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마초연의-207화 (207/306)

207화. 구온춘

201년 초봄.

낙양에 새 조정이 선 뒤 한 해가 흘렀다.

대장군이 된 마초는 군부의 수장이면서도 별로 하는 일이 없었다. 군부 내에서도 마가군과 조조군의 세력이 나뉘어 있는데, 대부분의 일은 마가군 세력의 대표인 전장군 서황과 조조군 세력의 대표인 표기장군 조인이 의논해서 처리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자신이 모시는 주군의 이득을 추구하면서도 명분과 합리성 안에서 움직였다. 둘 다 뛰어난 야전 사령관이라 같이 일을 하다 보니 은근히 서로 흠모하는 마음도 생겼다. 그러다 보니 크게 충돌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할 일이 없는 반면, 대장군부에 예산과 인력은 풍부했다. 자연스럽게 대장군부에서는 주로 엉뚱한 일들을 벌이고 있었다.

“오호, 이제 꽤 그럴싸한 걸 만들어냈군.”

마초는 나관중이 가져온 책을 훑어보며 씩 웃었다. 비싼 종이로 만든 책이었다. 나관중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살던 시대의 종이와 인쇄술을 재현하자니 처음에는 엄청나게 힘들었지요. 주공께서 각지의 장인들을 모아 주셔서 이제 5할 이상 진척된 것 같습니다. 몇 년 더 연구하면 지금보다 두 배 더 많이, 두 배 더 빠르게 찍어낼 수 있을 겁니다.”

나관중이 살던 14세기에는 이미 활판인쇄술이 존재했다. 금속활자까지는 아니고 주로 흙을 구워 만든 교니활자가 주류였다. 물론 그 수준은 현대와는 차이가 커서, 대량 인쇄는 당연히 불가능하고 인쇄의 품질도 들쭉날쭉해서 그저 필사보다 빠른 것에 의의를 둘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글자를 틀로 짜서 책을 찍어낸다는 발상은 정말 대단한데. 이건 어떻게든 우리 시대에 도입해 봐야겠어.”

활자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종이였다.

나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책을 인쇄하는 건 몇 번 봤지만, 종이를 만드는 것까지는 자세히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적당히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지요. 일단 좋은 나무를 얻어야 하고, 가공 기술도 개발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합니다.”

나관중이 살던 14세기에는 튼튼한 닥나무 종이가 최고로 통했다. 특히 원나라 문사들 사이에는 고려에서 수입한 닥나무 종이, 고려지가 명품으로 통용되었다.

‘하지만 내가 살던 시대의 고려지처럼 가볍고 튼튼할 필요는 없어. 대량 생산이 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인쇄술은 종이를 싼값에 많이 생산할 수 있어야만 의미가 있다.’

그래서 나관중은 닥나무, 뽕나무, 소나무를 주재료들과 보릿짚, 목면, 갈대 같은 부재료들을 다양하게 실험해 보며 최적의 종이를 개발하고 있었다.

마초는 나관중이 시험 인쇄한 서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적의 제목은 <상한론(傷寒論)>이었다.

“군문에는 항상 병이 많지. 게다가 앞으로는 풍토가 다른 중원이나 남방에서도 전쟁을 치러야 하니, 의서를 대량으로 인쇄하여 부대에 보급할 것이다.”

부대마다 군의관과 의무병을 둬서 질병과 외상을 치료할 수 있는 군을 만든다.

그 계획의 책임자로 장중경을 끌어들인 마초는 갖은 수단을 동원해 장중경의 연구를 후원하고 있었다. 상한론을 인쇄한 것도 그러한 움직임의 일환이었다.

“장중경 선생의 연구가 어느 정도 완성되고 있으니, 이제 곧 나와 약속한 대로 군의를 위한 의서를 집필하고 그들의 교육을 맡아 줄 것이다. 당장 만나보고 싶은데, 지금은 장중경 선생이 외유 중이라고 했었지?”

“예, 주공. 선생께서는 지금 형주에 가 계십니다.”

“형주라.”

마초와 나관중은 서로 마주 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형주에는 그들에게 꼭 필요한 인물이 있다. 그러니 한 번은 찾아갈 수밖에 없는 곳이다.

“제갈공명이 올해 스물한 살이 되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오래 기다렸다. 이제 공명을 잡으러 가야겠군.”

사실 제갈량을 데려오려고 했던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장안에 태학을 재건한 후, 전국 각지에서 수재들을 태학으로 불러들였다. 미래를 아는 마초와 나관중이니 뒤로 손을 써서 나중에 크게 이름을 남기는 인물들이 추천 명단에 포함되게 했다. 고유, 유이, 최림, 노육 같은 이들이었다. 그리고 아직 소년에서 청년 정도의 나이에 불과한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태학의 최대 후원자는 관서대도독 태부 마등이었으니, 이들은 자연스럽게 친 마가군 성향을 가진 채 앞으로 조정의 중심이 될 것이다. 이제는 굳이 마초가 발품을 팔지 않아도 태학을 통해 유망한 문사들을 선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하필 형주에서는 올라오는 인물들이 영 시원치 않았지. 양양에서 추천했다는 녀석이 제갈량도 아니고, 방통도 아니고, 그… 이름이 뭐더라?”

