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형주로
“조맹덕과 담판을 지었소. 나는 다음 달에 형주로 떠나 아홉 달쯤 형주에 머물 예정이오.”
마초는 대장군부의 관원들을 모아 놓고 형주행을 선언하고 있었다.
“형주에는 난세를 피해 많은 명사들이 모여있고, 그들을 중심으로 학문이 발달해 있소. 이번 형주행에서는 최대한 많은 형주의 인재들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오. 형주목에게 보내는 서신은 가 선생께서 닦아 주시오.”
“알겠습니다.”
가후가 짧게 대답했다.
조정의 요직을 전부 사양한 가후는 대장군부의 종사중랑으로 마초의 근처에서 일하고 있었다. 혹자는 그런 그를 보고 권력자의 총애를 탐한다고 수군거렸지만, 아는 사람들은 가후가 낮은 직위에 머무는 까닭을 알고 있었다.
‘가 선생은 동탁군 출신이라 여기저기에 적이 많다. 대장군의 측근으로 있는 게 가장 안전할 것이다.’
‘게다가 대장군의 처결이 필요한 일은 전부 가 선생을 통해 출납되니, 권한으로 치면 실세 중의 실세가 아닌가.’
마초는 가후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가후 옆의 청년에게 시선을 옮겼다.
“원직은 본래 형주 출신이지. 자네도 이번 형주행에 같이 가도록 하세. 오랜만에 벗들을 만나면 좋지 않겠는가.”
“감사한 말씀입니다.”
가후를 따라 마가군에 합류한 종사 서서였다. 한미한 집안 출신에, 과거 죄를 짓고 수배됐던 이력까지 있어 당장 높은 관직을 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서서는 일 처리가 엄정하고 학문이 높아서 대장군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일에 흔들리지 않는 강단까지 겸비했으니 앞으로 더 크게 쓰일 인재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감흥패, 자네도 같이 가 줘야겠어.”
“주공께서 가자고 하시면 가야지요. 하지만 소장은 수련을 빼먹을 수 없습니다. 어지간한 일들은 다른 무관에게 맡기시고, 소장은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형주에서도 수련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십시오.”
감녕은 2년 전부터 사람이 달라졌다. 술도 줄이고 매일 무공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여포와 두 차례에 걸친 싸움을 치르며 뭔가 느낀 모양이었다.
마초는 그런 감녕을 보며 싱긋 웃었다.
“거 사람 참. 알았네. 그러면 다른 한 명의 무관으로는…….”
“역시 제가 가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교위 마대가 자신 있게 나섰다. 이제 어지간히 전장 경험도 쌓았고 나이도 스물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철이 든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가후, 서서, 감녕, 마대.
익주에 갔을 때에 비하면 수행원들의 면면이 상당히 호화로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형주행에서 얻으려는 인물들은 익주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거물들인 것이다.
“좋아. 그리고 관중, 자네도 가야겠지?”
마초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관중 쪽을 돌아봤다. 형주행을 처음부터 같이 구상한 나관중이 빠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관중의 얼굴이 흙빛이 되어있었다.
“주공, 그것이…….”
“그것이?”
“그것이… 잠시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날의 자리가 파하고 마초와 독대한 나관중.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자 마초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채 소저가… 회임을 했다고?”
채염은 글을 써야 한다고 비혼을 고집하고 있었다. 나관중의 문장이 뛰어나니 스승으로 모시고 이따금 만나서 같이 시문을 짓는 사이였다.
“시를 가르치는데 왜 임신을 해?”
“그, 그게 그러니까…….”
나관중은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했지만, 듣는 사람은 왜 임신했는지 모를 리 없다. 마초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할 수 없지. 그렇다면 이제 자네가 해야 할 일은 뻔하군.”
첫째로는 채염의 배가 불러오기 전에 최대한 빠른 속도로 혼례를 치르는 것이다. 둘째로는 해산하게 되면 산파에게 돈을 두둑하게 주고 언제 출산했는지 입막음을 하는 것이다.
“양쪽 다 집안에 어르신이 없군. 형식적이라도 혼담을 주재하려면 나이 지긋한 인물이 좋은데…아버지는 먼 장안에 계시니 적절하지 않고.”
“사실 종 복야께 말씀드릴 참이었습니다.”
상서복야 종요는 나관중의 서예 실력과 문장력을 아껴서 친밀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조조 측이 아니라 친 마가군 성향의 인물로 분류될 지경이었다.
“그거 잘 됐군. 좋아, 아쉽지만 이번에는 자네 없이 다녀와야겠어.”
