가군을 등에 업고 우리 채가의 입지를 위협할 것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다른 유력 호족이 마초와 사돈을 맺으면 단숨에 채가의 위상을 위협할 만큼 성장할 것이다.

그러니 아예 혼담을 깨거나, 또는 형주에 기반이 없는 인물과 이어지도록 유도해서 혼인과 함께 형주를 떠나 낙양으로 가도록 유도한다. 채모는 그것을 통해 형주 내에서 채가의 위상을 지킬 생각이었다.

채모는 겉으로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대장군께서는 수경장이라는 곳을 아십니까?”

“글쎄요.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마초가 수경장을 모를 리 없다. 수경장은 이번 형주행의 가장 중요한 목적지였다. 그러나 마초는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돌렸다.

“근처에 수경 선생이라는 학식 높은 선비가 은둔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저택에 외지에서 온 젊은이들을 모아서 후원하고 학문을 교류하게 하는데, 이 젊은이들이 하나같이 누운 용, 어린 봉 같은 인물들이지요. 수경장을 한 번 방문해 보십시오. 대장군의 마음에 차는 청년이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까요?”

채모의 속내를 짐작한 마초는 구석에 있는 서서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서서가 바로 수경장 출신이었던 것이다.

서서는 술잔으로 입을 가리고 표정을 감추고 있었다. 본래 죄를 짓고 수배를 당했던 몸이니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때, 한쪽 구석에서 요란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으하하하! 아핫하하하!”

마초를 따라온 인물들 중 한 명이 배를 잡고 큰 소리로 웃고 있었다. 채모는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대는 예형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무엇이 그렇게 우스운가?”

“채 공이 머리를 쓰는 게 우스워서 내 아니 웃을 수 없었소이다. 크하하하!”

예형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폭소를 터뜨렸다. 명백하게 무례한 행동이었다.

채모는 마초 쪽을 흘긋 돌아봤다. 마초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저 친구는 조 승상이 보낸 사람이라 내 말을 듣지 않소.”

“그렇습니까?”

예형이 마초의 사람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 채모는 위엄 있는 표정을 하고 예형을 꾸짖기 시작했다.

“예정평, 그대는 젊은 나이에 학문이 높아 북방에서 이름을 떨쳤다고 들었네. 그러나 손님으로서 주인 앞에서 행동하는 예는 배우지 못했나 보군.”

“주인? 어질고 의로운 자가 천하의 주인이 되는 것이 이치올시다. 그런데 형주에서는 채씨가 주인 행세를 하려는 것이오?”

“뭣이? 그대는 세 치 혀로 이 채모를 격동시키고자 하는가?”

“채 공이 격동하시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올시다. 말했다시피, 나는 그저 채 공의 머리 쓰는 모습이 우스워서 웃었을 뿐이오.”

“뭐야?”

“그렇지 않소? 대장군이 혹시나 다른 형주 유력자와 사돈을 맺을까 전전긍긍하며 수경장으로 가서 외지인들 중에 찾아보라고 하시니, 그 모습이 참으로 우습소이다.”

“이자가, 말이면 다인 줄…….”

채모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을 때, 조용히 듣고 있던 유표가 나섰다. 채모와는 달리 속내를 알 수 없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예 선생은 말을 삼가게. 채덕규(덕규는 채모의 자)는 형주를 위해 큰일을 하는 선비일세.”

유표의 목소리는 낮고 힘이 있었다. 예형은 그런 유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도발하듯 피식 웃었다.

“그건 미처 몰랐습니다. 형주에는 천하의 재사들이 많이 있다고 들어와서, 채 공이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줄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허허허.”

예형의 가시 돋친 말을 들은 유표는 그저 너털웃음을 지었다.

“예 선생의 학식이 깊다고 들었네만, 예(禮)에는 어둡군. 손님으로 와서 이리 무례할 줄은 몰랐네.”

“으하하하! 내가 예를 모른다 한들, 어찌 형주목 대인에게 비하겠습니까?”

“허허, 그대는 입만 열면 남을 비난하는군. 나의 어디가 그리도 무례하던가?”

예형은 유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유 대인께서는 채덕규와 같은 소인배를 중용하니 이는 눈이 잘못된 것입니다. 일개 주목의 몸으로 천지에 제사를 지내기에 한덕고(덕고는 한숭의 자)가 그만두도록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으니 이는 귀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마치 천자라도 된 것처럼 아악(雅樂)을 따로 만들고, 천하가 도탄에 빠지면 유씨 성을 내세워 황위를 노릴 야심을 품고 있으니 이는 온몸이 다 잘못된 것이지요. 이치에 맞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어찌 대인을 두고 무례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국지연의>를 통해 우유부단하지만, 덕이 있는 인물로 그려진 유표.