“최주평입니다. 법 군사에게 물어보니 상당히 명석한 청년이라고 하더군요. 법 군사가 남의 칭찬을 잘 하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나관중 역시 상당히 명석한 청년 따위를 기대한 게 아니었다. 명재상으로 역사에 이름이 남은 제갈량, 또는 그의 맞수로 불리던 방통 정도는 되어야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좋아. 어쨌든 우리가 형주에 다녀올 때가 된 것 같군. 말이 나온 김에 당장 일정을 잡아야겠어.”

마초의 관직은 대장군이고, 작위는 양양후다. 후작을 받게 되자 이날을 위해 일부러 봉지를 형주 양양현으로 청한 것이다.

“그런데 주공께서는 한의 대장군이시지 않습니까. 봉지를 둘러보러 간다는 핑계만으로 자리를 비우기는 좀…….”

“그렇기는 한데, 마침 내가 자리를 비워도 될 만한 상황이 생긴 것 같더군.”

마초는 씩 웃었다. 이감에게 들은 첩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 * *

다음날.

마초는 황궁 못지않게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건물을 찾았다. 승상 조조가 정무를 보는 승상부였다.

속관이 안내하는 대로 후원으로 들어가 보니 조조는 잔뜩 더러워진 작업복을 입고 여러 항아리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장군 마초가 조 승상을 뵙습니다.”

“아아, 대장군. 잘 오셨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소이까?”

조조는 마초 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심각한 얼굴로 항아리에 담긴 것들을 맛본 후, 이내 환하게 웃으며 그중의 한 항아리에 담긴 액체를 조롱박에 가득 채워서 들고 왔다.

“…승상께서는 뭘 하고 있는 겁니까?”

“천하를 조금 더 좋은 곳으로 바꾸고 있었소. 핫하하하!”

조조는 크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는 조조가 즐기는 요리들이 차려져 있었다. 하나같이 맛은 뛰어났지만, 양이나 가짓수가 승상부의 손님상치고는 단출한 편이었다. 조조는 마초에게 요리를 권하며 조롱박에 담은 액체를 한 잔 따라서 내밀었다.

“내가 최근 술 담그는 일에 푹 빠져 있어서 말이오. 마침 대장군께 한 잔 드리고 싶던 참이었는데 잘 됐소이다. 드시지요.”

조조가 직접 작업복을 입고 만든 술은 맑고 투명했다. 한 모금 넘겨보니 맛은 부드럽고 향은 은은했다. 누구든 이 술을 한 번 맛보면 천하의 명주라고 평할 것이다.

마초는 술맛을 보고 피식 웃었다.

‘구온춘(九醞春)을 벌써 만들었나. 지난 생에서는 적벽대전에서 패한 뒤 소일거리 삼아 만들었다고 하던데, 이번에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빨리도 만들었군.’

역사에 남은 조조의 일생은 누구보다 뜨거웠다.

그는 일생 동안 수많은 전쟁을 치렀는데 대부분 선두에 서서 지휘했다. 그러면서 정치가로서는 둔전제나 구현령 같은 급진적인 정책들을 실행했고, 몇 년에 한 번씩은 거침없는 숙청을 단행했다. 그렇게 바쁘게 사는 와중에도 수많은 처첩에게서 수많은 자식을 보았고, 당대에 손꼽히는 시인이기도 하였으며, 직접 술을 빚을 만큼 음식에도 관심이 많았다.

“좋은 술은 사람들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 마련이오. 마가군에서 소주를 만든 것을 보고 내 깨달은 바가 많았소이다. 이런 술을 계속 연구하다 보면 천하가 더 좋은 곳으로 바뀌지 않겠소?”

“승상께서는 참 바쁘게도 사십니다.”

“사실 예전부터 술을 만들고 싶었소. 매번 전쟁이나 정무에 시달려서 시간을 못 냈는데, 지금은 전쟁도 없고 정무는 순문약이 알아서 다 해주고 있으니 이런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지요.”

조조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두 사람이 구온춘 한 병을 비우자 말투도 예전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마맹기, 자네도 요즘 대장군부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벌이고 있다지?”

“의서를 한 번에 많이 찍어내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데, 그저 소일거리일 뿐이오.”

“그래, 오늘은 무슨 일 때문에 왔는가? 그저 안부나 묻자고 온 것은 아닐 테고.”

조조가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마초는 알 듯 모를 듯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조공이 너무 오래 바깥바람을 쐬지 않으셨기에 걱정되어 찾아왔소. 이제 슬슬 전장으로 나가고 싶지 않으시오?”