“주공, 그렇다고 이 중요한 일에서 아예 빠질 수는 없습니다. 먼저 형주에 가 계시면 저는 혼례식을 치르고 나서 합류하겠습니다.”
“자네가 너무 빨리 오면 내가 채 소저에게 원망을 듣겠지. 혼례를 치르고 한두 달 푹 쉬다 합류하게.”
제갈량이나 방통 같은 인물들을 만나려면 나관중이 있는 편이 좋다. 그러나 마초는 그것 말고도 형주에서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일들이 있었다.
“나도 자네가 합류하기 전에 따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좀 있지.”
“예? 따로 처리해야 할 일이요?”
“그래. 마침 이것도 혼사 문제로군.”
* * *
며칠 후.
형주로 떠날 준비가 한창인 대장군부에 손님들이 찾아왔다.
“우리 왔어요.”
“오라버니,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수와 화가 오라버니를 뵙습니다.”
마초의 두 누이, 마수와 마화였다.
올해로 마수가 열아홉, 마화가 열여덟이니 고대의 기준으로 혼인할 때가 되었다. 보통 귀족 집안의 딸들은 집안에서 적당한 혼처를 물색해 주기 마련이지만, 유독 두 딸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던 마등은 두 딸들이 원하는 혼처를 찾아주고 싶어 했다.
마수가 먼저 원하는 신랑감을 말했다. 무예에만 푹 빠져 있는 마수답지 않게,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지은 사람과 혼인하고 싶다고 했던 것이다.
“칠애시(七哀詩)를 지은 사내를 만나고 싶다고?”
칠애시의 저자는 왕찬이라는 젊은 문사였다. 건안칠자 중에서도 첫손 꼽힌다는 천재로, 지금은 형주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왕찬의 이름이 나오자 얼굴을 붉히는 마수 대신 마화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어설픈 문사들은 문장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칠애시는 달라요. 백성들의 고통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 따뜻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이지요. 언니는 칠애시에서 자상한 사내의 모습을 본 게 아닐까요?”
평소 학문을 즐기는 마화답게 말이 술술 나왔다. 마초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래, 수는 형주에 가서 일단 왕찬을 만나 봐라. 만나보고도 마음에 들면 혼담을 넣어 보마. 그런데 화는 왜 따라오는 거냐?”
“혹시 모르잖아요? 형주에 제 신랑감도 있을지.”
마화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밝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마화의 사내 보는 눈이 여간 까다롭지 않다는 것을 전해 들었던 마초다. 웃는 마화를 보며 마초는 신랑감으로 누가 좋을지 생각했다. 누이동생을 시집보내려면 인품이 어지간히 괜찮은 사내여야 할 것이고, 마화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학문에도 능통해야 할 것이다.
‘만약 화가 제갈량하고 혼인을 하면?’
그러나 마초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난 생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제갈량은 부인 황씨와 사이가 각별했다. 그사이에 끼어들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억지로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다.
‘남는 인물들이… 방통은 외모 때문에 저 녀석 마음에 차지 않을 것이고, 마량은 성씨가 같으니 곤란하지. 그렇다면…….’
아무래도 장완이 적임자가 아닐까 싶었다. 제갈량의 후임으로 촉한의 재상이 됐던 사내다. 능력도 뛰어나고 성격도 원만하며, 지금은 18,9세 정도의 젊은이일 것이다. 마초는 내심 장완을 후보 1순위로 정했다.
“좋아. 형주에 가서 수의 혼담을 넣어 보고, 할 수 있다면 화의 혼담도 추진해 보마.”
이렇게 형주행에 마수와 마화가 추가되었다.
* * *
가후, 서서, 감녕, 마대, 마수와 마화.
이렇게 마초를 따라서 형주로 갈 인물들이 정해졌다. 이들이 없는 동안 대장군부의 일은 황권이 맡기로 했다. 황권은 그만한 능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출발을 며칠 앞두고 또 한 명이 추가되었다. 이제까지 일면식도 없던 인물이었는데, 조조가 자기 대신 유표에게 소개시켜 달라며 맡긴 인물이었다.
형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마초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그 인물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나는 대장군이 천하에 둘도 없는 대장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유표 같은 소인배 따위를 만나러 형만(荊蠻)의 땅으로 직접 찾아가다니요? 유표는 주역을 조금 익혀서 마치 당대의 대학자인 것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실상은 남쪽 땅에서 유씨 성을 내세워 천하를 넘보는 도둑놈일 뿐이지요.”
“아아, 그래.”