실제로 역사상에 남은 행적을 봐도 그는 우유부단했고, 또한 덕이 있어 존경도 받았다. 그러나 동시에 대단한 야심가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그가 풍요로운 형주 땅의 기반, 학자로서의 명성, 유씨 성이 증명하는 황실의 혈통을 기반으로 일개 군웅 이상의 큰 야심을 가졌다고 여겨진다.

예형이 이 사실을 지적하자 좌중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가 유표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는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자리에서 모욕을 당한 유표는 그저 수염을 쓸며 평정심을 가장하고 있었다.

그때, 침묵을 깨고 누군가 입을 열었다.

“예정평은 조 승상의 명을 받고 온 사람이니 대장군부의 누구도 그에게 참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 승상이 유 형주께 모욕을 가하라고 명하지는 않았을 터. 오늘의 이 일은 예정평이 벌인 것이니 유 대인께서 처분하십시오.”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몰렸다. 그곳에는 마초를 따라온 여윈 중년 사내, 가후가 앉아있었다.

“형주에서, 그것도 형주목의 치소에서 일어난 일이니 유 대인께서 죄를 정하실 수 있습니다. 관서대도독부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참형으로 다스렸을 것입니다.”

가후는 그렇게 말하며 마초를 바라봤다. 마초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군부에서도 참견하지 않겠으니 형주에서 알아서 처분하라는 뜻이었다.

‘가 선생,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무서운 인물이군.’

연회가 시작되기 전, 가후는 마초에게 예형을 굳이 제지하지 말라고 간언했었다.

예형이 유표에게 갖은 모욕을 가하면 그것을 빌미로 유표가 예형을 벌하게 한다. 예형은 조조가 보낸 사람이니 그를 벌하면 유표는 자연스럽게 조조와 척을 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마초가 유표와의 협상을 더 유리하게 끌고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가후는 예형을 희생시켜 마가군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으하하하! 마음대로 해보십시오. 이 빌어먹을 세상, 승상부에서 죽으려 했으나 죽지 못해서 여기까지 흘러온 몸이오. 여기서 죽으면 썩은 선비로 이름을 남기지 않을 수 있는데, 그까짓 목숨이 아까울 게 무엇이겠소?”

예형은 이것을 바랐던 것인지 폭소하며 말했다.

“나는 북방에서 제일가는 선비올시다. 결코 배움이 짧아서 결례를 저지른 것이 아니오! 그러니 어서 나를 참수하여 이름을 더럽히시오. 유 형주께서는 이미 눈과 귀와 마음이 더러운데 이름 하나 더 더러워진다고 무슨 큰일이 나겠소?”

유교 사회의 특징.

그것은 귀족들이 학자와 관료를 겸한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관료로서 뛰어난 이들보다 학자로서 뛰어난 이들이 더 많은 존경을 받았다. 예형은 학자로서 대단히 명성이 높았고, 그로 인해 특별한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렇게 막말을 하면서도 지금까지 목이 붙어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런 뛰어난 학자인 자신이 모르고 결례를 저질렀을 리 없으니 자신을 참수하라고 유표를 압박하고 있었다.

‘남의 손에 죽으려고 용을 쓰다니, 뭐 이런 자가 다 있나. 그나저나 난감하게 됐군. 이만한 모욕을 당했으니 여기서 그냥 넘어가기도 어렵게 되었다.’

예형은 60년을 산 유표도 처음 보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그렇게 유표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예 선생의 말은 틀렸습니다.”

연회장의 맨 끄트머리. 유표와 예형, 마초와 가후가 앉아있는 곳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 사람이 일어났다. 아직 젊은 청년이었다.

예형은 말석에 있다 일어난 청년을 향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내 말이 어디가 틀렸소? 그대는 유 대인이 더럽지 않다고 주장할 셈이오?”

“글쎄요, 뭐 더러울 수도 있겠죠.”

‘으응?’

가만히 듣고 있던 마초는 기가 막혔다.

말석에 있던 청년은 유표 휘하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유표의 도덕성에 대한 지적은 무심한 말투로 넘겨 버리고 있었다.

말석에서 일어난 청년은 상석 쪽으로 다가왔다. 걸음걸이가 어딘가 삐딱했다.

청년은 키가 무척 작았다. 반면 얼굴은 남들보다 두 배쯤 커서 신체 비율이 기묘했는데, 그 큰 얼굴이 아주 강렬하게 못생겨서 누구나 기억할 수밖에 없는 독특한 외모였다.

마초가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초는 청년의 외모를 보자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예형은 못생긴 청년을 보며 씩 웃었다. 청년은 천하에 이름난 명사였으니, 예형도 그의 특이한 인상착의를 보고 정체를 짐작한 것이다.

“그럼 뭐가 틀렸다는 거요?”

“북방 제일의 선비라는 부분. 별로 공부를 제대로 하신 것 같지는 않네요.”

“으하하, 좋소. 내가 뭘 공부를 제대로 안 했는지 들어봅시다, 왕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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