“으흠, 그건 그렇지. 내가 밖에서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지만 집에 가면 마누라 눈치가 보여서 살기가 힘들다네. 어디 전쟁이라도 났으면 싶은데 말이야.”

마초는 조조가 너스레를 떠는 것을 듣자 헛웃음이 나왔다.

조조가 말하는 마누라는 정씨 부인이다. 원래의 역사에서 조조는 완성에서 장수와 싸우던 도중 과부 추씨와의 불륜에 푹 빠져 있다 야습을 당해 큰아들 조앙을 잃었다. 그리고 이 일로 정씨에게 이혼을 당한다.

그런데 지금은 마초가 개입하며 역사가 바뀌었다. 장수가 완성에서 세력을 만들기도 전에 하내 전투에서 마초에게 패하고 팔다리가 잘리게 된 것이다. 그러니 조조의 큰아들 조앙은 지금까지 건재해서 조조의 후계자로 공인받았고, 사이가 좋지 않은 아내 정씨와도 아직까지 결혼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원본초가 쓰러졌다고 들었소.”

“역시 자네는 정보가 빠르군. 벌써 몇 번이나 각혈을 했다고 하네. 아마 명줄이 얼마 남지 않았겠지. 허허, 철없을 때는 그 친구하고 어울려서 못된 짓도 하고 다녔는데…….”

조조는 옛 친구를 생각하며 감상에 젖은 눈으로 먼 산을 바라봤다. 그 옛 친구의 병세를 가속시킨 게 조조 자신이지만 그런 건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이제 조조의 인성에 익숙해진 마초는 그저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후계자 원상이 아직 15,6세 남짓한 애송이라 들었소. 이제 하북의 원소군 사이에 심각한 내분이 일어나겠군요.”

“그렇겠지. 이것 참 나도 자식 농사를 잘 지어야 그런 꼴을 면할 텐데.”

“하북으로 출진하실 생각이 아니시오?”

마초가 바로 용건을 던졌다. 조조는 씩 웃었다.

“그러고 싶지. 하지만 우리 사이가 좀 미묘하지 않은가?”

마초와 조조.

하나의 조정에 수장이 두 명 있는 상태다. 이 상황에서 누구 하나가 자리를 비울 수 없다. 남은 하나가 무슨 짓을 벌일지 계산이 서지 않는 것이다.

“나도 그리 생각했소. 조공께서 나 혼자 낙양에 있는 게 마음에 걸려서 하북으로 출진을 못 하고 있을 거라고.”

“정확히 봤네.”

“내가 같이 자리를 비운다면 어떻겠소?”

“오호라.”

조조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 빛냈다.

“마맹기,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건가?”

“형주에 한 번 다녀올 생각이오. 내 봉지가 양양에 있으니 그곳도 둘러보고, 겸사겸사 남쪽 유람도 좀 하고.”

“하하, 지난번에 자네는 그렇게 익주에 가서 엄청나게 많은 것들을 얻어냈었지. 이번에는 또 어떤 것들을 얻어낼 셈인가?”

“글쎄, 그건 가 봐야 알겠지요. 지난번처럼 조공의 수하들이 나를 암살하려 들지만 않으면 꽤 많은 것을 얻지 않겠소?”

조조가 이번 원정으로 하북을 얻으면 단숨에 천하의 판도가 조조에게 기운다.

‘그러나 나는 원래의 역사를 알고 있다. 한 번 원정으로 하북을 얻을 수는 없다.’

지금은 201년이다. 원래의 역사에서 200년에 조조가 관도대전에 승리하며 승기를 잡았고, 202년에 원소가 죽었다. 그럼에도 조조가 하북을 완전히 얻은 것은 207년이 되어서였다. 남은 원가 잔당의 저항이 격렬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조조는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기한을 정해 놓고 우리 둘이 동시에 낙양을 뜨는 거로군. 나는 북쪽으로, 자네는 남쪽으로.”

“그렇소.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하고, 내년 정월에 낙양에서 다시 만납시다.”

마초와 조조가 직접 창칼을 맞대면 수많은 피가 흐를 것이다. 그럴 만한 명분도 없다. 게다가 아직 천하가 평정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전쟁이 아닌 경쟁의 형태를 제안한 것이다.

“흥미롭군. 자네가 남쪽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 올지, 내가 북쪽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 올지 말이야.”

“받으시겠소?”

“물론.”

조조는 짧게 대답했다.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경쟁심이 드러나 있었다.

손익 계산이 너무 복잡해서 짧은 순간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계산하기 이전에, 그는 승부를 즐기는 인물이었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네.”

“내가 먼저 제안했으니 그 정도는 들어 드려야겠지. 말씀하시오.”

“마침 내가 형주에 보내려던 인물이 하나 있네. 그 인물도 같이 데려가 주게. 별달리 할 것은 없고, 그저 형주목 유표에게 그 인물을 소개시켜 주기만 하면 되네.”

“인물?”

마초는 그 인물이 누구일지 생각했으나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조조는 그런 마초를 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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