“유표가 이끄는 형주 학파란 작자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유학이란 앎과 실천을 따로 뗄 수 없는 것이니, 난세를 살면서 목숨을 던지지 못하고 시골에 숨어들어 경전의 자구나 고쳐 대면서 유학자인 양 행세하는 것들을 어찌 학인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자들은 그저 밥주머니요, 고기 자루일 뿐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공중니(仲尼, 공자의 자)가 일찍이 예(禮)가 아닌 것은 쳐다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대장군이 나를 형주로 끌고 갈 수는 있겠으나, 나를 유표나 형주학파 같은 소인배들 앞에서 떠들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누가 저놈 입을 좀 닥치게 할 수 없나?”
마초는 질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가후가 잔잔히 웃으며 그런 마초를 달랬다.
“소인배 앞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하니 저와 함께 있으면 조용해지겠군요. 정평(예형의 자), 대장군은 그만 놓아주시고 나와 같이 갑시다.”
예형은 가후가 나서자 눈살을 찌푸리며 뭔가 한마디 하려 했다. 그러나 마초가 눈으로 살기를 쏘아 보내자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잠잠해졌다. 가후에 대한 모욕은 참지 않겠다는 의도를 읽은 것이다.
마초는 그런 예형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조맹덕은 어디서 저런 골칫덩어리를 찾아서 나에게 떠넘긴 거지?”
서서가 마초의 옆으로 와서 대답했다.
“예형은 소부 공문거(문거는 공융의 자)와 교분이 깊은데, 공문거가 최근 조 승상에게 예형을 천거했다고 합니다.”
공융은 관직은 높지 않지만, 당대에 손꼽히는 명사였다. 뛰어난 유학자이고, 술을 즐기는 사교적인 인물이었으며, 엄청난 문벌을 가진 명문가의 후예였기 때문이다.
“그야 공자의 후손이니까 가문의 위세로 따지자면 황족 이상이지. 그런데 그런 공문거가 어쩌다 저런 잡놈을 찾아서 사귄 거야?”
“공문거가 청주 북해군에서 태수를 오랫동안 지냈으니까요. 예형도 청주 사람이라 그때부터 교분이 있었나 봅니다. 저래 봬도 학식은 높은 모양이라, 두 사람이 서로를 공자와 안회가 살아 돌아왔다고 칭송하며 친밀하게 지냈다고 하더군요.”
“저딴 게 안회라니 이런 얼어 죽을…….”
마초는 예형을 바라보니 그저 한숨만 나왔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공융은 예형을 조조에게 추천했다. 예형이 학식이 높고 명성이 있다는 말을 듣자 조조는 예형을 불러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는데, 예형은 입을 열 때마다 조조와 그 휘하 인물들의 욕을 해서 조조의 분노를 샀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형을 자기 손으로 죽여 버리면 남들 눈치가 보이니까 나에게 떠넘겼군. 형주목 유표에게 보내는 승상부의 사신으로 만들어서 말이야. 하여튼 조맹덕 이 교활한 놈…….”
예형은 분명히 학식은 뛰어나다. 그러나 오만하고 공격적인 태도 때문에 도저히 써먹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사실 정도의 차이일 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태도를 가진 지식인은 드물지 않다. 높은 지식으로 인해 오만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이들이 자신의 지식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무력감과 자괴감을 견디지 못하고 공격적으로 변하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예형은 그런 자신의 속내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고, 여러 사람의 원한을 산 끝에 끝내 죽음을 맞았다. 유학자의 지식이 세상에 통하지 않게 된 난세이니 예형처럼 오만하고 공격적인 지식인은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름을 남긴 것이 예형 하나일 뿐, 이 시대의 지식인들 중에는 예형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을까.
‘원래의 역사에서 예형은 유표에게 갔다가 또 유표의 원한을 사서 강하의 황조에게 보내지지. 그리고 황조의 손에 죽는다. 분명히 유표를 만나는 자리에서도 저렇게 아무 말이나 떠들면서 사고를 칠 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럴 때 필요한 게 나관중인데 하필 지금 나관중이 없었다.
고민하던 마초는 예형의 옆에서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가후에게 시선이 닿았다. 여전히 얼굴은 여위어 있었지만,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 태도는 예전보다 여유가 있었다.
‘가 선생이 뭔가 답을 찾아내겠지. 그보다 나는 형주에서 할 일이 많다.’
예형이 그토록 증오해 마지않는 형주 학파의 명사들을 마가군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앞으로 오륙 년만 지나면 제갈량을 비롯한 형주의 젊은 인재들이 두각을 나타낼 것이다. 마초는 그 전에 그들을 선점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누이동생의 혼담도 넣어야 하고 말이야.’
마초는 말을 몰아 길을 재촉했다.
며칠 후, 일행은 형주목의 치소가 있는 양양성에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